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너한테 실망했다2021.08.08.
아이니는 묘한 눈으로 칼라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로.
“무슨 소리야?”
그러나 칼라인이 대답을 하기 전. 점원이 다가와 아이니가 주문한 오리 고기 요리와 칼라인이 주문한 커피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점원이 멀어지자 아이니는 아까 했던 대화는 다 잊어버린 것처럼, 칼라인의 앞에 놓인 커피 한 잔을 보며 웃었다.
“그거 먹고 돼? 넌 여전히 먹을 거 안 좋아하는구나.”
칼라인이 커피 잔을 쥐고 입으로 가져가자, 아이니는 포크와 나이프를 챙기면서 또 놀렸다.
“아기 뱀파이어 입맛이네.”
놀리는 목소리는 정답고 애정이 가득했으나 칼라인은 덤덤히 커피만 마셨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니는 계속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조차 그녀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칼라인이 커피를 연달아 세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두자, 아이니는 그제야 자신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니가 사프란을 뿌린 오리 고기를 칼로 조금씩 조금씩 자르는 동안, 칼라인은 말없이 계속 커피를 마셨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아이니의 움직이는 손에 고정되었다. 아이니는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입에 넣다가, 칼라인과 눈이 마주치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도록 웃었다.
“내가 먹는 걸 보니까 배고파? 항상 그랬잖아.”
눈을 마주친 채 아이니가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였다. 잘 먹는 모습은 보기 좋았으나, 칼라인은 여전히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아이니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리는 걸 보고 있었으니까. 카리센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 분명히 반응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널 봐서 기쁘니까. 내가 살린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있는 게 기쁘니까.”
그러나 아이니가 내내 보이던 밝은 모습은 칼라인의 다음 말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 모습을 오랜만에 보여줘서 고마운데. 고마운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유감이군. 날 살린 거. 당신이 아냐.”
아이니는 포크를 내려놓고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데, 칼라인.”
그저 순순히 자신을 다시 만난 걸 기뻐하면 될 텐데. 칼라인은 마치 아이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지금도 꼭 그녀를 남처럼 표현했다. 칼라인이 놀라고 혼란스러워서 저러는 거라고 넘어가려 했으나, 연달아 두 번이나 저런 식으로 말하자 조금 거슬렸다.
“혹시 내 얼굴을 잊었어?”
“그 얼굴을 말하는 거라면 기억하고 있다.”
“그럼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건 아닐 텐데.”
아이니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냅킨도 내려놓았다. 반듯하고 고운 이마에 주름이 드리워졌다.
“내 착각일까? 왜 네가 날 못 알아보는 것 같지?”
그런 모습으로 아이니가 내뱉은 질문에 칼라인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착각하게 했다니 미안하군. 좀 더 확실하게 말해야 했는데. 당신은 날 반갑게 찾아왔지만 우리는 서로 반가워 할 사이가 아니다.”
아이니는 테이블에 내려놓은 포크를 다시 쥐었으나 오리 고기를 또 먹진 않았다. 그녀는 계속 포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 ……그새 마음이 변했단 뜻이야?”
가까스로 속삭이듯 읊은 질문에, 칼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커피를 리필 해줄지 물어보려던 직원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마음이 변하지 않았단 뜻이다.”
“그런데 나한테 왜 그렇게 대해? 너 꼭, 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말해.”
“당연히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당신은 도미스가 아니니까.”
빙글빙글 한 자리를 맴돌던 말이 마침내 또렷한 칼날로 변했다. 아이니의 표정이 손등을 칼로 찔리기라도 한 듯 변했다.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그가 저런 뉘앙스로 말하는 것 같단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설마설마했다. 칼라인이 지금 내뱉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미스가 아니라면 누구란 건데?”
“글쎄.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서. 단 하나 확실한 건 당신이 도미스가 아니란 거지.”
아이니는 눈썹을 올려 눈을 크게 뜨고서 물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내내 다정하기만 하던 입가에 짙게 슬픔이 묻어났다. 칼라인은 시선을 내려 그 모습을 아예 피해버렸다. 상대가 도미스가 아니란 건 확신하지만, 꼭 같은 모습을 하고서 슬픈 표정을 짓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에.
“좀 당황스럽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라서.”
“…….”
“왜 그런 생각을 해? 왜 내가 도미스가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 묻는 거야, 칼라인.”
“호수에 비친 하늘을 보며 하늘이라 우겨도 그건 호수지. 아닌 걸 아니라고 대답하는데, 왜 아니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한데.”
“이해가 안 돼.”
아이니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널 보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어. 다시 태어났다고. 널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나더러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니, 난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조차…….”
아이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듯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완전한 도미스는 아니야. 죽었다 깨어난 거니까. 하지만 전생에 난 분명 도미스였어, 칼라인. 이전처럼 ‘로드’는 아니지만, 분명 나는 도미스…….”
