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2021.06.20.
라틸이 다른 방편으로 보낸 진범 습격자를 무사히 받아낸 하이신스는, 다가 공작이 준비한 대리 공사의 죽음을 역으로 이용했다. 다가 공작이 하이신스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 먼저 클라인 황자를 죽이라 지시를 했고, 그 과정에서 대리 공사가 휩쓸렸다는 것을 실토하게 만든 것이다. 비록 반쪽짜리 진실이었지만. 습격자는 입을 열지 않으려 했지만, 원래 그가 타고 왔어야 하는 죄인 수송용 마차에 탄 ‘가짜 습격자’가 다가 공작이 보낸 강도에게 당해 죽었단 이야기를 듣자 마음을 바꾸어서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폐하게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시는군요. 신원도 불분명한 저런 자의 말을 어찌 다 믿으십니까.”
다가 공작은 회의 도중 사람들 앞에서 공격을 받았지만, 노련하게 대처하며 하이신스의 말을 흘려 넘기려 했다. 하지만 하이신스는 타리움의 사절단이 데려온 가짜 죄인이 살해당한 일을 내세우며, 누군가 계략을 꾸민 사람이 있으니 진범이 조사받기 전에 미리 죽이려 한 게 아니겠냐 빈정거렸다. 다가 공작의 말처럼 범인 한 명의 증언만으로는 다가 공작의 암살 지시를 밝혀낼 수 없었으나, 하이신스 역시 이 사건으로 그 정도 효과를 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공작이 또 누구에게 내 암살을 사주할지 몰라 걱정되는군. 아, 물론 공작의 말처럼 오해일 수도 있지. 어쨌든 오해가 풀릴 때까지는 황후와 거리를 좀 두고 지내야겠네. 당분간 황후는 수도 근처에 있는 가장 가까운 별궁에서 지내는 거로 하지.”
우선은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이 일에 왜 황후 폐하를 거론하시는 겁니까.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어쩔 수 없지 않나. 나와도 가깝고 그대와도 가까운 이가 황후뿐이니.”
* * * 온종일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라틸은 도미스의 과거가 나오는 악몽을 꾸진 않았지만, 피로해져서 눈이 퀭해졌다. 눈치를 보는 건지 어제부터 내내 조용하던 서넛이 참지 못하고 권유할 정도였다.
“오늘 하루는 휴회하고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색이 나쁩니다.”
“괜찮습니다.”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책상 앞에 앉았으나, 30분가량 펜만 손안에서 돌리다가 결국 펜을 툭 내려놓고 서넛을 돌아보았다.
“서넛 경.”
“예.”
“아직 후궁들이 점심을 먹을 때 안 됐죠?”
“아마 아닐 겁니다. 일찍 먹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책상에 달린 벨을 연거푸 눌렀다. 시종 하나가 얼른 뛰어 들어오자 라틸은 펜으로 시종을 가리키면서 지시했다.
“너는 지금 당장 하렘으로 가서.”
“예.”
“조리실 앞에 서 있어라.”
시종은 두 손을 모으고서 라틸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난데없이 조리실 앞에 서 있으라 지시하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리실…… 말씀이십니까.”
“그래. 조리실. 거기 가서 클라인 방에 음식을 가져갈 하인이 오거든, 술병도 같이 가져가게 해. 한 두 병 정도.”
시종은 더욱 혼란스러워진 눈치였다. 라틸은 이마를 긁었다. 앞뒤 생략하고 들으니, 자신이 말해도 좀 이상한 명령 같기는 해서. 라틸이 클라인에게 술을 가져다주라고 한 이유는, 사람은 보통 속이 상하면 술을 마시고, 클라인도 술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클라인은 술을 마시면 라틸에게 속마음을 죄다 들켰다. 그러니 라틸은 우선 클라인을 술에 조금 취하게 한 다음, 속마음을 들으면서 사과를 해볼 계획이었다.
“얼른 가.”
