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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제 형님의 첫사랑이 폐하이십니까? (135/367)

135화. 제 형님의 첫사랑이 폐하이십니까?2021.06.13.

라틸은 클라인을 발견하고서 멈추어 섰다. 마침 그에게 가던 길이었다. 손에는 클라인에게 주기 위해 온실에서 가져오게 한 라벤더가 한 묶음 들려 있었다. 라틸은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으나 마주 걸어오는 클라인의 표정이 좋지 못한 걸 발견하고서 반쯤 들어 올렸던 라벤더를 도로 내려야 했다.

16551102182295.jpg“클라인. 표정이 안 좋은데.”

라틸이 걱정스럽게 묻자 클라인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누가 보아도 안 좋은 일이 있던 표정이라 라틸은 라벤더를 들지 않은 손을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대보았다.

16551102182295.jpg“열은 없는데.”

라틸은 그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면서 손을 내렸다. 누구보다도 감정에 솔직한 클라인이 저러고 있으니 영 신경이 쓰였다.

16551102182305.jpg“폐하이셨습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질문이었다. 라틸은 그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한 번에 파악하지 못했다. 난데없이 ‘폐하이셨습니까’라니.

16551102182295.jpg“뭐가?”

클라인의 눈길이 잠시 라틸이 든 라벤더 다발로 향했다. 그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16551102182295.jpg“꺼내놓고 후회할 말이라면 하지 마.”

그 망설임을 지켜보다가 라틸은 진심으로 충고했다. 대부분의 말은, 할까 말까 망설여진다면 하지 않는 게 나으니까. 하지 않은 말이라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지만, 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클라인은 그 말에 더욱 자극을 받은 게 분명했다.

16551102182305.jpg“제 형님의 첫사랑이 폐하이십니까?”

라틸의 말이 끝나자마자 클라인이 뒤쫓듯 물었다. 라틸은 예상치 못한 습격에 입을 다물었다.

16551102182305.jpg“두 분이 사귀었던 겁니까, 아니면 형님이 일방적으로 짝사랑했던 겁니까.”

클라인이 하이신스의 첫사랑에 관심을 가진 건 알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할 거라 여겼다. 라틸과 하이신스가 사귀었단 걸 아는 이들은 아주 소수였고, 그 소수 모두 클라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할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16551102182295.jpg‘어떻게 알아낸 거지?’

물론 지금 중요한 건 클라인이 어떻게 진실을 알았느냐가 아니긴 했다. 라틸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클라인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 놓길 반복했다. 라틸은 부정과 긍정 두 개의 선택지 앞에서 덩달아 간이 말라왔다. 긍정을 하면 클라인의 속이 몹시 상할 텐데. 부정하자니, 클라인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미 확신을 하고서 온 건데 애매하게 부정을 했다가는, 긍정하는 이상으로 상처를 줄지도 몰랐다. 라틸은 자신이 하이신스와는 별개로, 이미 클라인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있단 걸 인정해야 했다. 그 감정은 하이신스를 향한 그 맹목적이고 열렬했던 사랑과는 달랐다. 아니, 사랑이라 하기도 애매한, 아직 형태조차 잡히지 않은 그런 덩어리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라틸은 클라인이 덜 상처받길 원했다. 지금 와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16551102182295.jpg“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나.”

어쨌든 상대가 대답을 원하니 해주어야 했다. 라틸의 말에 클라인의 눈썹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16551102182305.jpg“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고요?”

16551102182295.jpg“사귀었건 짝사랑을 했건, 하이신스는 다른 아내를 맞이했고 너는 내게 왔다. 지금 와서 과거에 내가 하이신스와 어떤 사이였는지가 무슨 상관이지?”

라틸은 자신의 말이 억지란 걸 알지만 그래도 일단 우기고 봤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클라인은 넘어가지 않았다.

16551102182305.jpg“상관이 없다면 형님이나 폐하나 제게 그 이야기를 먼저 했겠지요.”

16551102182295.jpg“말할 필요 없었을 뿐이다.”