중얼거리던 아이니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초록색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칼라인. 혹시, 내가 로드가 아니어서 그래? 다시 태어난 나는 로드가 아니어서 나를 부정하는 거야?”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실제로도 그녀는 지금 몹시 당혹스러웠다. 전생의 연인. 자신이 죽더라도 지키고 싶어 했던 연인. 운명적으로 맺어진 연인인 칼라인이 자신을 자꾸 부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이 더는 로드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니.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시선을 내내 피하던 칼라인은 그 익숙한 목소리가 배신감에 물들어가자, 결국 눈동자를 들었다. 소중한 얼굴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확인한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드는 늘 하나다. 도미스가 로드이고 로드가 도미스인데, 거기서 도미스만 따로 떨어질 수는 없어.”
“난 전생에 로드이자 도미스였지만 지금은 로드가 아니야.”
“그게 당신이 도미스가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지.”
“……넌 날 사랑한 게 아니라 로드를 사랑한 거였구나, 칼라인.”
슬프게 중얼거린 아이니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일어서자 의자가 불쾌한 소리를 내고 바닥에 끌렸다. 커피 리필을 할지 말지 망설이던 직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이니는 칼라인의 내리깐 속눈썹을 노려보다가 입을 꽉 다물고 몸을 돌렸다.
“너는 살아라. 살아서 나를 찾아. 난 ‘다음에도’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너를 찾는 것도 너를 기다리는 것도 나뿐이었구나. 실망이다, 칼라인.”
* * * 궁전으로 돌아온 라틸은 세 가지 안건을 더 처리하다가, 도무지 그 이상 집중할 수가 없어서 잠시 바람이나 쐬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다. 더운 여름 날씨에 축 늘어진 옷자락이 자꾸만 몸에 달라붙는 게 불쾌하다. 라틸은 흐느적거리는 망토를 벗어 손에 움켜쥐고서 산책로를 빠른 걸음으로 마구 걸어 다녔다.
‘칼라인이 도미스를 사랑하는 것도 알고, 칼라인이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있단 것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나지?’
라틸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괜히 발을 마구 굴렀다. 칼라인을 위해서라면 사실 이건 기뻐해줘야 할 일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살아 있었다는 거니까. 그런데도 축하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다니. 자신이 참으로 못되게 여겨졌다.
‘연인이 살아 있단 걸 알았으니 칼라인은 하렘에서 나가려 할지도 몰라.’
빠르게 걸어 다니던 라틸이 갑자기 확 멈추어 서자, 서넛이 뒤를 따라 다니다가 덩달아 멈추어 섰다. 라틸은 휙 뒤돌아서고서 서넛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데 말입니다, 서넛 경.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대신 머리를 굴려 보겠습니다.”
“서넛 경. 임시 후궁은 이혼을 청구할 수 있지만, 정식 후궁은 이혼을 못 청구하지?”
“제가 알기론 그럴 겁니다.”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대답에 라틸은 괜히 길게 말꼬리처럼 묶은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칼라인이 이혼을 해 달라 요청하는 것도 불쾌할 것 같은데. 옛 연인이 살아 돌아왔는데도 찾으러 가지 못하고, 이 때문에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면 그것도 싫을 것 같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라틸은 중얼거리고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서넛은 자연스럽게 라틸의 곁에 섰다.
“어느 정식 후궁이 이혼하고 싶다 합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럴지도 모르겠고…… 그게 또 이상하고 그럽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의 후궁이 되었으면서 이혼하고 싶어 하다니. 제가 후궁이었더라면 폐하가 이혼해 달라 해도 절대로 하렘에서 안 나가고 버틸 텐데 말입니다.”
“아니,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라틸은 손을 저었다. 라틸이 이상하게 여기는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후궁들을 모으긴 했지만 라틸은 아직 누구와도 동침하지 않았고, 부부간의 정이 쌓일 만큼 오래 함께하지도 않았다. 라틸은 자신이 칼라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칼라인이 진짜 연인과 살고 싶어서 이혼을 청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자 바로 불쾌한 기분부터 들다니.
“난 의외로 집착이라던가 독점욕이라던가, 그런 게 강한가 봅니다. 서넛 경.”
그런데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라틸은 발치의 돌을 툭툭 발로 건드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을 보니 서넛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건 또 뜬금없는 반응이라 라틸은 서넛의 팔을 쿡 찔렀다.
“서넛 경은 또 왜 이럽니까?”
“방금 제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 폐하는 그냥 흘려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좀 삐졌습니다.”
심지어 돌아오는 반응은 잘 갈아둔 바늘처럼 뾰족했다. 라틸은 서넛이 아까 무슨 말을 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황당해서 물었다.
“혹시, 방금 했단 중요한 말이 그겁니까? 서넛 경이 후궁이었더라면 이혼 안 하려고 매달렸을 거란 말?”
하지만 질문을 하면서도 라틸은 서넛이 한 중요한 말은 이 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서넛이 평소에 해대는 가벼운 농담과 조금도 다른 바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 가벼운 농담이 중요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이미 평소의 장난일 수도 있지만. 라틸의 질문에 서넛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 미소는 라틸의 말을 수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라틸은 서넛의 표정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서 괜히 그의 검집만 툭툭 건드리다 웃었다.
“하지만 그대는 내 후궁으로 들어올 리가 없잖아.”
서넛은 자신의 눈앞에서 오가는 그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의 심장을 휘젓고 가는 그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었다.
“당연히 후궁으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들보다 제가 폐하를 더 많이, 더 자주, 더 오래 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