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참지 않는 클라인, 인내하는 서넛2021.07.07.
“한 분은 폐하께서 ‘제일 사랑해’라고 말씀해 주시고. 한 분은 폐하께서 순방에 데려가 주시는데, 소단주님은 대체 뭘까요.”
히얼란이 힘없이 내뱉는 소리에도 타시르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한단 말이야 누구에게든 뱉을 수 있는 거고. 순방에야 어차피 라나문 님 아니면 게스타 님 둘 중 하나를 데려가는 거고. 뭐가 문제야, 히얼란.”
“참 속도 좋으세요…….”
히얼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으나 타시르가 다른 후궁들과 달리 이 연이은 두 가지 소식에 전혀 상처받지 않은 모양새인 게 안심이긴 했다. 울상을 하고서 시무룩해 하는 것보단 씩씩한 게 나으니까. 어쨌든. 그런데 잘 걸어가던 타시르가 갑자기 어딘가를 보더니 히얼란을 향해 ‘내 뒤로 와’ 하는 손짓을 보냈다. 얼른 시키는 대로 하고서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뒷짐을 지고 거들먹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폐하께서 클라인 황자님을 가장 아낀단 소문은 신뢰가 없다 이거지. 그 소문을 누가 시작했는데?”
“그러게. 누가 시작했지? 난 릭스한테 들었는데.”
“난 폴한테 들었어.”
“거봐 거봐. 폐하가 어쨌대, 이런 건 그냥 다 소문이야. 진실은! 순방에 딱 한 명 데려갈 사람으로 폐하께서 우리 게스타 도련님을 고르신 거지!”
껄껄 외친 트리는 마치 깜짝 등장인물이라도 소개하듯 손바닥을 쫙 펼치고서 아무 곳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하자마자 하인들이 기겁해 뒤로 물러나더니 다들 머리를 조아렸다. 트리는 놀라서 뒤를 휙 돌아보았다.
“!”
공교롭게도 그의 손바닥이 가리키는 그곳에 클라인 황자가 팔짱을 끼고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네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하는 표정으로. 트리는 얼른 손을 내리고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인사했다.
“황자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하지만 클라인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트리는 난처해져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클라인 황자가 몹시 싫었지만, 게스타를 위해서라도 이런 식으로 더 얽히고 싶진 않았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제 아비나 주인이나 시종이나 다 똑같군.”
하지만 클라인 황자가 한 번에 세 명을 동시에 욕해버리자 트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짓말이라니요?”
“폐하께서 순방에 게스타를 데려간다는 말.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
“게스타 님을 데려가는 거니까 황자님께선 당연히 못 들으셨겠지요.”
이런 것도 다 알려줘야 하나. 트리는 황당한 기분을 누르며 대답을 하다가, 클라인 황자가 지금 게스타를 질투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아니라면 저 인간이 갑자기 다가와서 이럴 리가 없었다. 트리는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으나 너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덧붙였다.
“어떻게 제가 감히 폐하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황자님. 폐하께선 게스타 님을 데려갈 거라고 직접 비서를 보내 알려주셨습니다.”
클라인은 딱 잘라 외쳤다.
“그럴 리 없다!”
“그럼 폐하께 물어보시지요.”
당당하게 말한 트리의 입술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물론 인정하기 싫으시겠지요. 순방에 따라가는 건 보통 국서들의 일. 이런 일에 폐하께서 게스타 님을 데려가시는 건, 국서 자리에 게스타 님을 생각하고 계신단 의중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히얼란이 작게 혀를 찼다.
“또 싸우네요.”
히얼란은 이번에는 제 소단주에게 물었다.
“소단주님, 안 말려도 됩니까?”
“재밌는데 왜.”
하지만 타시르가 오히려 즐거워하며 이 사태를 보고만 있자, 히얼란은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서 작게 속닥거렸다.
“클라인 황자는 성격이 더럽잖아요. 저러다가 또 저 시종을 막 때릴 수도 있습니다. 저번처럼요.”
그러나 히얼란의 염려에도 타시르는 웃으면서 손만 저었다.
“아무리 클라인 황자가 멍청해도 그렇지, 전에 트리를 때리다가 그 혼쭐이 났는데 설마 사람들 앞에서 또 때리-.”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퍽 소리가 나며 트리가 날아갔다. 히얼란이 ‘거보세요’ 하는 시선을 보내자, 타시르는 “아이고 저 진상 같은!” 하고 작게 욕하며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 * *
“그게 무슨 소리야? 게스타 시종이 턱이 부러지다니?”
좀 조용히 지내는가 싶던 클라인이 다시 사고를 쳤단 소식은 하이신스가 보낸 전서조와 엇비슷한 시각에 도착했다.
“게스타 님의 시종이 순방에 따라가는 걸 두고서 자랑을 해대자 화가 났다는군요.”
서넛은 덤덤하게 설명하다가 자신의 손을 들더니 5cm 정도 옆으로 휙 옮기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깔끔하게 한 방에 호수까지 날아갔답니다.”
“진짜 그 성격…….”
라틸은 이마를 짚었다. 그 인간. 요즘 부쩍 사고를 안 친다 했지.
“게스타 시종은? 괜찮대?”
“다행히 대신관님이 바로 치료를 해줘서 말끔히 나았답니다.”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하이신스가 보내온 답서를 펼쳤다. -왜 이런 걸 자랑하는 거야? 우리나라에도 옛날엔 좀비 안 나왔어. 우리나라엔 옛날에 인어가 나왔단 말은 있다. 진짜인진 모르겠어. 내가 본 적은 없으니까. -내 생각엔 인어가 있다면 너랑 비슷할 거 같아, 라틸. 인어는 온화하게 웃으면서 이리 오라 손짓하는데, 안 오면 끌고 가서 물에 머리를 처박은 다음 성질을 낸대. -그뿐이 아니야. 배가 지나갈 때마다 멋대로 노래를 부른 다음 통행료를 물린대. 깡패 아냐?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네가 떠올랐어, 라틸. 너는 나의 인어인가 봐. 나는 그렇다면 네게 잡긴 뱃사람일까? 너는 언제쯤 내 영혼을 놓아줄래, 라틸?
