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왜 자랑하는 거지?2021.06.30.
“어? 혼자 오십니까?”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하얀 머리 손님이 혼자 들어왔다. 그걸 본 여관 주인은 놀라 물었다.
“제가 우리 직원에게 우산 들려 보냈는데요. 못 보셨나요?”
하얀 머리 손님의 옷이며 머리카락이 흠뻑 젖은 걸 본 여관 주인은 당황해 물었다. 저 손님은 씀씀이가 큰 손님인 데다 한 달 동안 이곳에서 숙박하기로 되어 있어서, 웬만하면 서로 웃으면서 마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렇게 비를 쫄딱 맞고 혼자 오다니. 물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건 여관의 탓은 아니었으나, 호수에 가보라 추천한 건 자신이었기에 여관 주인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아니, 그 녀석은 얼른 뛰어갔다 오라니까 어딜 간 거야?”
시계를 확인한 여관 주인은 손님이 화를 내기 전에 대신 툴툴거렸다. 직원에게 불만이 있는 손님이어도 보통은 이렇게 먼저 화를 내버리면 화를 내지 않고 가버리니까. 하지만 곧 여관 주인은 그 직원이 무척 성실한 성격이란 것을 떠올리며 혹시라도 빗길에 넘어져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토박이라 눈 감고도 호수와 여관을 오갈 수 있는 청년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저, 손님. 오는 길에 혹시 저희 직원 못 봤나요? 우산을 아마 두 개 들고 있었을 거고, 덩치가 좋은 청년인데요. 손님이 오셨을 때 말을 마구간에 넣었고…….”
그 말에, 내내 말없이 주인을 바라보던 하얀 머리 손님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
입술은 왜? 의아해서 덩달아 그 붉은 입술을 쳐다보자, 손님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마셨다.”
“예?”
“식사를 보내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 밝은 목소리에 여관 주인은 하하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하하, 참, 농담도 이상하게 하십니다.”
하얀 머리 손님이 마주 보고서 같이 하하하하 소리 내 웃어대자, 여관 주인은 참 썰렁한 농담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같이 계속 웃었다. 그 순간. 하얀 머리 손님, 기르골이 눈 깜짝할 사이 어디선가 창을 꺼내 여관 주인의 목 가운데에 들이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입을 벌리고 하하하 웃어대고 있어서, 여관 주인은 자신의 목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붙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하…… 하…… 하.”
여관 주인은 뒤늦게야 창을 발견하고서 웃던 걸 어색하게 멈추었다. 소리를 멈춘 그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바라보다가 기겁해 뒤로 물러나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폭우를 피해 들어온 손님들 역시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 중 누군가는 경비병을 불러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이 죽은 후일 수도 있는지라 여관 주인은 겁이 나서 벌벌 떨며 울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왜 이러세요.”
기르골은 그제야 크게 웃어대던 걸 멈추더니, 입꼬리를 만족스레 올리면서 속삭였다.
“배불러. 먹지 않아. 염려 마.”
“제발…… 돈이라면 드릴 테니…….”
“여기 어디에, 폭발 전문 마법사가 있단 소문을 들었는데.”
여관 주인은 겁에 질려 흐느끼다가 “예?”하고 되물었다. 기르골이 웃으면서 창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커다란 바늘 여러 개가 목을 동시에 누르는 듯한 오싹한 느낌에 여관 주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그런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게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실제 있는지조차 모르고요. 저희 마을 사람들 다 모릅니다. 가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했지만 다들 그냥 돌아갔고…….”
“모른단 거네?”
여관 주인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르골은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곧 활짝 웃으면서 창을 거두었다. 하얗고 날카로운 창은 거두어지자마자 순식간에 또 모습을 감추어서, 여관 주인은 이자야말로 마법사가 아닌가 싶어 두려워졌다.
“마법사가 있으면 여기로 오라고 전해.”
기르골이 첫인상만큼 사람 좋게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여관 주인은 다시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기르골은 여관 주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한 번 콕 찌르고는,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휘파람 소리가 멀어지자 여관 주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쿵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 * * 공개 집무실로 가서 밤사이의 중요 보고를 받은 라틸은 이후 개인 집무실로 가서 몇 가지 다른 업무를 보다가 힐긋 시계를 확인했다. 9시 40분. 11시에는 국무회의가 있다. 라틸은 잠시 시간을 계산해 보다가, 괜찮겠다 싶어서 시종장에게 백화를 불러 달라 지시했다. 얼마 뒤 백화가 찾아오자 라틸은 그에게 며칠 전 사건에 관해 물었다.
“호수 근처를 조사하는 건 어찌 되었지?”
불려올 때부터 황제가 그 질문을 하리란 걸 예상했기에, 백화는 바로 대답했다.
“괴물이 더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괴물이 별다른 흔적을 남긴 것 같지도 않고요.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대신관님께 부적을 받아 호수 주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어두고 있습니다.”
“효과가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 괴물도 라나문 님을 습격하려다가 우리 대신관 님을 보자 바로 죽었지 않습니까.”
“대신관은 정말 강하군.”
“네. 대신관님께선 겸손하셔서 자신이 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셨지만, 대신관님 외에 누가 그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백화는 흐뭇하게 말하고서는 슬며시 라틸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이렇게 흉흉한 시기이니, 대신관님이 국서 자리에 오르면 국민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하렘에 적응을 잘하는군, 그대는.”
