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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왜, 도랑에 있을 수도 있지 (145/367)

145화. 왜, 도랑에 있을 수도 있지2021.07.18.

둘만 있었더라면 라틸은 경악하는 척하며, 서넛을 놀려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서넛의 가족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게스타가 옆에 있는데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것도 좀 이상했다. 결국 라틸은 애매하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16551104358315.png“긍정적인 대답을 원한다면 나한테 잘 보여야지, 서넛 경. 맨날 못된 말만 하지 말고. 응?”

다행히 서넛은 여기서 더 끈질기게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라틸의 타박에 그가 자신이 평소에 짓궂긴 하다고 순순히 인정하자, 잠시 이상해졌던 분위기는 곧 몇 시간을 반죽한 밀가루처럼 부드럽게 풀어졌다. 라틸은 식사에 몰두했고 게스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손과 팔을 움직였다. 아들이 황제를 좋아한단 걸 아는 서넛의 부모도 안심해서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이 가운데 엘리자벳만이 눈을 빛내며 사촌과 후궁, 황제를 번갈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가 호기심에 물들어갔다. 저 세 사람. 뭐가 있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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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새벽이었다. 라틸은 검을 들고서 서넛의 개인 연무장으로 나왔다. 서넛이 영지에서 지낼 때 사용했다던 연무장으로, 라틸 역시 여기서 지낼 때 이 연무장을 함께 사용했다. 아침이 되면 하인들은 순방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갈 채비를 하느라 바쁠 것이다.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여기에 올지 모르니, 추억도 곱씹을 겸 검을 휘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추억을 곱씹는 게 아니라 훈련용 인형을 부숴버리는 게 목표가 되어갔다. 검이 단단한 인형을 내리칠 때마다 나는 ‘퍽, 퍽’ 소리가 개운하게 여겨졌다. 라틸은 점점 더 힘을 높여갔다.

16551104358325.png“폐하.”

서넛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라틸은 검 휘두르던 걸 멈추었다. 어느새 서넛이 지척에 와 있었다.

16551104358315.png“언제 왔습니까?”

라틸이 검을 내리고 눈을 비비며 묻자 서넛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시선이 라틸이 내내 두드리던 훈련용 인형을 향하자, 라틸은 덩달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얼마나 두드려댄 건지 훈련용 인형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16551104358315.png“아니, 얘가 왜 이렇게 부실해졌데.”

그 꼴이 너무 엉망이어서 라틸은 멋쩍게 중얼거리면서 이리저리 뒤틀린 나뭇조각들을 손으로 쓸었다. 아무리 훈련용 인형이라지만 그래도 사람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걸 이 꼴을 내고 나자 괜히 오빠가 했던 말이 떠올라 찝찝하기도 했다.

16551104358315.png“아 마음이 아프네.”

라틸은 오빠가 했던 말. 그 로드의 조건인가 뭔가 하는 걸 떠올리면서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16551104358325.png“다치십니다.”

하지만 서넛은 머리 반이 박살 난 훈련용 인형에는 관심도 없는지, 얼른 다가와 라틸이 인형을 건드리는 걸 막았다.

16551104358325.png“가시가 손에 박히면 어쩌려고 이걸 자꾸 건드리십니까.”

16551104358315.png“애가 아파 보여서.”

서넛은 라틸의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지 않았나 확인하려는 듯, 라틸의 손가락을 여기저기 삭삭 살피더니 안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1104358325.png“다행히 가시가 박히진 않았습니다.”

그 태도는 진지했지만, 서넛이 라틸의 팔을 들어 올린 자세는 미묘했다. 그는 마치 라틸의 팔을 보검처럼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라틸이 자신의 팔을 슬그머니 회수하며 헛기침을 하자, 서넛은 그제야 자신의 자세가 이상했단 걸 알아차렸는지 마구 웃어댔다. 어쨌든 서넛은 훈련용 인형을 반쯤 부쉈단 이유로 라틸을 이상하게 보는 것 같진 않았다. 거기에 안도해 돌아서다가 라틸은 하늘을 보았다. 아직도 이른 아침의 공기였다. 하늘은 여전히 불그스름했고 파란빛은 듬성듬성 섞여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좀 남았단 생각이 들자 라틸은 이번에는 자신의 검 끝으로 서넛의 검집을 쿡 찔렀다.