16551102182305.jpg“형님과 연인 사이였다면 폐하께선 제가 오자마자 돌려보내셨어야 했습니다.”

16551102182295.jpg“내가 왜?”

클라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들고 오는 내내 좋기만 하던 라벤더 향이 독하게 느껴져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16551102182295.jpg“난 카리센에서 보낸 후궁이 필요했고. 하이신스와 내가 사랑을 했건 짝사랑을 했건 거기엔 어떤 결실도 없었다. 내가 하이신스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동생인 네가 후궁으로 왔다고 해서 왜 돌려보내야 한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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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틸이 피로하다는 듯 하나하나 말을 내뱉을 때마다 클라인은 더욱 충격에 젖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가 금이 가고 있단 게 보였지만 라틸은 이 상황에서 그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하이신스와 연인이었다 한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비공식적인 일이었는데. 결혼해서 황후까지 둔 남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전 애인의 남동생은 후궁으로 둘 수 없단 발표라도 해야 했을까? 그때 라틸은 이유 없이 클라인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건 카리센 황실에 대한 모욕일 테니.

16551102182295.jpg‘그렇다고 솔직하게 하이신스를 엿 먹이고 싶어서 후궁을 보내라 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 말을 했다가는 클라인이 무너질 게 눈앞에 이렇게 선한데. 하지만 라틸의 생각과 달리 클라인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카리센에서 보낸 후궁이 필요했다’는 말 때문에. 클라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와들거리며 물었다.

16551102182305.jpg“절 데려온 이유가…… 카리센 출신 후궁이 필요해서였다고요?”

라틸이 ‘무슨 소리야?’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클라인은 항의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자신을 좋아한 게 아니냐고, 자신이 좋아서 내내 매달린 게 아니었냐고, 왜 밤새 자신을 끌어안고 떠나지 말라 애원했냐고 묻고 싶어서. 하지만 클라인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히 나왔다. 황제가 형님과 사귀었단 게 진실이라면, 그날 밤 술에 취해 쏟아지던 그 고백의 주인공이 그일 리는 당연히 없으니까. 황제가 사랑한 게 그의 형이었다면, 클라인이 꿈꾸며 온 모든 것들은 다 오해였다. 황제는 그를 좋아한 적도 없었고, 그가 좋아서 후궁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클라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그가 알던 라트라실 황제. 울면서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 술주정뱅이 여자 기사. 술주정이 부끄러워서 애써 모른 척하던 그 도도한 황녀님. 이 모든 건 그의 착각 속에서 생겨난 가짜 라트라실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는데, 그 위에 쌓은 모습이 진실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본 라트라실 황제는 그의 착각 속 라트라실 황제였던 것이다. 진짜 라트라실 황제는 그에게 관심조차 없으며, 그가 카리센의 황자란 점 외엔 흥미도 없었다.

16551102182295.jpg“클라인.”

황제가 그를 부르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무섭게 들려서 클라인은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16551102182295.jpg“클라인.”

그는 목덜미까지 붉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에게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오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16551102182295.jpg“클라인. 네게 얘기하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네 형과 나는 이미 끝난 관계다. 굳이 들출 필요도 없는 사이고. 기분이…… 안 나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충격받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틸은 변명을 늘어놓다가, 클라인의 표정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클라인이 진실을 알면 섭섭해할 거란 생각은 했으나, 그가 생각 외로 더욱 놀라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눈치이자 덩달아 미안해졌다. 클라인은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하다가 결국 돌아서서 달아나듯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초조하게 서 있던 클라인의 시종이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서 얼른 그 뒤를 따라 뒤자, 클라인의 호위도 공손히 인사를 하고서 마지막으로 황자를 쫓아갔다. 라틸은 급격히 피로해져서 라벤더 다발을 옆에 있는 기사에게 건네고 근처의 커다란 바위로 가 앉았다. * * * 정신없이 뛰어가던 클라인은 호숫가에 도착해서야 멈추어 섰다. 그가 난간을 붙잡고 숨을 고르자, 바닐은 울면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16551102213271.jpg“나쁜 생각 하시면 안 돼요, 황자님!”