그 모습에 라틸이 농담 섞어 감탄하자, 백화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말을 물리진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신전은 흑마법과 몬스터가 성행하던 500년 전에는 아주 부흥했으나, 지금은 흑마법과 함께 쇠해서 영향력이 아주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의 황제가 대신관을 국서로 맞이한다면, 자연스럽게 신전도 다시 부흥할 수 있을 터. 대신관이 아예 속세와 동떨어진 생활 중이라면 모르겠으나, 이미 하렘에까지 들어온 이상 국서로 밀어 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들 만했다. 라틸은 백화의 은근한 야심과 기대를 모른 척하는 대신, 신뢰감 있어 보이도록 웃으면서 애매하게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지. 사람들은 대신관이 국서가 되면 좋아할 거야. 대신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인물이니까.”
“그럼요. 그리 훤칠하시니 인기도 좋으실 겁니다.”
“게다가 짐은 신전의 영향력이 좀 더 커져도 좋다고 생각하거든.”
“!”
“일이 커지기 전에 좀비 사태를 진정시킨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쨌든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곳이 필요하지 않나. 신전은 그 역할을 하기에 아주 좋지. 그렇지?”
백화는 체면을 차리느라 태연히 웃기만 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바지 옆선을 살짝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욕심내. 괜찮아. 야망을 키워봐. 라틸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맑게 웃었다. 시종장이 괜히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집어넣자, 라틸은 곧 국무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용건이 하나 더 있단 걸 깨달았다. 이 질문은 앞선 질문만큼 중한 건 아니었으나, 이 질문을 하기 위해 백화를 한 번 더 부르는 것도 이상하니 얼른 해치워야 했다.
“백화. 나는 황궁에서 떠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예, 폐하.”
“혹시 최근 사건들이 터지기 전부터도 인적 드문 숲 같은 데서는 좀비가 돌아다녔나?”
“예?”
“산짐승처럼?”
라틸의 질문에 백화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아무리 황궁에서 귀하게 자란 분이라지만, 좀비가 시골에만 나타날 리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무슨 연유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사오나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폐하.”
“다른 나라도?”
“예. 다른 나라도 포함해서입니다.”
“그래.”
도미스의 기억 속 칼라인과 지금의 칼라인은 머리카락 길이 외에는 별 차이가 없으니, 분명 오래전은 아닐 건데.
‘도미스는 무척 자연스럽게 좀비를 대했단 말이지.’
“좀비를 해치우는 이들을 ‘사냥꾼’이라 부른다거나?”
“금시초문입니다, 폐하.”
백화가 어리둥절해서 대답하자 라틸은 미간을 구기고서 그만 나가보라 손을 저었다. 백화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으나, 라틸은 여전히 그 생각에서 쉬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럼 도미스는 왜 그렇게 좀비를 자연스럽게 대했지? 무서워하긴 했지만 좀비의 존재에 충격을 받은 눈치는 분명 아니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라틸은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서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펜에 잉크를 묻혔다. 도미스가 외국인이고, 다른 나라 시골에는 좀비가 있을지도 모르니 하이신스에게도 이 일을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한 10년 전쯤에 너희 나라 시골에서 좀비 나왔어? 우리나라엔 안 나왔는데! 길게 쓸 내용은 아니다 싶어서, 라틸은 갈기듯이 글씨를 빠르게 적은 다음 편지지를 적어 봉투에 넣고 밀랍으로 봉했다.
“사블레 후작.”
“예, 폐하.”
“이거 하이신스 황제에게 보내요. 격의 없이 쓴 서신이니 전서조로 보내면 됩니다.”
* * * -한 10년 전쯤에 너희 나라 시골에서 좀비 나왔어? 우리나라엔 안 나왔는데! 하이신스는 인상을 구기고서, 라틸에게서 온 편지를 괜히 번쩍 들어 조명에 비춰보았다.
“폐하? 무엇을 하시는지요……?”
“숨겨진 글자가 있을 거 같은데, 싶어서.”
“예?”
하지만 위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고 촛불에 슬쩍 그슬려 봐도 편지에 써진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하이신스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뜬금없는 자랑질은? -왜 이런 걸 자랑하는 거야? 우리나라에도 옛날엔 좀비 안 나왔어. 일단 답장을 쓴 하이신스는 비서에게 이 편지를 라트라실 황제에게 전서조로 보내라 지시한 다음, 이번에는 동생인 클라인이 보내온 편지를 펼쳤다. 전서조로 바로 편지를 보낸 라트라실 황제와 달리, 클라인은 동생이면서도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서 인편을 통해 보냈기에 이런저런 포장이 잔뜩 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포장을 뜯고 나자 마침내 조막만한 클라인의 편지 한 장이 나타났다. -형님 나 정식 후궁 할 겁니다. 기 안 죽게 결혼 비용 많이 보내줘요. 보내주는 결혼 비용만큼 사랑할게요, 형님. 하이신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이 새끼는 또 뭐라는 거지? 결혼 비용? 보내주는 돈만큼 사랑한다고? 분노가 이마 끝까지 솟아오른 하이신스는 몇 번이나 연거푸 호흡을 골랐다. 진정하자. 원래 이런 녀석이다. 진정해. 하지만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와 행복해 죽겠으니 돈이나 많이 보내라는 동생은 생각하면 할수록 열불이 터지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이신스는 이번에도 빠르게 편지를 끄적여 적은 다음 다른 비서를 불러 서신을 내밀었다.
“이건 전서조로 클라인에게 보내라.”
“황자님께서는 인편으로 보내셨는데…….”
“욕밖에 안 썼으니 전서조로 보내.”
“아……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