“이 자식은 또 뭐라는 거야. 이거 지금 돌려서 나더러 깡패란 거야?”
형이랑 동생이랑 이 인간들이 쌍으로 사람을 놀려대나. 라틸이 쓸데없이 구구절절하고 로맨틱한 욕을 보면서 입을 뻐끔거리자, 서넛이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너머로 편지를 보더니 손가락을 뻗었다.
“대놓고 깡패라 써 놨습니다. 돌려서 쓴 게 아니라요.”
그가 ‘깡패 아냐?’ 부분을 딱 짚어주자, 라틸은 입을 내밀고서 그를 쏘아보았다. 서넛이 슬그머니 손가락을 도로 내리자, 라틸은 편지를 퍽 엎어 놓고서 서랍을 열어 새빨간 편지지를 꺼냈다. * * * 순방을 떠나기로 한 날은 유달리 무더운 날이었다. 그 때문에 멜로시 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막 황궁을 떠날 때의 날렵하고 번쩍이던 옷맵시를 보이는 대신, 땀에 흠뻑 젖어 연신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대고 있었다. 영지 성문을 지나가며 라틸은 게스타가 탄 마차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을 열고 게스타가 고개를 삐죽 내밀자, 라틸은 그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참아.”
게스타는 라틸이 손부채질이 아니라 손으로 입술이라도 더듬은 양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는 고개를 푹 내리고서 “네…….” 하고 중얼거렸다. 몇몇 기사가 작게 웃자 게스타는 눈알을 오른쪽 왼쪽으로 굴려대며 쩔쩔맸다. 그 모습을 본 라틸은 창문을 다시 닫아 주려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마음을 바꿔서 제안했다.
“게스타. 갑갑하면 나올래? 영지 사람들이 구경 나오고 있는데, 널 보면 좋아할지도 몰라.”
멜로시 영지의 사람들이 한때 자기들의 영지에서 지냈던 황태녀가 황제가 되어 돌아온단 이야기에 다들 하나둘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마차에 타고 있는 게 누구인지 궁금한 듯 다들 라틸과 마차를 연달아 구경했다. 라틸은 그 사람들이 게스타를 본다면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국서일지도 모르니까. 게스타는 라틸의 제안이 의외인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대답은 마차 안쪽에서 트리가 허겁지겁 대신했다.
“가신다고 합니다, 폐하. 꼭 나가신다고 합니다.”
게스타는 휙 뒤를 돌아보며 트리에게 무어라 소곤거렸다. 왜 마음대로 대답하냐고 항의하는 듯했다. 라틸은 말 위에서 다시 창틀을 툭 두드렸다.
“싫으면 억지로 나오진 마.”
그 말을 듣자마자 트리와 대화를 하느라 잠시 머리를 도로 넣었던 게스타가 황급히 손과 머리를 동시에 밖으로 뻗으며 말했다.
“나가, 나가겠습니다. 폐하랑 같이. 폐하 옆에 있겠어요.”
라틸이 손짓하자 마부가 얼른 마차를 세웠다. 라틸은 자신이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게스타는 알아서 문을 잘 열더니 동그란 공처럼 튀어나와 우뚝 일어섰다.
“폐하.”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 모습이 좀 못 미덥긴 했으나 도로 들어가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라틸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 같이 타나요?”
“따로 타려고?”
게스타는 예상 못 했는지 더욱 허둥지둥했으나 그래도 거절하는 대신 라틸의 손을 잡고서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두 사람이 올라타자 말이 무거운지 ‘히히힝’ 하는 소리를 내며 조금 짜증을 냈다.
“착하지?”
라틸이 말 등을 쓸고 있으려니, 허리 쪽으로 게스타가 깨진 유리 날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을 대는 게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게스타? 꽉 잡아.”
말이 출발하자마자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에 라틸이 웃으면서 권하자, 게스타는 그제야 두 팔로 라틸의 몸에 꼭 매달렸다. 생각보다 더욱 탄탄하고 두꺼운 팔이 허리를 꼭 감싸자 자연스럽게 단단한 가슴이 등에 밀착했다. 라틸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생각보다 등에 맞닿은 게스타의 몸이 커다래서 고삐를 꽉 틀어쥐었다.
“폐하?”
게다가 의식해서 그런가. 전에 들었던 게스타의 그 속마음처럼, 목소리가 낮고 색기 있게 들려서 괜히 이번엔 라틸 쪽에서 귓가에 열이 올라왔다.
“가자.”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괜히 고삐만 찰싹찰싹 움직였다. * * * 아름다운 연인이 하얀 백마 위에 꼭 붙어서 가는 모습은 명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보기 좋았다. 황제가 영지에 순방을 온단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던 영주민들은 황제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황제가 데려온 소문의 후궁을 보자 환호하고 기뻐했다. 후궁이 머뭇거리다가 한 번씩 손을 흔들면 사람들은 더욱 좋아하고, 저 사랑스러운 봄꽃 같은 후궁이 누구일지에 대해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모두가 즐거워했고 모두가 신나 했다. 무더운 여름 행렬에 지쳤던 순방 행렬도 경쾌한 환호 속에 다시 기운을 차려갔다. 이 모든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다 서넛은 쓸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