153화. 셋 중 둘은 함정2021.08.15.
라틸은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단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화난 얼굴일 리도 없다. 라틸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찻잔을 들어 뜨거운 김을 후후 불다가 최대한 태연한 척 물었다.
“옛 친구는 잘 만나고 왔어?”
“반반입니다.”
“반반?”
“악우인 줄 알고 나갔는데. 악우가 아니더군요.”
그러시겠지.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돌아온 건데. 악우라 표현할 수는 없지. 홍차를 부는 라틸의 입김이 더 거세졌다. 칼라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싱그레했다.
“이상하군요.”
“뭐가.”
“분명 친구를 만나고 오라 허하신 건 주인이신데. 왜 이렇게 기분 나빠하시는 걸까요.”
라틸은 덤덤한 척 “기분 나쁘지 않아.” 하고 대답했으나, 옆을 보자 까만 창문에 비친 자신의 구겨진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칼라인이 ‘거봐요’ 하고 놀리듯 눈웃음을 지었다. 라틸은 후후 불기만 한 홍차를 도로 내려놓고서 내내 고민하던 질문을 던졌다.
“칼라인, 혹시 하렘에서 나가고 싶어?”
“이것도 뜬금없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네가 어떤 여자와 사이좋게 있더란 보고를 받았다.”
칼라인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라틸은 얼른 변명조로 덧붙였다.
“내 눈으로 본 건 아니다. 미행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황제라, 길거리에도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많거든.”
차마 따라갔단 말은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칼라인도 그 부분을 더 추궁해 묻진 않았다. 대신 칼라인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오해를 산 모양입니다. 제가 어떤 여자와 만난 건 맞지만, 사이좋게 있진 않았습니다.”
내 눈으로 그 그리움에 찌든 눈빛을 봤는데, 사이좋게 있지 않았다고? 라틸은 저도 모르게 호통을 쳐서 칼라인을 직접 뒤쫓았단 사실을 들킬 뻔했으나,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라틸은 손부채질을 하다가 홍차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일단 칼라인에게 돌아가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에서는 말실수를 하기도 쉽고, 후회할 말을 뱉기도 쉬우니.
“도미스를 만났다며?”
이런 식으로. 라틸과 칼라인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 * * 비슷한 시각. 폭파 전문 마법사는 어쩔 수 없이 하얀 머리 뱀파이어가 알려준 지하성에 찾아가고 있었다. 그곳은 말이나 마차, 다리를 이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착할 수도 없는 곳이어서, 폭파 전문 마법사는 지하성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성에 머무르는 이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리란 것을.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행동한다지만, 저 안에 평범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다면 그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저기야.”
마침내 지하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 위에 도착했다. 하얀 머리 뱀파이어는 그의 부서진 지팡이를 움켜쥐고서 끝부분으로 지하성을 가리켰다.
“저 앞에 있는 높은 성벽을 무너뜨리면 돼. 침입할 필요도 없다. 네 능력으론 쉽지?”
“…….”
“어려워?”
“저 벽에 무슨 장치라도 되어 있습니까?”
“장치?”
“나보다 그쪽이 훨씬 강한데. 왜 그쪽이 나서서 부수지 않는 건지…….”
하얀 머리 뱀파이어는 지팡이를 폭파 전문 마법사에게 돌려주면서 실쭉 웃었다.
“자기 안위보다 호기심이 중요하다니. 참 학구적이구나.”
대답해 줄 수는 있지만 그다음엔 죽여버릴 거란 협박이었다. 폭파 전문 마법사는 더 질문하는 대신 순순히 지팡이를 받아 들었다. 이대로 지팡이를 저 괴물 같은 뱀파이어에게 겨눠 한 번 더 공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것도 그만두었다. 저 괴물은 눈 깜짝할 사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아무 기척도 없이 여기저기 이동하기 일쑤였다. 그가 지팡이를 올려 드는 순간에 이미 뒤에 나타날 게 뻔했다.
“얼른 가.”
그 짧은 고민조차 눈치챈 듯 하얀 머리 뱀파이어가 빙그레 웃으면서 등을 두드렸다.
“잘해.”
* * * 우레 같은 소리가 울리며 성벽이 흔들렸을 때, 틀라는 망루에 나와 있었다. 발밑이 흔들렸으나 틀라는 재빨리 균형을 잡고서 망루 끝으로 달려갔다. 그 기르골이란 놈인가, 생각했지만 그놈은 아니었다. 300m쯤 떨어진 곳에 부서진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려 했으나 그자가 든 지팡이에서 하얀빛이 쏘아지더니 발밑이 다시 한번 거세게 흔들렸다. 발밑이 또다시 흔들리자 틀라는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넘어지진 않았다. 몸이 휘청이는 순간, 어느새 곁으로 온 여우 가면이 그의 팔을 잡아준 덕이었다. 그러나 틀라는 여우 가면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해 얼른 그를 놓고 물러섰다. 여우 가면은 틀라를 놀리는 대신 턱으로 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위험하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로드. 제 굴로 피신하면 됩니다.”
또다시 굉음이 들리며 빛이 번쩍이자 틀라는 얼결에 여우 가면을 따라갈 뻔했다. 여우 가면이 다시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틀라는 제정신을 차리고서 황급히 그의 팔을 뿌리쳤다.
“응?”
여우 가면은 틀라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왜 안 오십니까?”
다시 굉음이 나며 아까보다 벽이 더욱 크게 흔들리자, 여우 가면도 두 팔을 약간 들어올렸다 내렸다. 틀라는 더욱 크게 휘청였으나 여전히 여우 가면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로드?”
여우 가면이 틀라를 재차 불렀다. 가면 탓에 표정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바빠 죽겠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냐고 여기는 투였다. 틀라는 입술을 깨물고서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여우 가면이 다시 틀라를 불렀다.
