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옛 친구가 찾아왔다2021.08.01.
-무슨 소리야, 라틸. 아주 오래전에는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더 컸고 그때는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왜 인어가 도랑에 없을 거라 생각하지? 인어가 어디 사는지는 인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왜 네가 인어 거주지를 한정하지? 넌 인어가 아니잖아. 그리고 내 동생과 키스를 했니 마니 하는 건 내게 안 알려줬으면 하는데. 필요 없는 정보를 보내서 나를 계속 화나게 하는 의도가 뭐야. 계속 내 마음을 들쑤셔서 날 분노하게 만들려는 건가? 그렇다면 유감이군, 라틸. 나는 네가 내 동생과 키스했단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아. 후궁이라면 입맞춤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후궁이 아닌 나도 했는데, 후궁인 내 동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어쨌든 네가 먼저 시작했으니 나도 과한 정보를 하나 풀까, 라틸?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는 입맞춤을 못 했다. 네가 부끄러울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내 동생이 키스를 잘한다고 했지? 내 동생한테도 같은 질문을 해봐. 네가 키스를 잘하냐고. 내 동생은 네가 못한다고 할걸. 설령 잘한다 하더라도 믿지 마. 거짓말일 테니. 그리고 기분 나쁘니까 편지에 (웃음) 이런 거 안 붙여줬으면 좋겠군. (짜증) P.S. 내 동생이 자꾸 편지로 내게 돈을 보내라 하는데, 혹시 네가 합의금을 챙겨오라고 부추기고 있는 거 아닌가? * * * 급한 내용은 없을 것 같아서, 라틸은 잠자리에 들기 전 하이신스가 보낸 편지를 확인했다가 후회했다. 편지를 보자마자 잠이 싹 달아난 것이다.
“누가 키스를 못 해? 합의금을 챙겨오라고 부추겨? 난 인어도 아닌데 인어 거주지를 어쩌고 어째?”
라틸은 콧김을 내뿜었다. 이건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하이신스가 지금 편지로 라틸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거였다. 처음에 깡패 운운할 때부터 느낌이 왔지만. 라틸은 얼른 편지를 가지고 책상으로 달려간 다음, 의자에 채 앉지도 않고서 서랍을 뒤적거려서 편지지를 찾았다. 그러다 문득 라틸의 손길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
라틸은 새 편지지 사이에서 툭 떨어진 그것을 들어올려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말라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풀반지였다. 아주 옛날 하이신스가 직접 만들어 손에 끼워주었던. 라틸은 머뭇거리다가 버석해진 반지를 억지로 펼쳐 손에 끼워 보았다. 그러나 손가락에 끼우려 하자마자 반지는 바로 부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틸은 몸을 숙여 부서진 반지를 들어올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 * * 타리움 수도에 있는 흑사신단 용병단 본부 건물 안. 검은 로브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 써서 얼굴의 반을 가린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장인 칼라인이 후궁으로 들어간 후에도 용병단은 여전히 운영되고 있었기에, 이곳을 찾는 방문자 수는 하루만 해도 적어도 수십 명. 그중에는 얼굴을 가리고 오는 사람도 많았기에, 이 검은 로브를 눌러쓰고 들어온 사람에게 주목하는 이는 안내 역을 맡은 아르바이트생 한 명뿐이었다.
“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르바이트생이 다가가 싹싹하게 묻자 로브를 눌러쓴 사람이 대답했다.
“용병왕을 만나고 싶은데.”
“예? 용병왕이요?”
아르바이트생은 웃으면서 다가갔다가 당황해서 로브 쓴 사람을 쳐다보았다. 용병왕이 후궁이 된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 근방에 살거나, 여기에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데 멀쩡히 들어와 후궁이 된 용병왕을 찾으니 당혹스러웠다. 아르바이트생은 하하 기계적으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용병왕께서는 이제 궁전에 계셔서 따로 의뢰는 안 받으세요.”
“그래?”
“네. 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용병들이 다 여기 소속되어 있으니 다른 용병들에게 의뢰를 맡기셔도 만족하실 겁니다. 정말이에요.”
