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네가 어지간히 싫었나보다2021.08.04.
‘옛 친구?’
옛 친구라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 호기심이 든 라틸은 칼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칼라인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옛 친구가 아니라 남의 친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어떻게 할까요, 단장님?”
옛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라틸은 덩달아 칼라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어떻게 할 거야?
“…….”
칼라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생각에 잠긴 사이, 칼라인의 용병 출신 시종은 다시 라틸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무언가 찔리는 얼굴로. 왜 찔리는 표정이지? 라틸은 의아해졌다. 그러나 당장 호기심이 드는 건 칼라인 쪽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렇게 궁금할 질문은 아니긴 한데. 칼라인의 옛 친구라고 하자 도미스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기르골이 떠오른 탓이었다. 한때 칼라인과 함께 돌아다녔던 그 하얀 머리 친구.
‘그 사람이 찾아온 걸까?’
도미스는 죽었으니 찾아왔다면 분명 그 하얀 머리 친구일 거야. 라틸은 확신을 가졌지만, 발치를 쳐다보는 둥 하며 그들의 대화에 아무 관심이 없는 척 굴었다.
“단장님?”
칼라인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시종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시종은 말을 하고서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시종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괜히 두 손을 모아 인사만 한 번 더 건넸다. 그러는 사이 칼라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피하면 더 흥분해서 만나려 들겠지.”
칼라인의 시종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동의하는 것처럼.
‘저 사람도 칼라인의 그 옛 친구를 알고 있는 건가?’
라틸은 칼라인이 만들어 준 손가락 풀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틸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마자 칼라인은 손을 뻗어 라틸의 손을 꼭 쥐었다.
“만나보도록 하지. 어디로 가면 있지?”
“타리움 수도에 있는 용병단 본사 맞은편에 음식점이 있잖습니까. 그쪽에서 기다리신다고 하니 언제든 편할 때 오시랍니다.”
시종이 물러나길 기다렸다가 둘만 남게 되자 라틸은 슬쩍 질문해보았다.
“친구 기다린다는데 안 가 봐도 돼?”
시종에게는 가겠다는 뉘앙스로 대답한 칼라인이 산책을 계속하려는 듯하자 물어본 것이었다. 칼라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주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괜찮아. 친구 잠시 보고 와도. 나와는 매일 있잖아. 이번에 널 찾아온 친구는 오랜만에 온 친구 아닌가?”
“왜 오랜만에 온 친구라 생각하십니까?”
“아, 그야…… 넌 요즘은 내내 하렘에만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만나도 안 반가운 친구일 거라.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간도 안정했습니다. 천천히 가도 됩니다.”
라틸은 일부러 하렘이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칼라인은 눈썹을 추켜올렸지만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라틸을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발걸음을 빨리하지 않는 게, 정말로 천천히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역시 도미스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야. 도미스를 만나러 간다면 이렇게 천천히 가진 않겠지. 아마 뛰어갈걸? 그럼 그 기르골이란 친구와는 사이가 많이 나빠졌나? 그래서 이러나? 아니, 그런데 기르골을 만나러 가는 게 맞긴 해? 칼라인에게 다른 친구가 있을 수도 있잖아.
“주인?”
“어?”
“뭘 자꾸 혼자 심각하십니까?”
“아니. 뭘 좀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이요?”
“네 친구 생각.”
칼라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내 친구 생각을 왜 그쪽이 하지?’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호기심을 참기 어려운지, 나중에 그는 코너를 돌면서 아예 대놓고 질문했다.
“뭐가 궁금한 겁니까?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요.”
발밑에서 축축한 잔디가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마다 풍겨오는 풀냄새에 라틸은 기분이 미묘하게 좋아졌다.
“어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게냐?”
칼라인은 갑자기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변한 라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자연스럽게 뺨을 쓸었다. 차가운 감촉이 뺨을 쓸고 가자 라틸은 몸을 움찔하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칼라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몹시 깊고 복잡한 눈동자로. 그 뜬금없이 괴로워진 눈동자를 하고서 그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악우입니다.”
* * * 악우가 과연 누구를 말한 거였을까? 역시 기르골? 기르골과 사이가 멀어진 건가? 멀어졌다면 왜? 도미스와 칼라인이 사귀게 되어서? 아니면 도미스가 죽어서? 칼라인과 헤어진 라틸은 홀로 회랑을 걸어가며 칼라인을 찾아온 악우가 누구일지에 관해 열심히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라틸이 칼라인에 대해 아는 정보는 신원이 안전하고, 그의 업적이 어떻고 하는 것들뿐이었다.
‘따라가 볼까?’
라틸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가보고 싶어.’
* * * 라틸은 공식행사가 아닐 때 마차들이 드나드는 문 근처로 먼저 이동한 다음 칼라인이 탄 마차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칼라인의 솜씨라면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도 나오겠지만, 아까 칼라인은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라틸 앞에서 보고받았다. 황제가 이미 아는 사안이니 몰래 나가기보다는 당당하게 나갔다 오려 할 거란 추측이었다. 라틸은 옆문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서서,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괜찮겠지?’
가면을 써서 얼굴을 바꿨지만 칼라인은 이 얼굴을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얼굴이 아니라 다른 얼굴로 찾아가더라도 바로 알아볼 인간이긴 하지만.