16551104358315.png“온 김에 대련이나 합시다.”

16551104358325.png“요즘 폐하께선 검술을 멀리하셨잖습니까. 저보다 약하실 텐데.”

16551104358315.png“검술은 멀리했지만…….”

힘은 무진장 세졌으니 괜찮을걸. 라틸은 뒷말은 속으로만 삼키고서 뿌듯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보니 전에 서넛과 겨루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패했지. 하지만 지금은 이길지도 몰랐다. 이 정체불명의 힘 덕에.

16551104358315.png‘잘됐네.’

그 힘을 의식하고 대련을 청한 건 아니었으나, 말을 하고 나니 라틸은 잘됐다 싶었다. 이참에 이 힘을 한 번 제대로 써보고 싶었다. 취객을 날려 버리거나 클라인의 머리카락을 뽑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서넛은 몹시 강하니 지금 라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서넛은 라틸의 거만한 표정을 확인하자, 픽 웃더니 빳빳하고 얇은 재킷을 벤치에 내려놓고서 돌아와 팔까지 걷어붙였다.

16551104358325.png“저는 폐하를 소중히 여기지만 대련에선 절대 안 봐 드립니다.”

라틸이 대답 대신 더욱 턱을 치켜들며 손을 까딱이자, 서넛은 자기 말처럼 조금도 봐주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 라틸은 검을 휘둘러 그의 대범한 공격을 힘껏 받아냈다.

16551104358325.png“!”

그러나 라틸과 서넛의 싸움은 한 합도 가지 못했다. 라틸이 작정하고서 온 힘을 다해 서넛의 검을 내려치자, 검이 반으로 뚝 부러져버린 것이다. 서넛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반 토막 남은 자신의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라틸을 쳐다보았다. 작정하고서 힘을 쏟자마자 한 방에 상대의 검이 부러질 줄 몰랐던 라틸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16551104358315.png“서넛 경 검 관리를 잘 안 하네요.”

그러고서 괜히 서넛을 탓하자, 서넛은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게 중얼거렸다.

16551104358325.png“가문 대대로 물려오는 보검을…… 폐하가 뚝 하고…….”

16551104358315.png“진짭니까?”

  * * *

16551104390116.png“아이니 황후가 사라졌다고?”

별궁에 미리 넣어둔 심복에게서 긴급 연락을 받은 하이신스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

16551104419477.jpg“예, 폐하. 지금 따라간 시녀들이 난리도 아니랍니다.”

16551104390116.png“다가 공작은?”

16551104419477.jpg“그쪽으로 급히 가고 있을 겁니다.”

비서의 보고에 하이신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16551104390116.png“황후가 생각보다 의외인 면이 있군. 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허수아비라 생각했는데. 어디로 갔을까?”

또 다른 비서가 그에게 온 서신을 책상 위에 내려두는 동안에도 하이신스는 아이니 황후가 어디로 달아났을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자국도 아닌 외국에서 일어난 대리공사의 죽음과 클라인 황자 습격 건으로 현재 다가 공작은 위상이 낮아졌다. 하지만 이 일로 아이니 황후는 딱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니 황후를 별궁에 보낸 게 가엾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황후가 달아났다고? 직접? 다가 공작이 놀랄 정도로 소리소문없이?

16551104390116.png“어디로 갔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라틸이 용병왕을 데리고 이곳에서 머물 때. 아이니가 그자에게 보였던 그 관심이 떠올랐다. 잠시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그 관심. 혹시? 잠시 의심했던 하이신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쌍방이라면 모를까, 당시 그 관심은 아이니 황후가 칼라인에게 일방적으로 보내는 관심으로 보였다. 게다가 그 용병왕은 이미 라틸의 후궁이 되어 궁전에서 지내고 있으니, 아이니 황후가 도망쳐서 만날 수도 없었다.

