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안 찾는 게 좋을 텐데2021.06.27.
기르골은 틀라가 지금까지 본 모든 사람과 사람 외 존재들을 통틀어서 제일 미친 것 같았다. 그렇게 애절하고 가슴 아프게 사죄를 하고 싹싹 빌면서 흐느끼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웃고는 있지만, 눈동자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으나, 눈에 이성이라곤 1g도 남아 있지 않으리란 게 여기서도 느껴졌다.
“저건…… 저건 대체 뭐냐.”
틀라가 여우 가면을 돌아보자, 여우 가면은 ‘계속 말씀드렸는데요’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배신자입니다. 아주 악질적인 배신자죠.”
토끼 가면도 곁에서 말을 섞었다.
“이미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정신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는 교활하게 연기도 하고요. 저놈이 입으로 뱉는 말 열 개 중 아홉 개는 거짓말이라 보면 됩니다.”
“열 번 중 한 번은 진실을 말하기도 하나?”
“죽일 거란 예고는 대개 진실이었죠.”
죽인단 말 외엔 다 거짓말이란 건가. 틀라는 복도를 급히 걸어가다 말고 너무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여우 가면을 돌아보자 그가 틀라를 빤히 보고 있다가 당부했다.
“저는 이제부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봐야 해서 좀 바쁩니다. 전만큼 챙겨드리기 힘들 것 같군요. 제가 곁에 없더라도 로드, 명심하세요. 절대로 성 밖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한 번 더 덧붙이는 여우 가면은 신중했다. 그 어투는 평소의 장난치는 기색이 없어서, 틀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 하얀 머리가 쾅쾅쾅쾅 문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 * * 클라인이 하이신스에 대한 생각을 잠시라도 미뤄서 다행이야. 하지만 얼결에 머리카락이 뽑히면서 잊어버린 건 아닐까. 조용히 혼자 생각하다가 다시 하이신스 생각이 나서 또 침울해지는 건 아닐까. 집무실로 돌아온 라틸은 업무 중간중간 이 걱정을 했다. 식사를 할 때도 그랬고, 잠자리에 들 때도 그랬다. 이 때문에 라틸은 자신이 하이신스가 나오는 악몽을 꿀까 봐 설핏 잠들어가는 와중에 조금 염려했다. 그런데…….
‘왜 또 도미스 꿈이냐.’
정신이 들어 보니 이곳은 다시 숲이었고 또 감각만 남은 그 상태였다. 게다가 도미스는 ‘방해가 된다’는 말에 결국 칼라인에게 업히기로 한 건지, 주춤주춤 그에게 몸을 기대려는 상황. 누군가에게 업히는 게 영 어색한지 도미스는 칼라인의 등에 제대로 업히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결국 새끼 원숭이처럼 자세를 잡았다. 칼라인이 번쩍 들어 올렸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쿵쿵쿵쿵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서 얼마나 이동했을까. 이거 자세가 영 불편하지 않나, 싶을 즈음 도미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하얀 머리 은인께선 기르골 씨라는 걸 알겠는데요. 지금 업어, 아니, 금발 은인께선 성함이…….”
“칼라인.”
무뚝뚝한 칼라인의 목소리에 도미스가 ‘칼라인’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도미스와 감각을 공유하는 라틸에게조차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더니 그녀는 자신도 이름을 말해주어야 한단 생각이 들었던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슬그머니 물었다.
“저기, 제 이름도 알려 드릴까요?”
‘이름을 알려줄지 묻기 전에 그냥 이름을 말해버리지.’
라틸은 속으로 탄식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칼라인의 기억 속 모습으로 변해간 걸까, 아니면 원래 칼라인의 기억 속 모습이었는데 양부모에게 버림받은 직후라 의기소침해진 걸까?
“필요 없다.”
이 와중에 칼라인은 라틸이 지금 보는 모습보다 훨씬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어서, 참 말하는 게 못됐다 싶을 정도였다. 도미스를 두 번이나 구해준 데다 초면에 업어주기까지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배려심은 있는 것 같지만.
