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같은 질문을 하지만 다른 대답을 기다린다2021.07.21.
별궁 안으로 들어선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다가 공작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위험합니다!”
놀란 마부가 외쳤으나 다가 공작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한 손만 대충 휘두르고서 안쪽으로 달려갔다. 건물 안쪽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고용된 사람들은 허둥거리며 뛰어다녔고, 위층에서도 다급한 발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공작님!”
총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자 다가 공작은 화가 나 호통쳤다.
“무슨 소리야, 황후 폐하께서 사라지시다니!”
“죄송합니다. 낮은 창문과 모든 문을 다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는데 대체 어디로 나가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모르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그놈의 죄송 죄송 죄송! 다가 공작은 지팡이를 총관리인에게 후려치듯 떠맡기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총관리인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품에 안고서 그 뒤를 바삐 따라갔다.
“황후께서 쓰시던 방은 어디지?”
“2층 가장 안쪽 방입니다.”
“몇 시에 사라지신 거냐.”
“그게…….”
“아는 게 뭐야!”
총관리인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저택을 총 관리하는 사람이긴 했으나 황후 곁을 늘 따라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황후가 사라졌단 건 보고 받아 알았다. 그런데 다가 공작이 계속 그를 질책하자 억울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변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낮은 창문과 드나들 수 있는 문에 빼곡하게 병사들을 둘러 두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사이가 나쁘니 혹시 암살자들이 올지도 모른단 공작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때 아이니 황후가 사용하던 방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시녀 두 명이 나왔다. 개중 하나는 루이스였다.
“얘기 좀 하지.”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다가 공작은 옆을 지나쳐 빠르게 걸어가며 루이스에게 따라오라 지시했다. 황후의 방 안으로 들어간 공작은 문을 닫고서도 일부러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루이스를 데려가 물었다.
“아이니가 사라진 게 헤움 황자와 관련이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왜 다들 모르겠다 하는 건가, 왜!”
“그럴 수밖에요. 어떻게 나가신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거든요.”
다가 공작은 창가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속 말해봐.”
“평소처럼 일과를 마치셨어요. 우울한 기색이셨지만, 연회 이후로 내내 그러셨으니 다들 이상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지요.”
“…….”
“그러다 산책을 하러 가겠다 하셨습니다. 혼자 가고 싶다고 하셨지만, 아시다시피 사방에 다 병사들이 가득한지라 위험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너무 오래 돌아오시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병사들은 황후 폐하 비슷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 했고요.”
“담을 넘어갈 가능성은?”
“이곳 담은 높은 데다 황후께선 무술을 익히지 않으셨잖아요. 게다가 암습을 막기 위해 그 높은 담 주변으로도 병사들이 사방을 다 둘러싸고 있으니, 그쪽으로도 나갈 수 없으십니다.”
다가 공작이 벌떡 일어나자 안락의자가 뒤로 밀려나 벽에 쿵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다가 공작은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고서 고함을 질렀다.
“그럼 대체 내 딸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너희가 뭔가 제대로 못 했으니 사라졌을 게 아니야!”
* * * 별궁의 고용인들이 억울해할 만도 했다. 그들은 본인들의 말처럼 빈틈없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방비를 철저히 하더라도 아예 얼굴을 바꾸어버린 아이니를 잡을 수는 없었다.
“저쪽에서 무슨 소란이 난 모양이지?”
“황후 폐하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납치된 건가?”
“모르지요.”
헤움에게 받은 반지를 이용해 아예 모습을 싹 바꾼 아이니는 태연히 마부에게 마차 삯 반을 건네며 지시했다.
“타리움으로 바로 갈 수 있느냐?”
“타리움이요? 타리움은 너무 멉니다, 아가씨. 타리움까지 가려면 용병을 고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럼 델리트로 가지.”
델리트는 국경지대에 있는 마을 중 하나로, 용병이나 상단들이 거점으로 사용하면서 부흥한 곳이었다. 타리움만큼은 아니지만 거기도 멀긴 마찬가지인데. 마부는 속으로 혀를 찼으나, 아이니가 번쩍이는 보석을 뒤에서 건네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갈 수 있습니다!”
“가자.”
곧 마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차 창문 너머로 ‘황후께서 사라지셨다!’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으나, 아이니는 절대로 창밖을 보지 않았다. 뜯어진 창문 가리개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아이니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위로 올라갔다.
‘칼라인. 내가 갈게.’
* * *
“소단주니임. 구해 오라고 하신 거 제가 진짜 어렵게 구…….”
커다랗고 납작한 상자를 끙끙거리며 방 안으로 운반하던 히얼란은 얼핏 상자 너머로 타시르의 몸뚱어리가 보이자 당황해 말을 멈췄다. 내가 뭘 본 거지? 히얼란은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잘못 봤나? 하지만 다시 확인하려고 해도, 품에 안은 상자가 너무 커다래서 쉽지 않았다. 히얼란은 게걸음으로 옆으로 이동한 다음 벽에 상자를 기대어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아까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인했다.
“으악!”
결과는 비명으로 터져나왔다. 맞았다. 타시르가 긴 거울 앞에 벌거벗고 서 있었다.
“소단주님! 뭐 하세요!”
히얼란이 기겁해서 외치자 타시르는 힐긋 그를 쳐다보더니 반갑게 웃었다.
“응, 왔어?”
“응, 왔어, 할 때가 아니잖아요! 뭐 하시는 거예요!”
