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아주 장렬하게!2021.07.11.
멜로시 영주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 한참을 서성였다. 마음 같아서는 영지를 둘러싼 성벽 정문까지도 나가 있고 싶었으나 영지의 주인으로서 그는 꼭 여기에서 황제를 맞이해야만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초조하게 돌아다니고 있자니 먼발치에서부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시나 봅니다!”
집사가 밝게 외쳤다. 영주는 얼른 옷매무새를 빠르게 정돈하고서 위엄 있는 표정을 지었고, 함께 대기하던 다른 식구들도 서둘러 손거울을 살피며 머리며 얼굴을 정돈했다. 환호성과 함께 마침내 황제의 행렬이 도착했다. 멜로시 영주는 활짝 웃으면서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커다란 백마 위에 올라탄 황제도, 그 뒤에서 황제에게 꼭 달라붙은 소라고둥도, 잘 세공된 마차도 아니었다. 기사들 뒤쪽에 우두커니 자리 잡아 울 것 같은 눈으로 황제의 뒷모습만 쳐다보는 그의 아들 서넛이었다. * * * 격식에 맞추어 황제 일행을 맞이하고 머물 방을 안내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던 영주는 잠시 짬이 나자 기사들 사이에서 아들을 낚아채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얼떨결에 영주의 방에 오게 된 서넛이 묻자, 영주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소파를 가리켰다.
“가봐야 합니다, 아버님.”
“잠깐이면 됩니다.”
아들을 소파에 앉힌 영주는, 여기로 그를 끌고 올 때와 달리 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영주가 입만 달싹이자 서넛이 무슨 일인가 싶은지 고개를 기울였다.
“아버님? 혹시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거라면 말씀하세요.”
“내 일이 아닙니다.”
영주는 고개를 젓고서 서넛의 맞은편에 앉아 무릎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몇 번을 더 그러다가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서넛 님. 혹시……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영주의 질문에 서넛의 표정이 순간 확 꼬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영주는 초조하게 자기 무릎을 매만지며 힘든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셨다면 제가 폐하께 서넛 님을 후궁으로 들여주십사 부탁해 보겠습니다.”
“…….”
“내가 아트락시 공작 같은 제일 공신은 아니나, 가장 처음으로 폐하를 도운 공신입니다. 폐하께선 공사를 철저히 하시는 분이니, 청을 들어주실 겁니다.”
영주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그는 아들이 당당하게 황제의 최측근으로 올 줄 알았지, 그렇게 말린 청어처럼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지금 몹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서넛은 아버지의 말에 피식 웃고서 소파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했더니.”
“서넛 님. 진심입니다.”
영주가 단호하게 말하며 올려다보자, 서넛은 아버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꽉 주무르고서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버틸 만합니다. 괜찮으니 괜히 이상한 데 신경 써서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아직’ 버틸 만하다는 겁니까. 영주는 속으로만 물었다. 서넛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고 한 말 같아서. 서넛이 문을 열고 방을 나가자 영주는 힘없이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아들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이기에 또래의 영식들처럼 일찍 약혼하거나 정혼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걱정스러웠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어떻게 해서든 똑똑한 영애를 찾아 혼담을 주선했어야 했나? * * *
‘내일 영지를 한 바퀴 둘러보고, 가는 길에 작은 마을도 몇 군데 들려보고 하면 날짜가…….’
라틸은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 날짜를 손꼽아 보다가 건너편 테라스에서 나는 덜컥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빤히 보고 있으려니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거기서 서넛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만에 집에 오니 좋은지 편한 의상을 입고 손에는 술인지 음료수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병을 들고 있었다. 이쪽이 옆에 있는 걸 모르는 눈치이기에 라틸은 발소리를 죽여 가까이 가 난간을 ‘탱’ 두드렸다. 쇠를 치는 소리에 서넛은 휙 고개를 돌렸다가 라틸을 발견하고는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안 피곤하십니까?”
라틸이 대답 대신 난간에 풀썩 앉자 서넛은 미소를 지우고서 놀라 손을 뻗었다. 손은 라틸에게 닿지 않았으나, 얼마나 놀란 건지 그가 들고 왔던 병이 바닥에 깨어지며 쨍그랑하는 소리를 냈다.
“폐하!”
“떨어지는 거 아닌데.”
“좀 조심하십시오. 미끄러지면 어쩝니까.”