아르바이트생은 그렇게 말하고서 흑사신단 용병들이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지에 대해 구구절절 외운 걸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브를 쓴 사람, 아이니가 원하는 건 가장 강한 용병이 아니라 칼라인이였다. 설령 칼라인이 용병왕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그녀는 칼라인 만을 찾았을 것이다. 그녀가 보러 온 건 칼라인 그 자체이지 용병왕으로서의 그가 아니니까.
“그래도 만나고 싶은데.”
“예?”
까다로운 손님이네. 아르바이트생은 아이니가 재차 하는 말에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일단 기다려보라 하고는 카운터에 있는 흑사신단 용병에게 달려갔다.
“저기, 믹스 씨.”
부상을 입어서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된 이후 카운터에서 서류 업무를 맡고 있는 용병이었다.
“왜 그래?”
믹스는 의뢰 신청서와 선수금 등등을 점검하다가, 아르바이트생이 가까이 오자 고개도 들지 않고서 물었다. 귀가 밝은 건지 자주 보여주는 묘기였기에, 아르바이트생은 놀라는 대신 가까이 다가가 살짝 알려주었다.
“어떤 손님이 칼라인 님을 꼭 만나고 싶다 하시는데요.”
“칼라인 님을? 누가?”
“저쪽에 까만 로브 입은 사람이요.”
“까만 로브가 하나둘이야?”
아르바이트생이 손가락으로 위치까지 알려주자, 믹스는 그제야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별개로 그가 뱉은 말은 시큰둥했다.
“못 만난다고 알려주지 그랬어. 우리도 대장님 얼굴 보기가 힘든데 의뢰가 가능할 리가 없지.”
“말해 봤는데 그래도 봐야 한대요.”
“고집불통이로군.”
하지만 저런 타입의 손님도 아예 없진 않기에, 믹스는 능숙하게 일어나 다가갔다. 아르바이트생 선에서 정리가 안 되는 손님은 대부분 그가 나서면 정리가 되곤 했다.
“실례합니다.”
그 손님 근처로 다가간 믹스는 말을 걸고서 공손하면서도 위협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저희 단장님을 찾는다고요.”
로브를 쓴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믹스는 호탕한 척 웃으며 설명했다.
“죄송하지만 폐하의 후궁으로 들어가신 후로 대장은 용병 활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뢰 성공률 추이는 늘 비슷하니 마음 놓고 맡겨 보시지요.”
손님은 대답 대신 자신이 눌러 쓰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뒤로 넘겼다. 모자를 젖히자 그 안에서 새빨간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왔다. 아르바이트생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억지를 부리던 손님은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르바이트생은 감탄했으나 ‘그래도 이미 결혼한 분을 불러오는 건’이라고 생각하며 직원을 돌아보다가 더욱 당황했다. 직원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 나오는 얼굴이 아니라, 너무나도 그리운 얼굴을 보았을 때 나오는 얼굴. 심지어 직원은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한참을 그러다가 직원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도미스 님?”
빨간 머리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전해. 옛 친구가 만나러 돌아왔다고.”
* * * 하이신스에게 편지를 보낸 다음, 평소와 같은 일과를 보내던 라틸은 어제의 풀반지가 떠올랐다. 라틸은 보던 안건까지 처리한 다음, 하이신스가 풀을 꺾어 반지를 만들어 주었던 그 정원으로 가보았다. 정원에는 여름꽃들이 알록달록하게 피어 있어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라틸은 하이신스와 나란히 앉았던 바로 그 자리로도 가보았다. 그가 그리워서 왔다기보다는 그와 함께했던 그 시간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그날의 그 분위기가, 그와 주고받던 맑기만 하던 미소가, 그 평화가. 라틸은 바람을 맞으면서 아무 풀 하나를 뜯어다가 하이신스가 했던 것처럼 반지를 만들어보려 시도했다. 잘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가까이 다가온다 싶더니, 라틸의 손에서 뜯긴 풀을 가져다가 이렇게 저렇게 세심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라인이었다. 그 커다란 손으로 용케도 작은 반지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해서 보고 있자니, 칼라인은 라틸의 손가락에 완성된 반지를 끼워 주었다.