16551102182305.jpg“무슨 소리야?”

16551102213271.jpg“뛰어내리시려는 거…….”

16551102182305.jpg“아니야!”

클라인이 버럭 외치자 바닐은 머쓱해져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바닐이 괜한 과장을 한 게 아니었다. 클라인의 표정은 그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남들보다 파동이 큰 클라인의 감정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런데 클라인이 속상한 마음을 진정하려 애쓰고 있을 때, 앞서 사라졌던 서넛이 붉은 돌길을 따라 이쪽으로 걸어왔다. 클라인은 누구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은 상태인지라, 서넛을 보았지만 못 본 척 호숫가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넛이 직접 클라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클라인은 인상을 구기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16551102182305.jpg“무슨 일이야?”

16551102213292.jpg“폐하께 화내지 마십시오.”

황제보다 앞서 걸어가는가 싶더니. 어떻게 신경전 벌이는 걸 보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돌아온 목소리는 차갑고 무뚝뚝했다. 클라인은 난간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폈다. 몸을 돌리자 그와 마주하고 선 단단한 몸뚱어리가 보였다. 서넛은 몇 분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표정이 굳어 있었다.

16551102182305.jpg“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닌데, 서넛 경.”

클라인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새로 알게 된 충격적인 진실에 가슴이 아파 죽겠는데. 안 그래도 싫어하던 서넛이 찾아와서 이런 소리를 해대자 몹시 화가 난 기색이었다. 그러나 서넛 역시 아까 클라인이 라틸을 마구잡이로 비난하던 걸 봐 버려서, 이미 기분이 몹시 상한 상황이었다.

16551102213292.jpg“내내 말하고 싶었는데. 폐하께서 묻고 가려 하셔서 저도 묻고 가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들춰냈으니, 저도 좀 같이 들추겠습니다.”

16551102182305.jpg“……무슨 소리지?”

16551102213292.jpg“제가 말씀드렸죠. 황자님의 형님이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그게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16551102182305.jpg“…….”

16551102213292.jpg“연인, 짝사랑. 두 분 관계에 붙이기엔 너무 아름답고 아까운 단어였단 거 아십니까?”

16551102182305.jpg“아깝다니.”

16551102213292.jpg“황자님의 형님은 폐하를 배신하고 떠났습니다. 폐하께선 그 일로 무척이나 힘들어하셨고요.”

16551102182305.jpg“배신?”

16551102213292.jpg“몇 년을 기다린 폐하에게 일말의 예절조차 지키지 않고 배신했습니다. 탓할 사람이 필요하십니까? 폐하가 아니라, 황자님의 형님을 탓하시면 됩니다. 모든 일의 시작이자 발단이신 분이니.”

클라인의 커다란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어이도 없고 갑갑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16551102182305.jpg“그래서. 우리 형님이 폐하를 배신했으니, 폐하가 나를 속여도 된다 이건가?”

16551102213292.jpg“그건 아니지요. 하지만 폐하께 상처를 준 사람의 동생이 폐하를 또 상처 주려 하니, 보기가 싫어서 말입니다.”

16551102182305.jpg“!”

16551102213292.jpg“폐하가 미우면 떠나십시오. 폐하 옆에서 상처받은 얼굴로 얼쩡거리지 말고.”

바닐과 악시안은 점잖은 서넛이 내뱉는 악담에 충격을 받아 그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충신이니, 클라인이 황제를 원망하지 못하게 중간에서 나설 수는 있다 싶었지만, 저 말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16551102182305.jpg“떠나?”

작게 중얼거린 클라인의 입가에 허망한 웃음이 떠올랐다.

16551102182305.jpg“그래. 떠나지.”

말을 마친 그는 주먹으로 서넛을 눈 깜짝할 사이 내려치고서, 자신의 처소로 빠르게 걸어갔다.

16551102213271.jpg“황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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