“미끄러진 건 서넛 경이 들고 온 병이죠. 괜찮아?”
서넛은 축축해진 발치를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습니까.”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괜히 발을 까딱거렸다. 그때마다 서넛은 자신의 손을 움찔거렸지만, 이번에는 괜히 소란을 피우진 않았다. 라틸이 혹시라도 떨어질까 유심히 쳐다보기만 할 뿐. 어릴 때부터 익숙한 시선이기에 라틸은 태연히 하품하면서 밤바람을 쐬었다. 서넛은 몇 살 차이나 난다고, 라틸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행동을 하면 늘 저렇게 자기가 조마조마해서 쳐다보고는 했다.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못 보길 바랍니다, 폐하. 체통이 어디로 간 겁니까.”
“뭐 어때요. 다른 왕들도 안 볼 때는 다 제멋대로 행동할 건데.”
“말도 안 됩니다.”
“말 됩니다. 다들 자기 궁전에서 나름 제일 귀하게 큰 사람들인데. 얼마나 제멋대로 하겠습니까?”
라틸이 코웃음을 치자 서넛은 그건 그렇다고 수긍했고, 두 사람은 별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계속 바람을 쐬었다. 그러다 라틸은 슬슬 들어가야 내일 순방을 무사히 마치고 바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얼른 난간에서 내려왔다.
“일정이 빡빡하니 서넛 경도 그만 자요.”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라틸은, 5초도 지나지 않아 뒷걸음질을 쳐서 테라스로 돌아와 물었다.
“내가 계속 궁금했는데, 서넛 경.”
“네, 폐하.”
“영주는 왜 서넛 경한테 꼬박꼬박 ‘서넛 님’이라 부르지?”
보통 아들한테 안 그러지 않나? 라틸이 고개를 기웃하자, 서넛이 갑자기 허리를 굽히더니 아까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나중에 사람 불러 치워요.”
손가락을 다치기라도 할까 봐 라틸이 걱정스레 물었으나, 서넛은 유리 조각을 다 챙겨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한 박자 늦게 라틸의 질문에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제게 장난삼아 기사 말투를 사용해주시지 않습니까. 아버님도 그냥, 어린 시절부터 비슷하게 놀다 보니 습관이 되신 겁니다.”
“그냥 그런 것치곤 대답이 너무 늦었는데.”
“유리 조각들이 거슬려서요.”
라틸은 그를 수상쩍게 쳐다보았으나,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더 대화를 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정말로 안으로 들어갔다. 서넛은 황제가 들어가고서도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자신의 엄지를 조금 들어올렸다. 유리를 주울 때 잘못 주운 건지 그 자리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 핏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흐르는 걸 보다가 서넛은 천천히 엄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하지만 곧 그는 인상을 구기고서 엄지를 도로 입에서 뗐다. * * * 순방 도중 라틸이 잠시 말에서 내려 상가 사람들을 만나 보고 있을 때였다. 상인들은 황제가 가까이에서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주자 놀랍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해서 잔뜩 흥분했다. 멜로시 영지는 처음부터 라틸을 지지하던 곳이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호의적으로 굴었다. 그들이 라틸을 지지하기로 직접 결정했던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영주가 라틸을 지지하면서부터 그들 역시 라틸의 위기와 부흥을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틸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외부인이 있을 수도 있고, 영지의 뜻과 다른 뜻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기에, 라틸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자 근위기사들 모두 황제의 근처에 모여서서 밀착 호위를 펼쳤다. 게스타는 게스타대로 마을 아이들을 데리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다가 한 번씩 라틸이 있는 쪽을 확인하고서 뿌듯하게 웃었다.
-네 생일 선물은 이번엔 이걸로 대신하자.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쉬어갈 때 라틸이 잠시 해준 이야기가 상상 속에서도 고막을 간지럽혔다. 트리는 활기찬 아이들과 공놀이를 해주면서도 한 번씩 그런 게스타를 확인하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게스타가 국서가 되면 꼭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었다. 게스타는 상냥한 데다 온화하니 분명 좋은 국서가 될 거였다. 게다가 게스타가 몸이 좀 약하긴 하지만 뼈대는 튼튼하지 않던가. 얼굴이며 키며 죄다 잘났으니, 게스타와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분명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들 뿐일 터이다. 반면 클라인 황자의 아이들은 제 아비를 닮아서 다들 폭력적인 데다 못돼먹었겠지. 라나문의 아이들은 제 잘난 맛에 살며 거만하기 짝이 없을 테고. 솔직히 2세를 생각해도 국서가 될 법한 건 역시 우리 도련님뿐이라고, 트리는 뿌듯하게 생각했다.
