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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잠시 위태로웠던 클라인 (141/367)

141화. 잠시 위태로웠던 클라인2021.07.04.

아이니 황후는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별궁에서 지내게 되었고, 다가 공작은 황궁 출입 금지 명령을 받았다. 혐의가 풀릴 때까지만 지속한다는 임시 조치였으나, 황궁에 스스로 들어가지 못하는 다가 공작이 무슨 수로 혐의를 푼단 말인가. 누군가 다가 공작을 대신해 그의 누명을 벗기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분노를 감수하고서 말을 올려야 할 텐데.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이신스는 이미 범인이 다가 공작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이참에 그의 숨통을 조금씩 조금씩 조여갈 생각뿐이었다.

16551103580638.jpg“네가 고생하게 생겼구나.”

아이니 황후가 별궁으로 떠나는 날. 다가 공작은 수도 성벽 부근까지 딸을 따라가, 창문 너머로 그녀를 위로했다.

16551103580638.jpg“하지만 염려 마라. 무슨 수를 써서든 아버지가 다시 널 네 자리에 돌려놔 줄 테니까.”

딸의 손등을 두드린 다가 공작은 마차 옆에 내려선 시녀 루이스를 향해서도 당부했다.

16551103580638.jpg“황후 폐하를 잘 모셔야 한다.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16551103580638.jpg“당연하지요. 염려 마시지요.”

다가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좋지 못한 일에 얽혀 쫓겨나듯 간다는 게 기분 나쁠 뿐, 별궁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휴가 때 자주 사용하는 그 별궁은 아주 밝고 환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으니.

16551103580638.jpg“그래도 그렇지, 황제 폐하는 참으로 모진 분이십니다. 공작님을 의심해도 그렇지, 황후 폐하가 뭘 잘못했다고…….”

16551103580638.jpg“황제가 황후와 사이가 나쁜 데다 아예 가까이 있지도 않다면, 황후와 비슷한 나이의 딸을 가진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접근하게 되지. 날 따르던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다가 공작은 서늘하게 중얼거리고서 수도 끝에서도 보이는 높디높은 성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16551103580638.jpg“아마 이걸 노렸을 거다. 아이니를 떨어트려 두는 것만으로도 내 세력이 약해질 테니.”

아이니 황후와 함께 별궁에 가기로 한 시녀 루이스는 화가 나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니는 마차 밖에서 나누는 대화가 다 들릴 텐데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화를 내지도, 한숨을 내쉬지도 서글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 개월 전부터 내내 저 상태였던지라, 다가 공작은 아이니를 달래는 말을 하는 대신 루이스에게 ‘이리로 오라’는 눈짓을 하며 마차에서 멀어졌다. 마차 안에서 아무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거리를 벌리자, 다가 공작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물었다.

16551103580638.jpg“아직도 아이니가 죽은 헤움 황자 이야기를 하느냐? 만난다거나 그런 이야기.”

16551103580638.jpg“그 연회 때 이후로는 하지 않으십니다.”

다가 공작이 꺼낸 건 작고 얇은 편지 봉투였다. 공작은 그걸 루이스에게 건넸다.

16551103580638.jpg“이걸 가져가라.”

16551103580638.jpg“이게 무엇인지요, 공작님?”

루이스가 얼른 받아들며 묻자 공작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이니가 탄 마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16551103580638.jpg“헤움 황자에게 보내는 편지다.”

16551103580638.jpg“!”

죽은 황자에게 편지를 썼다고? 루이스는 놀라서 공작을 보았다. 물론 헤움 황자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기도 했다. 연회 때 죽었던 황자가 멀쩡히 움직이는 걸 본 사람만 몇이던가. 하지만 다시 살아났다고 한들 이전의 헤움 황자와 같은 존재라고 하긴 어려울 텐데. 편지를 전하라니. 루이스는 두려워졌다. 그녀는 친했던 시녀가 도끼를 든 좀비로 나타났을 때의 충격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6551103580638.jpg“염려 마라. 직접 전하라는 게 아니니.”

16551103580638.jpg“그러면……?”

16551103580638.jpg“아이니가 잠들면 침대 근처에 놓았다가 깨기 전에 회수해라. 그러면 된다.”