16551104390116.png“혹시 모르니 다가 공작 쪽을 잘 살펴라. 부녀가 짜고서 연기하는 걸지도 모르니. 그래도 만약 황후를 찾지 못한다면…….”

잠시 생각하던 하이신스는 “그건 그때 다시 지시하지…….”라고 중얼거리고서 비서에게 그만 나가보라 손짓했다. 비서가 나가자 하이신스는 이번에는 아까 비서가 두고 간 편지들을 확인했다. 혹시 이 중에 그가 기다리는 편지가 있을까 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발신인 이름이 생략된 편지를 발견했다. 하이신스는 희미하게 웃고서 얼른 봉투를 뜯었다. 역시. 라틸이 보낸 편지다. 그녀의 필체를 한 번에 알아본 하이신스는 너무 활짝 웃지 않기 위해 입가를 눌렀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 * * 여보세요, 하이신스 황제. 내가 네 영혼을 쥐고 안 놓고 있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네 영혼을 놓은 지 이미 오래됐거든? 내가 그나마 미련을 가지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네 껍데기야, 영혼이 아니라. 그대는 자아 성찰이 부족하네. 아, 그러고보니 알려줄 게 있어. 네 동생이 우리가 예전에 사귀었던 걸 알게 됐어. 내가 일부러 널 곤란하게 하려 알려준 건 아니야. 물론 네가 곤란해진다면 진심으로 기쁘겠지만, 어쨌든 이번 건은 내가 한 게 아니야. 네 첫사랑이 여기에 있단 소문을 듣더니 자기가 이리저리 찔러보고 다니다가 알아내고 왔어. 달래기 위해 네 동생한테 내가 진한 키스를 퍼부어줬어. 네 동생 키스 잘하더라 (웃음) 과한 정보를 보낸다고 화내진 마. 어쨌든 클라인은 내 덕에 화가 풀리긴 했어. 네 동생은 너랑 달리 참으로 순수하고 귀여운 애야. 근데 주먹질은 좀 고쳐야겠더라. 걔가 자꾸 내 후궁 시종들 턱을 박살 내는 거 알아? 한 번만 더 내 후궁 시종들 턱을 박살 내면 치료비 청구할 테니 그런 줄 알아. P.S. 너희 나라에 인어가 나왔다고? 설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해? 너희 나라엔 바다 없잖아 멍청이야. 너희 인어는 도랑에서 노냐? * * * 하이신스는 과도하고 괴로운 정보부터 막말까지 고루고루 들어간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마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엄지로 눌렀다. 첫사랑이 쓴 편지를 보는데 왜 아련한 기분이 들지 않고 화가 날까. 게다가 편지 가운데.

16551104390116.png“중간에 ‘웃음’은 또 뭐야.”

클라인과 키스했단 이야기를 한 다음 ‘웃음’은 왜 붙인 건가. ‘웃음’이라고 썼는데 그걸 보자 이상하게 더 화가 나는 기분이어서, 하이신스는 발을 신경질적으로 까딱거리다가 힐긋 옆을 보았다. 편지 뭉치 사이에 클라인이 보낸 편지도 끼어 있었다. 급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나중에 천천히 보려고 했던 편지가. 하지만 클라인이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단 라틸의 편지를 보고 나니, 클라인의 편지 보는 걸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못난 동생이지만, 그래도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되어서.

16551104390116.png‘정식 후궁이 될 거라던 그 편지를 쓴 다음에 진실을 알게 된 건가?’

하이신스는 라틸의 편지를 내려놓고서 이번에는 검은색에 붉은 글씨로 보낸 클라인의 편지 봉투를 뜯었다. * * * 형님, 우리 폐하와 예전에 사귀었어요? 형님이 우리 폐하한테 쓰레기도 안 할 짓을 하고 달아났다는 게 정말이에요? 형님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형님은 내게 미리 알려줘야 했어요. 그런데도 형님은 입을 다물었죠. 나는 형님한테 아주 실망했어요. 폐하를 볼 때마다 형님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픕니다. 일단 돈부터 보내봐요……. * * * 하이신스는 편지를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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