“그러네요. 전 곧 좀비가 될 거니까요…… 이름을 알면 대하기 어렵겠지요.”
기가 죽은 도미스는 목소리가 점점 내려앉았고, 라틸도 덩달아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게다가 도미스의 이 의기소침해진 마음은 칼라인이 예상하지 못한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자 안 그래도 불편했던 업힌 자세가 더욱 불편해진 건지, 도미스가 계속 꿈지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목……을 잡으면 뒤에서 목을 조르는 것 같나? 아직 난 좀비가 아닌데. 좀비가 돼서 목을 조른다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어깨를 잡는 건 너무…… 업히는 게 아니라 기대는 것 같잖아. 싫어할지도 몰라. 이 사람은 날 싫어하는 거 같은데.]
도미스의 손이 칼라인의 목과 어깨를 계속 옮겨 다니며 정신없이 굴자, 앞만 보고 걸어가던 칼라인도 결국 신경이 쓰였는지 차갑게 말했다.
“한 군데를 정해서 잡아.”
“아. 미안해요.”
황급히 사과한 도미스가 칼라인의 목을 기둥처럼 붙잡자, 본인이 걱정하던 대로 딱 목을 뒤에서 조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를 본 기르골은 대번에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웃기는 아가씨네. 뒤에서 목은 왜 조르는 거야?”
“죄송해요.”
황급히 목에서 손을 뗀 도미스가 휘청이자, 칼라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서 무릎을 굽혔다.
“내려.”
도미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얼른 내려왔다. 라틸이 의식할 정도로 얼굴에 열기가 잔뜩 올라 있는 걸 보니 몹시 부끄러운 눈치였다. 민망한지 도미스는 내려선 거로도 모자라 앞서가기 위해 황급히 칼라인을 지나 절뚝거리면서 걸어갔다.
‘아파, 도미스! 그냥 저 하얀 머리한테 업어달라 해!’
덩달아 발목이 아파진 라틸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도미스는 꿋꿋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몸이 붕 떠올랐다. 놀란 도미스의 눈에 칼라인의 턱이 들어왔다. 그가 도미스를 앞으로 안아 든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이게 낫겠군.”
칼라인이 중얼거리고서 다시 걸어가자, 도미스는 이번에도 손 위치를 잡지 못해 허우적거리다가 배꼽 인사를 하듯 양손을 공손히 제 배 위에 올려두었다. 그걸 본 칼라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정말 잘생긴 남자야.]
그 미소를 본 도미스가 넋이 나가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발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도미스의 신발이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도미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고 다시 얼굴 쪽으로 열기가 확 올라왔다. 하지만 다행히 기르골이 나서서 신발을 주워주며 일은 바로 해결되었다.
“나는 칼라인보다 연약하니 신발을 업고 갈게, 아가씨.”
반 정도만. 하얀 코트를 입은 기르골이 진흙과 숯가루가 묻어 더러운 신발을 야무지게 챙기다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도미스는 속으로 재차 비명을 질렀다. * * * 잠에서 깨어난 라틸은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도미스가 칼라인 얼굴에 반한 거 같아.’
말하는 게 못됐긴 하지만 라틸은 도미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칼라인은 두 번이나 도미스를 구해준 데다가 얼굴 역시 자극적으로 아름다우니까. 라틸은 도미스가 칼라인에게 안긴 채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머리 한쪽만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음영져 있던 그 얼굴을 떠올리고서 괜히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도미스가 좀비로 변하지 않은 게 이상했지만, 그래도 처음 꿈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얼마나 괴롭고 힘들어했던가. 그 경험을 같이 느끼다가, 좀 안정적인 꿈을 꾸고 있으니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라틸은 이불로 온몸을 똘똘 싸매고 침대에서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 나와 욕실로 걸어갔다. 욕실 앞에서 이불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한 다음 세면대를 보자, 내내 도미스 꿈을 꿔서인가. 어쩐지 자신이 좀 그녀와 닮은 기분도 들었다. 머리색이며 눈 색, 이목구비까지 다 다른데도.