루이스는 그래도 좀 두려운지 서신을 챙기면서 다가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죽은 황자, 그것도 연회장에 사람들을 습격하러 나타나 생전의 이미지까지 말아먹게 생긴 괴물 황자에게 편지를 왜 전하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뒷짐을 진 다가 공작은 비릿하게 웃으며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16551103580638.jpg“헤움 황자는 아이니를 사랑하지. 생명을 버릴 정도로. 아직 그렇다면…… 큰 쓸모가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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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110361422.png“시기가 시기라 여러 군데 가긴 좀 그렇고. 한 군데 정도라도 순방을 돌아야겠습니다.”

회의를 다녀온 라틸이 혼자 뭘 곰곰이 생각하다가 돌연 꺼낸 말에, 근처 책상에서 자기 일을 하던 시종장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16551103580638.jpg“순방이요?”

1655110361422.png“음. 네. 갑자기 좀비니 흑마법사니 그런 것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이 불안해한다니까요. 전국을 돌긴 힘들겠지만, 근처 한 곳이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라틸의 설명에 시종장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바로 찬성했다.

16551103580638.jpg“좋은 생각 같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신다면, 국민들도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디에 갈지는 정하셨습니까?”

아까 라틸이 홀로 생각하던 건 순방을 할지 말지가 아니었다. 순방을 어디로 갈지였지. 이미 결론을 낸 상태였기에 라틸은 바로 대답했다.

1655110361422.png“멜로시 영지에 갈 겁니다.”

철로 만든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서넛이 그 소리에 당황해 라틸을 쳐다보았다. 멜로시 영지는 그의 아버지가 영주로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6551103646191.png“괜찮습니다, 폐하.”

서넛은 바로 겸양하는 소리를 냈으나, 의외로 이번에는 시종장이 괜찮겠다고 두둔해주었다.

16551103580638.jpg“좋은 생각입니다. 멜로시 영주는 폐하를 가장 먼저 지지해 주었으니까요. 게다가 인근이라 빨리 다녀올 수 있으니 무리도 아니고요.”

서넛은 한 번 더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미 라틸이 마음을 정한 눈치이자 결국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는 기사단장이지 이런 걸 의논하는 위치는 아니었기에. 라틸은 힐긋 서넛의 표정을 확인하고 웃었으나, 시종장이 책상에서 일어나며 하는 말에 바로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16551103580638.jpg“순방을 갈 때는 다들 황후나 국서를 데려가지요.”

라틸은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턱을 괴고서 흐뭇하게 웃고 선 시종장을 쳐다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역대 황제들은 순방에 황후나 국서를 데려가 공무를 보았다. 하지만 황후가 몸이 좋지 않거나 임신 중이어서 함께 이동하기 어려울 때는 후궁을 데려가기도 했으니, 현재 국서가 없는 라틸 역시 후궁을 데려가야 할 터. 시종장이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였다.

16551103580638.jpg“라나문 님과 함께 가면 딱 맞겠습니다, 폐하.”

생글생글 웃던 시종장은 라틸이 가자미눈을 하고서 쳐다보자 얼른 그럴듯한 이유를 방패처럼 내세웠다.

16551103580638.jpg“라나문 님은 제일 공신의 장남인 데다,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기도 소문이 자자하지요. 국민들 중에도 가장 아름답다는 라나문 님의 아름다움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라나문 님을 데려가면 다들 열렬히 환호할 겁니다, 폐하.”

1655110361422.png“얼굴로 치면 클라인도 만만치 않을 텐데.”

16551103580638.jpg“그렇긴 하지만 그분은 임시 후궁이니까요. 게다가 외국인이시고요. 이미 국서가 되셨다면 상관없지만, 아직 임시 후궁이라 이런 자리엔 맞지 않습니다.”

시종장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서 좀 아니꼬웠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라틸은 클라인을 띄워주고 싶었지만, 국서도 아닌 데다, 임시 후궁인 클라인은 국민들을 안정시킬 용도로 데리고 다니기엔 부적합했다. 게다가 라틸은 클라인의 솔직하고 밝은 성품이 마음에 들었으나, 그 성품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국서의 모습과 거리가 먼 건 인정하고 있었다.

1655110361422.png“사실 라나문이 딱 제격이긴 한데…….”

라나문은 지난번 호수 괴물 습격 사건 때도 침착하게 대응했고, 시종장의 말마따나 제일 공신가의 장남인 데다 원체 화려한 외모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적절했다. 게다가 클라인과 달리 어떤 생각을 하든 속내를 꽁꽁 다 감추어 두기 때문에, 순방 도중 실수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춤만 안 춘다면.

16551103580638.jpg“그럼 라나문 님께 준비하라 할까요?”

