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문 열어2021.06.16.
한달음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간 클라인은 정말로 옷장 문을 발칵 열더니 옷을 마구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서랍장 안 깊숙이 넣어 두었던 커다란 여행 가방도 죄다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 전부 뚜껑을 열어 방금 꺼낸 옷을 쌓듯이 던져넣었다. 구두며 자주 사용하던 물건들까지 가방에 꾸역꾸역 넣고 있으려니, 바닐이 방 안으로 달려와 클라인의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황자님, 진정하세요! 황자님!”
“놔! 가라면 못 갈 줄 알아? 갈 거야! 갈 거라고!”
“하이신스 폐하께서 왜 갑자기 왔냐고 물으시면, 그럼 뭐라 대답하시려고요!”
“사실대로 말할 거다. 형님한텐 화가 안 난 줄 알아?”
후궁으로 오기 전. 하이신스가 ‘라트라실 황제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라’라고 경고한 게 새삼 떠올라서 클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나고 부끄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무도 없는 산에 들어가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고정하십시오, 황자님.”
악시안이 뒤따라 들려와 말렸지만 그래도 클라인은 멈추지 않고 짐을 계속해서 싸댔다. 저렇게 짐을 싸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데…… 이를 지켜보는 바닐은 발을 굴렀지만, 평소 이상으로 이성을 잃은 클라인을 말릴 수가 없었다.
“황자님.”
하지만 악시안은 바닐과 달랐다. 그는 가만히 서서 클라인의 행동을 지켜보더니, 클라인이 방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또 가져갈 물건을 찾는 사이, 틈을 놓치지 않고 성큼 걸어가 그를 붙잡았다.
“진정하셔야 합니다.”
“놔라.”
“좀비가 나타났습니다. 흑마법사들도 숨어 있을 겁니다. 카리센과 타리움은 그 일에 관해 협력하는 체제로 갈 거고요.”
“어쩌란 말이냐! 내가 협력하지 말래? 어차피 난 임시 후궁이다. 이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황자님이 마음대로 돌아가 버리면 두 나라 사이가 불편해질 겁니다.”
악시안의 음성은 고저가 없어서, 오히려 더욱 침착하고 무정하게 들렸다. 클라인은 악시안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서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두 황제 사이에서 놀아난 내 자존심은?”
“황자님은 소중한 분이시지만 그래도 나라가 우선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 있다. 특히 안 그래도 상처받아 흥분한 사람에게는. 바닐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입을 가리고 악시안을 보았다. 클라인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눈 깜짝할 사이, 탕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가방 하나가 벽으로 날아갔고, 또 다른 가방 하나가 악시안에게 날아갔다.
“나가!”
클라인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바닐은 우두커니 서 있는 악시안의 허리를 잡고서 뒤로 질질 끌어냈다. 클라인이 떠나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악시안은 순순히 바닐을 따라 나왔다. 중간방을 지나 복도로 나오자 문앞에 선 경비병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악시안의 이마를 보았다.
“악시안 경, 피가…….”
악시안은 손을 들어 이마를 더듬더니 태연히 소맷자락으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커다랗고 단단한 여행 가방을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 이마가 조금 찢어진 것이다.
“그냥 좀 피하시지.”
바닐이 손수건을 주며 혀를 차자 악시안은 그걸 받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화가 조금이라도 풀리시라고.”
“우리 황자님이 사람 때리면서 화 푸는 미친 사람인 줄 아십니까?”
악시안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가 클라인을 너무 들쑤신 것도 화가 났기에 바닐은 이번에는 쓴소리를 뱉고서 다시 방 안으로 혼자 들어가 버렸다. 바닐이 안쪽에서 문까지 철컥 잠가 버리자 경비병이 쩔쩔매면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아…… 그건 당연한…….”
“그럼 됐군.”
태연히 말한 악시안이 다른 쪽으로 걸어가자, 경비병은 혀를 차면서 그 뒷모습을 한 번, 굳게 닫힌 문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 * * 라틸은 바위에 앉은 채 우두커니 정면만 바라보았다. 울분을 토해내듯 말하다가 확 돌아서던 클라인의 눈빛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라벤더 꽃다발을 들고 선 기사 역시, 갑자기 알게 된 생뚱맞은 정보와 싸움에 이래저래 심란하긴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카리센 황제와 사귀었던 걸 몰랐는데, 이번 말다툼을 들으면서 덩달아 알게 되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내가 너무한 것 같으냐.”
황제의 무거운 목소리에 기사가 퍼뜩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네 주군이 내가 아니라 클라인 황자였더라도, 그렇게 대답을 할 거냐?”
“그건…… 당연합니다.”
기사는 그 대답을 하기 전 잠시 망설였다. 아마 저 망설임이 진짜 대답이겠지.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지.”
“꽃은…….”
“네가 가져라.”
* * * 여우 가면이 어디 지도인지 모를 지도를 펼쳐 놓고서 여기저기 체크하는 사이, 틀라는 옥좌에 앉아 검을 쓱쓱 닦으면서 여우 가면을 계속 힐긋거렸다. 다행히 전의 그 무례한 언동 이후, 여우 가면은 다시 그런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물론 여전히 능글맞고 시건방진 구석은 있었으나 그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일관적으로 그랬기에, 갑자기 변했다고 따지기도 애매했다.
“자꾸 절 쳐다보시는 걸 보니 제게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건방진 소리.”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로드께 관심이 많으니까요.”