하지만 이건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인지라, 라틸은 손을 휘휘 저어서 시종을 얼른 내보냈다.
“이봐.”
“예, 폐하.”
“융통성 있게 처리하되, 내가 시켰단 건 들키지 말거라.”
“예.”
* * * 라틸의 명령을 받은 시종은 값비싼 술병을 여럿 챙긴 다음 곧장 하렘 담당자를 찾아가서, 귀한 술들이 진상되었으니 후궁들에게 두세 병씩 나누어 주라 말한 다음 술병을 다 건네고 자리를 비켰다. 하렘 담당자는 조리실로 찾아갔고, 45분 정도가 지나지 음식을 가지러 온 하인들은 각자 수레에 술을 두세 병씩 가지고서 자리를 떠났다. 클라인의 방 안까지 무사히 술병이 전달되는 걸 확인한 시종은 뿌듯하게 웃으며 얼른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가 임무 완수를 보고했다.
“잘했다.”
시종이 나가자 라틸은 30분 정도 일에 몰두해 있다가, 딱 30분이 지나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클라인한테. 술이 약하니, 마셨으면 취했을 거다.”
‘안 취했으면 다시 돌아와야겠지만.’
다행히 라틸의 예상이 맞아서, 클라인은 이미 술을 한 병 다 마시고 취해 있었다. 라틸은 ‘제발 우리 황자님 좀 살려주세요’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바닐에게 나가라 손짓하고서, 문을 닫은 다음 탁자 앞에 우두커니 앉은 클라인 곁으로 다가갔다. 클라인은 그래도 꼬박꼬박 술을 잔에 따라서 마시고 있었는데, 라틸이 나타나자, 이게 취해서 보는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듯 눈을 마구 비벼댔다.
“눈 다친다. 그러지 마라.”
라틸이 손을 뻗어 말리자 클라인은 그제야 눈앞에 선 이가 실제 황제란 걸 알아본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소매에 잔이 스쳐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졌으나, 라틸과 클라인 모두 그 방향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라틸은 클라인의 속마음을 읽기 위해 온 정신을 다해 그를 바라보았다. 속마음이 집중한다고 읽어지는 게 아니긴 했지만. 하지만 클라인이 상처를 받더니 마음이 굳건해진 건지, 아니면 속마음 읽는 능력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긴. 클라인이 내게 마구 따져댈 때도 소리가 안 들렸지.’
아쉽지만 그래도 온 김에 사과라도 하고 갈까, 라틸은 입술을 열었다. 그 순간.
[얼굴도 보기 싫어.]
입을 꾹 닫은 클라인에게서 속마음이 들려왔다.
[나가.]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아직 화가 많이 났구나. 나가라니 나가자. 얼굴도 보기 싫다는데 계속 사과하면 더 화가 날지도 몰라.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겠지.
‘나중에 오면 조금이라도 풀려 있겠지.’
어쨌든 이 정도라도 됐다 싶어서,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돌아섰다. 하지만 라틸이 두 걸음을 옮기자마자 뒤에서 또다시 클라인이 속으로 외쳤다.
[진짜 나가면 어떡해!]
……가란 뜻이 아니었나? 라틸은 미간을 좁히고서 슬쩍 몸을 도로 돌렸다. 아까는 홧김에 한 말이고, 역시 사과를…….
[얼굴 마주하고 있기도 싫은데 왜 자꾸 오는 거야?]
아닌가. 몸을 다 돌리기도 전에 쏟아진 냉랭한 말에, 라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리고서 다시 뒤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라틸이 문고리를 잡자마자 뒤에서 또 정반대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저거 봐. 달래지도 않고 그냥 가시는 거 봐. 나한테 마음이 없으니 저러는 거지. 형님이 이러고 있어 봐. 절대로 그냥 안 가실 텐데.]
“…….”