“로드, 얼른 오시지요. 위험합니다.”
그러나 틀라는 그쪽으로 가는 대신 한 걸음 더 뒤로 가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갈 거다.”
“로드?”
“두 번 도망치진 않을 거다. 저자 하나 정도는 내 힘으로 처리할 수 있어. 안 그런가? 네 말대로 내가 로드가 맞다면?”
여우 가면의 입술이 일자로 꽉 다물렸다. 불만스러운 표정.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동의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로드는 아직 각성하지 않았습니다. 각성한다면 아주 강해지시겠지만, 아직은 약점도 많습니다.”
5초 정도의 어색한 침묵 끝에 설득하는 말이 나왔으나, 틀라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아예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끊임없이 빚덩이를 쏘아대는 낯선 사람을 노려보았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틀라는 목덜미에 커다란 충격을 느끼고 의식을 잃었다. 힘없이 털썩 무너지는 몸을 받아 든 여우 가면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번거롭게 굴기는.”
* * * 라나문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편지를 옆에 내려놓았다. 또 시작이다. 그가 500년에 한 번 나타나는 대적자라며,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그 편지가 또다시 도착했다. 악이 세력을 빠르게 키워가고 있으니, 더 이상 늦어지면 훈련을 받을 시간도 부족해질 거라는 이야기. 그가 나서지 않아도 악의 무리가 라나문을 찾아낼 테니 무섭다고 피해서도 안 된단 이야기 등이었다. 한 자, 한 자, 얼마나 정의로운 말과 대의명분이 가득한지, 라나문의 허락을 받고 편지를 같이 읽어본 카르둔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하기까지 했다.
“어쩌실 거예요, 도련님?”
그러나 카르둔은 박수를 치는 대신 조심스럽게 라나문에게 물었다. 라나문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편지 귀퉁이만 문질렀다. 카르둔은 그 눈치를 살피다가 재차 물었다.
“계속 이런 편지가 오니까 무서운데…… 그냥 폐하께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요?”
“폐하께?”
라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라나문이 그제야 조금 반응을 보였다. 카르둔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죠, 다나산에 있는 작은 마을 하나가 하룻밤 새 완전히 사라졌대요, 도련님. 사람이 한 짓이 아니란 말이 있어요. 무서워요.”
카르둔은 초조하게 손을 꼼지락거렸으나 라나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카르둔은 손에 이어 발가락까지 꿈지럭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도련님이 대적자라던가, 진짜로 그런 존재라면 후궁으로 있을 수 없어서 그러세요?”
“글쎄.”
“만약 도련님이 대적자라면 오히려 바로 국서 자리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신관도 후궁으로 있는데. 과연 그럴까.”
대신관이 후궁으로 있는데 대적자가 국서 자리에……. 카르둔은 머리를 굴려보다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저, 그러면 대신관 얘기가 나온 김에요, 도련님. 여기 성기사들도 머무르는데, 성기사단장이나 대신관 님에게 이 일을 의논해보면 어떨까요? 그게 그 사람들 전문이잖아요.”
카르둔은 자기가 말을 해 놓고서도 자기 제안이 퍽 마음에 들어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게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될 거라 여겨지는 것처럼. 그러나 라나문은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 평소라면 대부분 라나문의 뜻을 따르겠지만, 이번에는 카르둔도 다시 라나문을 재촉했다.
“계속 무시하고 있다가 나중에 큰일이 터지면 어떡해요, 도련님. 우리 대신관한테라도 상담받아 봐요. 네? 그 사람은 이상해 보여도 착하잖아요.”
“어릴 때. 좀비나 이런 것들이 나오지도 않았을 때도 한 달은 결국 신전에 잡혀 있었지.”
“네?”
“그런데 좀비까지 나온 이 와중에 내가 대적자일지도 모른단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카르둔. 국서? 국서는커녕 아예 신전에 잡혀갈지도 몰라. 가서 뭘 할지 몰라도 이번엔 절대 한 달로 안 끝나겠지.”
카르둔은, 라나문이 남들은 석 달 가 있던 신전 생활을 한 달 하고 온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어린 시절 일이나 다녀온 기한까지 다 기억하는 모양이다. 당시에 신전에 갈 때도 다녀와서도 별 표정 변화가 없어서 적당히 잘 있다 온 줄 알았는데. 싫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걸까? 어쨌든 라나문의 말은 일리가 있긴 했기에 카르둔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도련님은 자존감이 참 높은데. 그러면서도 공명심은 한없이 바닥에 가까우시네요.”
대적자인 게 밝혀져 신전에 끌려간다고 해도 세계를 구할 영웅이 되는 건데. 이렇게 관심을 안 보일 수가 있다니. 위험하긴 해도 다르게 생각하면 국서보다 더 좋은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어쩌겠는가. 본인이 싫다는데. 어쨌든 그의 주인인 라나문이 저렇게 나오자, 카르둔은 좀 더 생각해보다가 다른 방향으로 제안을 꺼냈다.
“그러면 도련님. 후궁들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상담해보면 어떨까요?”
“믿을 만한 사람?”
“조용하고 신중한 데다 공부도 많이 한 게스타 님이나. 깐죽거리는 게 심하긴 해도 의외로 입이 무겁고 머리도 잘 굴리는 타시르 님이요.”
“…….”
“아, 칼라인 님도 괜찮겠네요. 무뚝뚝하지만 믿음직하잖아요. 든든하고. 클라인 황자가 부적을 잃어버렸을 때 좀 수상한 행동을 보였지만 조사해 봐도 별문제 없었고 이후로는 잘 지냈으니까…… 게다가 용병왕이잖아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