“어떻게 했어?”
라틸이 신기해서 묻자 칼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배웠습니다.”
도미스한테……는 아니겠지. 라틸은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질문을 눌렀다. 대신 칼라인의 눈치만 살폈다. 칼라인은 라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준 것도 모자라서 크진 않은지, 디자인은 어쩐지 꼼꼼히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지 손을 떼고서 만족해 중얼거렸다.
“잘 어울리십니다.”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산책 나왔어?”
“네. 주인 생일도 다가오고.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이런 데서 만나니 좋네.”
“그렇군요. 주인께선 절 안 찾으시니, 이런 데서라도 만나서 좋습니다.”
“…….”
라틸이 찔끔해서 괜히 반지를 내려다보는 척하자, 옆에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봤을 땐 칼라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라틸은 손을 내리고서 머쓱하게 제안했다.
“같이 좀 걸을까?”
* * * 날씨는 무더웠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여름 바람 덕에 땀이 나진 않았다. 라틸은 더워서 소매를 조금씩 조금씩 계속 올리다가, 칼라인이 늘 피부가 차가웠던 걸 떠올리고서 슬쩍 그의 손을 잡아 보았다. 역시. 오늘도 그는 차가웠다. 라틸은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다가, 나중에는 칼라인의 소매를 팔까지 올린 다음 거기에 달라붙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붙으십니다. 절 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더니, 미안한 마음이 드시는가 보군요.”
“아니, 오늘따라 유달리 더워서. 그대는 시원해서 좋아.”
라틸이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그러면서도 라틸이 잡지 않은 제 손등으로 라틸의 얼굴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주었다.
“이러면 시원하십니까?”
“응.”
라틸은 솔직하게 대답했으나 칼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 사항이 있는 것처럼.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자, 칼라인이 라틸의 뺨을 연신 여기저기 누르면서 하소연했다.
“선황후께선 사태가 진정되면 절 국서로 밀어주시겠다 하셨지요. 하지만 신전으로 돌아가셔서 아무 연락도 없으시니, 제가 공수표를 받았던 건가 봅니다.”
누구도 라틸 앞에서 이렇게 태연히 선황후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그 사건 이후 라틸 앞에서 특별한 보고 외에 선황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라틸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웃음을 터트렸다.
“모르지. 나중에 돌아오신 다음엔 밀어주실지도.”
“꼭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
칼라인은 라틸이 속으로 여전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걸 알고서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라틸은 그가 생각보다 예리하다는 데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생일이신데. 가지고 싶은 선물은 없으십니까?”
“글쎄.”
“타시르는 이미 선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들었어?”
“본인이 자랑하던데요. 주인이 아주 좋아하실 거라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네.”
라틸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 자식 때문에 서넛한테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데. 자기는 선물을 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닌다니.
“전해드릴까요?”
“됐어. 그래도 열심히 준비한 거 같더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뭘 드려야 할지 부담이 되는데요.”
금은보화가 넘쳐나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건 확실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라틸 역시 아버지나 어머니 생일 선물을 고르느라 고민했던 시기가 있기에 그 느낌을 잘 알았다.
“열심히 고민해 봐. 난 네 생일에 뭘 해줄지 이미 골랐지만.”
“제 생일 선물을 벌써 고르셨습니까?”
“응.”
라틸은 흐뭇하게 웃었다. 라틸은 도미스의 기억 속에 있는 그 하얀 머리 남자. 도미스, 칼라인과 친했던 그 기르골이라는 남자를 찾아줄 생각이었다. 옛 친구를 만나면 칼라인도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떨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건 칼라인의 생일 때까지는 비밀을 잘 지켜야 했다. 그런데 라틸과 칼라인이 생일 선물을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용병단에서 데려온 칼라인의 시종이 황급히 뛰어오다가, 라틸을 발견하고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곤란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칼라인에게 아주 빠른 속도로 말했다.
“단장님, 단장님의 옛 친구께서 단장님을 뵙고 싶다고 용병단에 찾아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