장난하는 건 아니겠지? 속마음이니까? 라틸은 클라인이 듣지 못하도록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문고리에서 손을 내렸다. 그러고서 몸을 돌리자, 클라인이 눈가가 그렁그렁해져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클라인.”
조금 성질이 났지만, 클라인은 지금 몹시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속으로 되짚어 생각한 라틸은 표정을 펴고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라틸이 세 걸음 클라인에게 다가가자, 클라인이 또 외쳤다.
[얼굴도 보기 싫어! 이름도 부르지 마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아예 홱 몸을 돌리기까지 했다. 라틸은 걸어가다 말고 애매하게 멈춰 섰다가, 세 번째로 돌아서며 다짐했다. 속마음이 또 바뀌어도 이번엔 안 돌아오고 진짜 나가버릴 거라고. 아무래도 지금은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한 듯하니,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을 주었다가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운데 그래도 마주 보고 있으면 좋으니까.]
문고리를 잡는 순간 들려온 마지막 속마음이 아니었더라면, 클라인이 뭐라고 생각하건 라틸은 분명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라틸은 나갈 수가 없었다. 어제 그렇게 충격받아 도망가 놓고서는. 얼굴을 마주하면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어떻게 여기서 내버려두고 간단 말인가. 라틸이 돌아서자 클라인이 또 얼굴을 안 보고 싶다며 속으로 외쳐댔으나, 라틸은 바로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내 고래고래 속으로 외쳐대던 클라인은 라틸이 다가올 때마다 점점 생각에 힘이 빠지더니, 코앞에 다가와 서자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라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클라인.”
“……그렇게 부르셔도 화 안 풀 겁니다. 물론 폐하께선 제가 화를 풀건 말건 신경도 안 쓰시겠지만요.”
[그렇게 부르셔도 화 안 풀 겁니다. 물론 폐하께선 제가 화를 풀건 말건 신경도 안 쓰시겠지만요.]
“클라인.”
겉과 속이 완벽히 일치하는 클라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라틸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클라인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라틸의 발끝만 쳐다볼 뿐. 라틸의 두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쥐자 클라인은 내렸던 눈꺼풀을 그제야 천천히 들어올려 라틸을 마주 바라보았다. 여전히 해일이 거센 파란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으나 그는 뒤로 물러서지도 라틸을 밀어내지도 인상을 구기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한없이 라틸을 바라보기만 했다.
“클라인. 나 좀 봐라.”
그 시선은 평소의 감정적인 클라인답지 않아서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었으나, 라틸은 그가 ‘얼굴을 보면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 걸 믿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덩달아 속삭였다. 그 소리에 클라인이 잠시 이마를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가 도로 눈을 떴다.
“클라인. 나한테 화가 났느냐?”
“네.”
“날 떠나고 싶으냐?”
“네.”
“나한테 실망했어?”
“네.”
“그럼 이제 내가 싫으냐?”
“싫지 않아서 더욱 화가 납니다.”
서로를 빤히 쳐다보기를 얼마나 했을까. 슬슬 팔이 아파와서 손을 내려야겠다 싶어서 라틸은 슬그머니 클라인의 손에서 뺨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내리기 전. 클라인이 라틸의 손을 겹쳐 잡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라틸의 손바닥에 무겁게 입맞춤을 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입술을 대고서 한숨을 뱉은 걸지도 몰랐다. 라틸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클라인인 라틸의 손을 놓아주면서 물었다.
“절 품지 않으시는 건 제가 형님의 대타이기 때문입니까?”
“대타가 아니라는데도.”
이건 진심이었다. 하이신스를 엿 먹이기 위해 데려온 거지, 하이신스를 대신하기 위해 클라인을 데려온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클라인이 왔을 때 가장 놀란 사람 역시 라틸이었고. 그러나 클라인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표정을 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라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 안에 밀어 넣고 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제가 형님의 대타가 아니라는 증거를요.”
라틸은 그의 넓은 가슴에 뺨을 기댄 채 물었다.
“어떤 증거를 원하는데?”
“품어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