‘도미스는 죽은 게 확실한데. 기르골이란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됐지? 셋이 친해졌는데 칼라인이랑 도미스가 연애했나? 셋이 친하다 둘이 그러면 남은 하나는 좀 위치가 애매해질 것 같긴 해. 그래서 떨어졌나?’
장난이 좀 심한 사람 같지만, 그 새하얀 옷을 입고서도 더러운 신발을 잘 챙겨주는 걸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얼굴 물기를 닦고 나온 라틸이 종을 울리자, 응접실에 있던 시녀들이 들어와 얼굴에 크림을 발라주고 입을 옷을 골라주었다. 편하게 옷을 다 입은 후. 라틸은 마지막 단추가 채워지는 걸 보면서, 그 기르골이란 남자를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칼라인은 아직 도미스가 죽은 충격에 힘들어하던데. 옛 친구인 기르골을 데려와 주면 상처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 * 여관 주인은 세찬 빗소리를 듣고 들창을 열어보았다.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혀를 찬 주인은 들창을 다시 내리며 가장 덩치 좋은 직원을 불러 우산 두 개를 건넸다.
“손님 중 하나가 근처 호수에 목욕하러 간다더니 아직도 안 왔다.”
“호수요? 거긴 수심이 깊잖아요?”
직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자 여관 주인은 “그러니까.” 하고 혀를 찼다.
“이렇게 비가 거센데 아직도 안 오고 있으니 좀 걱정이 되네. 호숫가에 가보고, 위험하니 그만 돌아오라고 해라. 안 돌아온다 해도 우산은 주고.”
“네.”
직원은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 옆에 내려두고서 우산 두 개를 들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우산 하나는 쓰고 다른 우산 하나는 손에 쥐고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자, 목표한 호수가 나타났다. 이 호수는 지역의 명물까지는 아니지만 햇살이 비칠 때 유달리 눈부시게 반짝이는 곳이어서, 여관 주인은 오래 머무는 손님이 찾아오면 늘 이 호수를 구경하러 가보라 추천하곤 했다. 그런데 손님이 그곳에 가서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여관 주인으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호숫가에는 그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직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워낙 눈에 띄는 외양의 손님이어서, 직원은 이미 그 손님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손님은 보이지 않고, 대신 호숫가에 잘 접어놓은 하얀 코트와 옷자락만 보였다.
‘설마! 이 날씨에 물에 들어갔다고? 아니, 들어갔다가 빠진 거 아냐?’
기겁한 직원은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세차게 내리는 비로 호수 물살이 거세진지라 사람이 빠졌는지 아닌지도 알기 힘들었다. 직원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다가 호수 끄트머리에 있는 폭포에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너무 거세게 떨어져서 다들 구경만 하고 가는 그 폭포. 그 폭포 중앙에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근처로 가서 보니 그 하얀 머리 손님이 맞았다. 그 손님이 벌거벗은 채 폭포 가운데에 서서, 놀랍게도 얼굴을 위쪽으로 하고 있었다. 저렇게 하면 코가 부러지지 않나? 보는 직원이 무서울 정도였으나, 손님은 코가 부러지기는커녕 표정조차 평온했다.
“저기요! 저기요!”
어쨌든 저기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알기 힘들 듯해서, 직원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손님을 열심히 불렀다. 그래도 손님이 이쪽을 쳐다도 보지 않자 직원은 목이 아파서 손을 내렸다. 그 순간. 손님이 여전히 고개를 위로 한 채, 눈을 반쯤 뜨더니 이쪽을 쳐다보았다. 다행이다 싶어서 직원은 그쪽으로 좀 더 다가가려다가, 그 손님의 흰자위가 새빨간 걸 발견하고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입을 열기도 전에 직원은 자신이 폭포 가운데 함께 들어와 있단 걸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