‘겉모습도 존재감이 없는 분위기로 바꿨으니 들키지 않겠지.’
그때 낯익은 마차가 드디어 궁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라틸은 나무에서 몸을 떼고 거리를 둔 채 마차를 따라갔다. 약속 장소를 바꾸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마차는 곧장 흑사신단 용병단의 본부 근처로 갔다. 마차 문이 열리고 칼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라틸은 어느 노점상 뒤쪽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본부 안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와 그 ‘악우’를 만날 거란 예상과 달리 칼라인은 곧장 본부 맞은편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갔다.
“거기 아가씨. 여기서 뭐 해요?”
황당한 얼굴로 묻는 노점상 주인에게, 라틸은 ‘쉿 쉿’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서 칼라인을 지켜보다가, 그가 식당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자신도 얼른 그 뒤로 따라붙었다. 식당 출입문에 달린 방울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던 라틸은, 다른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얼른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 손님은 라틸이 너무 자신에게 밀착해 들어오자 희한하다는 듯 위아래로 쳐다보며 얼른 뚝 떨어져 섰지만, 다행히 칼라인의 눈길을 피하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라틸은 빠르게 칼라인의 커다란 등을 발견하고서 얼른 사각지대에 놓인 기둥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칼라인의 등밖에 보이지 않는데다, 칼라인과 마주 앉은 사람은 칼라인에게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으므로, 라틸은 같은 자리의 옆 좌석으로 엉덩이를 이동해야 했다. 그때까지도 라틸은 꿈속에서만 계속 보아오던 그 하얀 머리를 멀리서나마 볼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하얀 머리 기르골이 칼라인과 헤어지고 나면 그에게 접근해 볼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러려면 기르골과 칼라인이 너무 사이가 나쁘진 않아야겠지만.
‘어?’
그러나 라틸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칼라인에게 가려졌던 사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라틸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서 입을 벌렸다.
‘저 사람?’
하얀 머리가 아닌 빨간 머리. 붉은 눈이 아니라 녹색 눈. 유들유들하고 능청스러운 인상의 천사 같은 남자가 아니라, 화려하고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너무 놀라서 라틸은 순간 점원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도미스. 붉은 머리 여자는 칼라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도미스였다. 자신이 도미스의 기억 속에서 본 기르골이 아니라.
“살아 있었나……?”
“예? 손님?”
“죽은 줄 알았는데.”
“손님……?”
라틸이 당황해 중얼거리는 소리에 점원이 같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라틸은 그제야 점원을 알아보고서 대충 아무거나 주문한 다음 얼른 이 자리에서 떠나게 유도했다. 점원이 라틸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멀어지자, 라틸은 냅킨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서 고개를 좀 더 칼라인이 앉은 자리 쪽으로 내밀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도미스는 죽지 않았나?’
칼라인의 기억 속에서 분명히 죽었다. 아니, 게다가 도미스는 칼라인의 연인이었다. 그가 아직도 사랑하는, 잊지 못하고 앓는 연인. 악우라고 표현할 존재도 아니다. 옛 친구……라는 말 정도는 쓸 수 있겠지만.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가린 냅킨을 조금씩 조금씩 손으로 뜯어대기 시작했다. 코앞에서 나는 ‘부욱 부욱’ 소리를 들으며 라틸은 칼라인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칼라인은…….
‘도미스를 만날 줄 몰랐구나. 칼라인도 모르고 있었나봐.’
그는 라틸만큼, 아니, 라틸 이상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그 역시 부하가 말한 ‘옛 친구’가 도미스일 거란 예상을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놀라움으로 가득한 표정과 떨리는 입술을 보다가, 라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빠르게 걸어갔다.
“어? 아직 음식이 안 나왔는데요?”
어리둥절해 묻는 직원의 앞에 금화를 내려놓은 라틸은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심장이 불안하리만큼 빠르게 뛰었다.
‘살아 있었구나. 도미스가 살아 있었어. ……칼라인은 도미스를 잊기 위해서 내 후궁으로 들어온 건데, 도미스가 살아 있었다니. 그럼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 * * 뒤쪽에서 들려오는 문에 달린 종소리는, 붉은 머리 여자도 칼라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조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둘 외에는 다른 누구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붉은 머리 여자는 오랜 침묵을 깨고서 미소를 지었다.
“날 본 게 그렇게 당황스러워?”
그녀의 질문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붉은 머리 여자는 곧 손을 깍지 끼고서 얼굴을 괸 채 한 번 더 또렷하게 웃었다. 그 안에 가득한 호감과 그리움에 칼라인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당혹스러운 게 아니라…… 그리워서.”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 여자, 모습을 바꾼 아이니는 손을 뻗어 칼라인의 손을 쥐었다. 쥐려고 했다. 그러나 칼라인이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손을 거두어들이는 바람에 그녀의 손은 허무하게 허공을 쓸었다. 아이니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그 허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니는 슬픈 미소를 짓고서 칼라인에게 물었다.
“화나서 그래? 내가 널 재우고…… 살려버려서?”
두 사람만의 과거를 아는 질문에 칼라인의 눈동자가 한 번 더 처연하게 떨렸다. 그러나 슬픈 눈으로 칼라인이 뱉은 말은 아이니의 예상과는 조금 빗겨 있었다.
“이런 짓을 하고 간 걸 보니. 주인은 당신이 어지간히 싫었나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