라틸이 라나문 쪽으로 추가 기우는 것 같자 시종장이 기뻐하며 물었다.

1655110361422.png“아니.”

하지만 라틸에겐, 라나문을 데려갈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1655110361422.png“게스타를 데려갈 거다.”

얄미운 아트락시 공작이라는.

16551103580638.jpg“게스타 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던지 시종장이 떨떠름해서 되물었다.

1655110361422.png“그래.”

16551103580638.jpg“하지만 게스타 님은 그런 일에 나서기엔 너무 조용하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숫기도 없으셔서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1655110361422.png“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익숙해질 때까지 시키시려고요? 시종장이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으나, 라틸은 모른 척 웃으며 지시했다.

1655110361422.png“생일 때 같이 놀러 가잔 약속도 못 지켰는데, 이참에 둘이 다녀오면 좋지요. 게스타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리고 준비하라 해요.”

시종장은 시무룩한 기색이었으나 황제의 결정을 뒤엎을 권한은 없었다. 그는 시무룩하게 알겠다 대답하고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 * * 트리는 안절부절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게스타의 주위를 빙글빙글 오갔다. 황제가 클라인에게 ‘후궁들 중 제일 좋다’ 했다던 소문이 퍼진 이후. 그 소문을 들은 게스타는 급격히 우울해져서 혼자 이상한 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 이상한 행동이란, 두꺼운 종이를 가져오게 한 다음 그걸 똑같은 크기로 잘라내어 카드 비슷한 걸 만드는 거였다. 카드놀이를 하고 싶으면 진짜 카드를 사서 가져다드리겠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게스타는 놀고 싶은 게 아니라며 자신의 작업에만 열중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에 딸린 벤치에 앉아, 햇볕을 받으면서 저렇게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보기에 참으로 답답했다. 헛소문이다, 폐하께서 그런 얘길 했단 증거가 어디 있냐, 원래 사람들은 별 이상한 말을 다 퍼트리고 다닌다 등등 트리가 최선을 다해 위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6551103580638.jpg“도련님.”

어떻게 위로해도 소용이 없자 결국 트리는 게스타가 만지작대는 저 볼품없는 카드 이야기를 꺼냈다.

16551103580638.jpg“왜 카드가 다섯 장뿐이에요?”

왜 게스타가 저런 빈약한 수제 카드를 내내 만지작거리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게스타의 표정에서 슬픈 기색만이라도 걷어내고 싶어서.

16551103702666.png“아직은 다섯 장만 필요해서.”

게스타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L과 C, T, S, J라는 글자를 써둔 카드를 차례로 섞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카드 글자가 보이지 않도록 벤치에 하나하나 다 뒤엎은 다음 신중한 표정으로 그 카드들을 유심히 살폈다. 정말로 할 거 없는 한량처럼 보여서, 트리는 자신의 도련님이 너무 가엾어졌다.

16551103580638.jpg“평소처럼 책이라도 읽으러 가세요, 도련님. 그러지 마시구요.”

게스타는 힘없이 웃고서 카드 하나를 뒤집었는데, 그 카드에는 C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게스타는 그 카드를 들어 올리고서 빙그레 웃더니 트리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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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03702666.png“이건 운명일까?”

저건 무슨 헛소리실까 싶어서 트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게스타 님.”하고 울타리 너머에서 불렀다. 게스타는 C가 쓰인 카드를 들고서 일어나 울타리 가까이 다가갔다. 나타난 사람은 황제의 비서였는데, 게스타가 가까이 오자 꾸벅 인사하더니 활짝 웃으면서 알려주었다.

16551103580638.jpg“폐하께서 멜로시 영지로 순방을 가실 텐데, 게스타 님을 데려가실 거라고 미리 준비해두라 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게스타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눈시울까지 붉어져서 확인했다.

16551103702666.png“정말인가?”

16551103580638.jpg“네. 짧은 일정이니 짐을 많이 쌀 필요는 없다고 하셨고요.”

게스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는 자신이 우울한 후궁 하나를 기쁘게 해 주었단 뿌듯한 기분에 빠져 활기차게 인사하고 돌아서 달려갔다.

16551103580638.jpg“잘됐어요, 도련님!”

두 걸음 뒤에서 이야기를 듣던 트리도 얼른 다가와 기뻐 외쳤다. 게스타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벤치로 가더니 카드 다섯 장을 한군데로 모은 다음 찢어서 트리에게 내밀었다.

16551103702666.png“가져다 버려줄래? 당장은 안 써도 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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