히얼란은 재차 펄쩍거렸지만, 타시르는 태연했다.
“내 몸을 거울에 비춰 보고 있는데.”
“제가 지금 그걸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닌데요!”
비명을 지른 히얼란은 황급히 창문으로 달려가 커튼을 꼼꼼히 치고,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도 확실하게 잠갔다. 그러고서도 심장이 쿵덕거려서 히얼란은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갑자기 뭐 하시는 거예요? 보기 흉악해요, 소단주님!”
“안 보면 되잖아.”
“방 가운데에서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안 봐요!”
타시르는 혀를 차고서 눈짓으로 방 한쪽 이젤에 놓인 커다란 그림을 가리켰다.
“저거나 빨리 액자에 잘 걸어둬.”
그림에는 라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타시르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명작이라 할 정도로 빼어난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계통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이 며칠 만에 술술 그린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그림이었는데, 타시르는 이걸 황제에게 선물할 거라며 히얼란에게 특수한 액자를 구해 오라 지시했던 것이다.
“전 소단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요.”
히얼란이 구시렁거리자 타시르는 흐뭇하게 웃고서, 거울에 걸어두었던 길고 얇은 옷을 이리저리 몸에 칭칭 감으며 대답했다.
“전략을 짜는 거지, 전략을.”
“무슨 전략이요…….”
“고상하게 큰 귀족 도련님들은 시도도 못 해볼 전략.”
* * * 멜로시 영주는 괜찮다고 했지만…… 진짜 괜찮은 게 맞나? 순방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가는 길. 라틸은 새벽에 잘라먹은 서넛의 가보가 떠올라 마음이 계속 불편해졌다.
‘진짜로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건 아닐 거야. 내가 황제이니 그냥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말이겠지.’
말발굽 소리가 열 번 들려올 때마다 라틸도 한숨 한 번을 내쉬었다. 그런데 얼마나 그렇게 갔을까. 사방이 초록색인 밭을 지나가고 있자니, 마차 창문 사이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게스타의 목소리였다. 그쪽을 보니 게스타가 창문 커튼을 조금 들추고서 그 사이로 고개를 소심하게 내밀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라틸이 묻자 게스타는 곤란한 듯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폐하, 멀미가 나는데…….”
“아. 내릴래?”
“전 몸이 약해서 말을 잘 타지 못해서요. 저…… 폐하께서 곁에 있어 주시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몸이 약한 사람치고는 여기저기 근육이 다 튼실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라틸은 알겠다고 마차를 멈추게 하고서 말에서 내렸다. 덩치가 좋아도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라틸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게스타의 시종인 트리가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다시 마차가 이동하기 시작하자 라틸은 게스타의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이러면 되겠어?”
이게 멀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스타가 이게 좋다면 이러고 있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스타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제 무릎을 베고 누워주시면 안 될까요?”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내 무릎을 베는 게 아니라 내가 네 무릎을 베라고?”
“네…….”
라틸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것도 멀미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라틸이 웃고만 있자, 게스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제가 옆으로 누우면 속이 더 뒤집히잖아요. 폐하께서 제 무릎을 베고 누워주시면 흔들리지 않고 몸이 고정이 되니까…….”
“아아. 그렇구나.”
들어보니 그럴듯한 것 같기에 라틸은 맞은편으로 이동해 머쓱하게 몸을 옆으로 뉘었다. 귀와 뺨에 게스타의 다리가 닿자 라틸은 괜히 멋쩍어졌다.
“자세가 불편하세요?”
“아니. 나는 괜찮아. 너는? 무겁지 않아?”
“저는 몸은 약하지만 힘은 조금 센 편이어서요. 괜찮습니다.”
두 개가 같이 붙어 다닐 수 있는 단어 조합인가? 체력이 약하지만 몸에 근육이 탄탄하고, 몸이 약하지만 힘은 세다니. 라틸의 생각은 게스타가 슬그머니 라틸의 손에 자기 손을 올리자 쏙 들어갔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게스타의 손이, 라틸의 손을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손가락 끄트머리만 간신히 잡고 매달려 있었다. 보다 못해 그냥 라틸이 덥석 잡아주자 잔뜩 긴장해 있던 게스타의 몸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져서 라틸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건 의식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한 번 게스타의 근육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나니, 순간 모든 게 다 의식되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말랑한 손의 감촉, 단단한 다리, 옅게 풍겨오는 아카시아 향수 냄새, 볼에 닿는 바삭한 캐시미어의 느낌까지. 그러다 게스타가 잠시 몸을 움직이면서 뒤통수에 배가 닿으면 라틸은 덩달아 숨을 멈추게 되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너무 한 자세로 있어서 불편해진 라틸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몸을 앞으로 굴려 돌아누웠다. 이렇게 누우니 게스타의 얼굴을 바로 아래에서 바라보게 되었지만, 옆만 보고 있자니 자세가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게스타는 라틸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라틸이 자세를 바꾸면서 눈이 마주치자 햇살처럼 포근하게 웃었다. 뒤에 있지도 않는 석양과 가을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맑은 느낌으로. 그 미소를 보자 한결 마음이 더 편안해져서 라틸은 마주 잡은 게스타의 손가락 볼록한 부분을 괜히 꾹꾹 눌러 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조용하고 평안한 분위기에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게스타가 웃으면서 물었다.
“폐하. 폐하는 후궁 중에 누가 가장 좋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