“아! 죄송해요!”
그러다 한 아이가 공을 너무 세게 차는 바람에, 트리는 공을 가지러 잠시 다른 쪽으로 달려갔다. 그 때문에 트리는 보지 못했다. 활짝 웃으면서 아이가 주는 색칠한 공을 받아 들던 게스타가, 아이의 어깨 너머로 서넛이 황제의 옆에 나란히 서 웃는 모습을 보더니, 쇠로 된 공을 우두둑 구겨버리는 것을.
친형제들보다 더욱 살갑게 대해주는 후궁에게 흠뻑 빠져서 보물 1호인 공을 가져다주었던 아이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게스타는 시선을 돌리다 굳은 아이를 발견하자 아까처럼 순하게 웃으면서 품에서 금화를 꺼내 건넸다.
“공이 망가졌네. 새 걸로 사거라.”
아이는 굳은 자세 그대로 금화를 받아 들고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스타는 부모님에게 가보라고 아이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다가, 아이가 돌아서자 다시 표정이 서늘해져서 아직도 라틸과 서 있는 서넛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늦은 밤, 다가 공작이 별궁에 딸은 잘 도착 했을지, 루이스는 시키는 일을 잘했을지, 그의 예상대로 헤움 황자가 아직도 딸 곁을 맴돌고 있을지를 고민하던 그때였다. 멀쩡하던 방 안의 불이 갑자기 동시에 꺼지더니 창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이 들어왔다. 다가 공작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파이프를 물고 있다가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날 불렀나.]
헤움 황자였다. 그의 예상대로 죽은 헤움 황자는 전에 연회장에서 그렇게 도망치고도 아직 아이니의 곁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다가 공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생전의 그에게 하듯 인사를 건넸다. 헤움 황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꼴이 된 후로 황자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을 테니 그렇겠지. 다가 공작은 헤움 황자의 속내를 짐작해보고서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는 뭘 원하는가.]
헤움 황자의 질문에 다가 공작은 파이프 불을 꺼 옆에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섰다. 한때 그의 사위가 될 뻔했던 이 고귀한 황자는 이젠 한낱 괴물이 되었을 뿐이나 아직 쓸모가 많았기에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황자님 덕에 우리 아이니가 황후가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실지도 모르지만, 그 애는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지요.”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겠지.]
“황제는 아이니에게서 절대로 후손을 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시시때때로 이혼하려 들지요. 이 틈을 노리는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둘이 아니고 앞으로 더 늘어날 텐데. 걱정입니다.”
[내게 형님을 죽여 달란 건가?]
“그건 거절하시겠지요. 압니다. 게다가 황제를 죽여 봤자, 아이니는 덩달아 황후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뿐인데, 그럴 수야 없지요.”
[그럼 원하는 게 뭔가.]
“황제가 살아는 있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평생 침대에 누워 숨만 붙어 있도록. 그러면 내 딸이 대리 황제가 되겠지요.”
[형님이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지면 다른 황족이 뒤를 이으려 하지, 아이니를 대리 황제로 만들진 않을 텐데?]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다가 공작의 눈이 비열하게 가늘어졌다.
“황자님이 도와주신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헤움 황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자기 꼴을 보란 듯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이제 힘이 없다. 죽었다 깨어나 강한 힘을 얻었다곤 하지만, 이 힘은 아이니에게 권력을 줄 힘은 아니지.]
다가 공작은 끌끌 웃더니 손을 젓고서 잠시 놓아두었던 파이프를 다시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웃었다.
“무슨 소리십니까. 아주 커다란 도움을 주실 수 있는데요.”
[도움?]
그 불길한 미소에 헤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몇 년 전. 그때도 다가 공작은 저런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제안했다.
“한 번 더 죽어 주시지요.”
바로 저렇게. 다가 공작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더니, 한 번 크게 빨아들인 다음 연기를 뱉으며 웃었다.
“아이니의 손에. 공개적으로. 아주…… 장렬하게!”
헤움 황자의 표정에 떠올라 있던 슬픈 미소가 사라졌다.
[자네는 달라진 게 없군. 이전에도 지금도. 늘 내게 죽어달라 부탁만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