“…….”
여우 가면이 이쪽을 쳐다보며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꼬리를 히죽 올리자, 틀라는 고개를 빠르게 돌리고서 다시 검을 닦는 척 손만 바삐 움직였다. 그런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미묘한 평화가 계속되는 도중. 복도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문이 쾅 열리면서 토끼 가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
이젠 저 토끼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싶어서 틀라는 목소리를 차갑게 낮추었다. 그런데 토끼 가면의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기르골이 여길 찾아냈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초조하고 긴장한 목소리에 틀라는 닦던 검을 내려놓고 여우 가면을 쳐다보았다. 여우 가면 역시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와 있었다. 여우 가면이 펜을 내려놓지도 않고서 벌떡 일어나 복도로 나가자, 틀라는 자신도 검을 검집에 꽂고서 얼른 뒤를 따라갔다. 가장 앞서가는 토끼 가면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틀라는 여우 가면에게 질문했다.
“기르골이 전에 네가 말한 그 대적자인가?”
“예.”
여우 가면의 심각한 목소리에 틀라는 미묘한 희망에 들떴다. 그는 여우 가면과 토끼 가면이 이런 식으로 진지해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동생이 보낸 이들이 좀비떼를 무찔렀을 때조차도.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불안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르골이란 자를 이쪽에서 이용할 수는 없을까? 손을 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만약 내가 로드가 아니라면 가능할지도. 그자는 계속 환생하는 로드를 쫓아다니며 죽이려 한다 했으니.’
틀라가 생각하는 사이에 세 사람은 망루 앞에 도착했고, 토끼 가면을 시작으로 차례로 계단을 올라갔다.
‘무슨 소리지?’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수록 ‘쾅 쾅 쾅 쾅!’ 뭔가를 거세게 두들기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누군가 거대한 망치로 문과 성벽을 마구 부숴대는 듯한 소리가.
“!”
돌계단의 모서리 부분, 이미 약간 깨어져 있던 부분이 바스스 아래로 흘러내리는 걸 발견한 틀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흔들리고 있어?’
단순히 소리만 커다란 게 아니라 실제로 미약하게나마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조금 부서진 부분이라 하더라도,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있는 계단의 돌조각이 혼자 굴러갈 리는 없지 않은가.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서자 틀라는 바로 망루 난간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문 앞. 새하얀 옷을 입은 백발의 남자가 발로 문을 미친 듯이 걷어차 대고 있었다. 문을 부술 듯 ‘쾅 쾅!’ 차대는 수준을 넘어서서,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쾅쾅쾅쾅!’ 차대는 발짓은 보고 있기 두려울 정도였다. ‘기르골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발짓을 보자마자 쏙 사라졌다. 저 몸놀림만으로도 감이 왔다. 이용하고 뭐고 할 상대가 아니라는 게. 아니, 말이 통하긴 할 상대일까? 제정신인 사람은 절대로 저렇게 자기 발을 망치처럼 사용하지 않을 텐데?
“여전하네요.”
여우 가면이 작게 혀를 차자 토끼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고, 틀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하다는 건…… 원래 저런 놈이란 건가. 그 순간. 이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하얀 머리 남자가 돌연 머리를 확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눈이 마주친 틀라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거기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는 다시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머리 남자는 여전히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틀라와 눈이 마주치자 두 팔을 벌리더니 활짝 웃으며 외쳤다.
“내가 왔어 도미스!”
발길질하던 걸 멈추고 그러고 있으니 남자의 얼굴이 새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아까 귀신에 홀린 것처럼 발길질을 해댄 뱀파이어답지 않게 제법 멀끔한 인상이었다. 여우 가면이 ‘얼굴은 잘났죠.’라고 설명했던 것처럼 정말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양이었는데, 긴 코트와 머리카락이 모두 하얘서일까. 어딘가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어 보였다.
“도미스, 정말 미안해. 내가 절대로, 절대로 널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도미스.”
그때. 갑자기 하얀 머리의 남자, 기르골이 팔을 여전히 들어 올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없던 동정심까지 쥐어짜 낼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기르골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내가 일부러 널 죽게 한 게 아니야, 도미스. 너는 알지? 너는 알 거야. 모른다면 알게 해줄게. 미안해 도미스. 알잖아. 나는 절대로 널 다치게 하지 않아. 응? 모르겠어?”
“…….”
“아직 각성하지 못했지?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지켜줄게.”
신뢰감 가득한 목소리로 기르골이 서글프게 흐느끼자, 틀라는 움찔해서 여우 가면을 향해 속삭였다.
“무슨 오해가 있던 거 아닌가. 전생의 로드를 죽인 사람 같진 않은데.”
“넘어가지 마시지요.”
하지만 여우 가면은 한두 번 저 꼴을 본 게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여우 가면에게 듣던 것만큼 악해 보이진 않는데…… 게다가 저렇게 절절하게 서글피 울다니. 본인 말마따나 뭔가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 틀라는 음흉한 여우 가면이 혹시 자신이 기르골을 못 만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그 순간. 갑자기 팔을 내린 기르골이 아까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문을 쾅 걷어찼다. 난데없는 행동 변화에 틀라는 놀라서 굳어버렸다. 그런 틀라를 향해 기르골이 다시 활짝 웃으면서 명령했다.
“문 열어. 또 죽여버리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