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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짝사랑이라고 해줘 (134/367)

134화. 짝사랑이라고 해줘2021.06.09.

16551101981779.jpg“타리움 제국에서 보낸 습격자가 이송 도중 강도에게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비서가 급하게 달려와 알린 소식에, 하이신스는 보고서를 내려놓고서 고개를 들었다.

16551101981783.png“습격자? 클라인을 습격했다는 그자 말이냐.”

16551101981779.jpg“예, 폐하.”

16551101981783.png“갑자기 강도에 당했다니?”

비서가 곤란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하이신스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틸은 앞서 서신에서, 클라인을 암습한 습격자의 배후가 다가 공작이라고 했다. 하이신스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습격자를 이용해 다가 공작을 역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습격자가 여기 오는 도중 죽었다고? 이걸 우연이라 봐야 할까?

16551101981783.png“시기 한 번 교묘하군.”

16551101981779.jpg“다가 공작이 연루되어 있을까요?”

16551101981783.png“다른 사절단 일행은?”

16551101981779.jpg“다행히 모두 무사하다 합니다. 부상을 입긴 했지만요.”

하이신스는 코웃음을 쳤다. 다가 공작이라고 해서 타리움 제국과 척을 지고 싶진 않을 테니, 당연히 사절단은 안 건드렸을 것이다. 다가 공작이 원하는 건 카리센을 무사히, 온전한 형태로 손에 쥐는 것이지 엉망으로 만드는 게 아닐 테고. 하이신스는 펜을 내려놓고서 엄지와 검지로 욱신거리는 눈가를 눌렀다.

16551101981783.png“그래서. 사절단은?”

16551101981779.jpg“시체를 인도한 다음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하이신스는 몸을 일으키고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16551101981779.jpg“폐하.”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타리움의 복장을 한 사절 한 명이 바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16551101981779.jpg“라트라실 황제께서 범인을 인도하면서 폐하께 전하라 한 서신이 있습니다.”

하이신스가 손을 내밀자 사절은 품 안에서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 사절이 두 손을 모으고서 뒤로 물러나자 하이신스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서신을 꺼내 읽었다. 비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하이신스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범죄자 인도와 관련이 있는 내용일 텐데, 지금은 타리움에서 보내준 그 범죄자가 오는 길에 죽은 상황 아닌가.

16551101981783.png“…….”

역시. 곤란한 내용이 있는지, 하이신스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집무실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비서도 얼른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닫으며 보니, 하이신스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나쁜 소식을 보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정. 하지만 이 상황에 전해질 좋은 소식이 있나? 의아해서 보고 있자니, 하이신스가 서신을 잘 접어 책상에 올리며 지시했다.

16551101981783.png“제비꽃 여관으로 가보아라.”

16551101981779.jpg“예?”

16551101981783.png“사절단 쪽으로 보낸 건 형 집행이 확정된 다른 사형수라는군.”

16551101981779.jpg“아! 일부러 가짜를……?”

16551101981783.png“그래. 다가 공작이 중간에 나설 때를 대비했다더군.”

16551101981779.jpg“현명하시군요. 입이 무거운 사람 몇을 데리고 은밀히 다녀오겠습니다.”

비서가 급히 인사하고 나가자, 하이신스는 타리움에서 보낸 사절에게도 그만 가보라 말했다. 타리움 사절까지 나가고 홀로 남자, 하이신스는 책상에 팔을 괴고서 난처해 웃었다.

16551101981783.png“라틸. 역시 나는 널…….”

  * * * 사절단을 통해서 가짜 범인을 보내고, 흑림을 통해서 진짜 범인을 보냈는데. 다가 공작이 과연 습격자 입을 막기 위해 나설까? 라틸은 턱을 괸 채 펜을 휙휙 돌리면서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지 현명한 행동을 한 건지 궁금해했다.

16551102037851.png“폐하. 드디어 구했습니다.”

그러고 있기를 30여 분. 점심을 먹으러 간다던 서넛이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한 손에 연한 분홍색 책을 들고. 라틸의 옆에 선 시종장이 책 표지에 커다랗게 박힌 커다랗고 새빨간 하트 모양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서넛은 들고 온 책을 태연히 라틸에게 내밀었다.

16551102037851.png“여기 있습니다.”

16551102037859.png“그러고 들고 왔습니까?”

16551102037851.png“예. 문제라도……?”

16551102037859.png“아니, 아닙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서넛에게 라틸은 한 번 ‘히’ 웃어 보이고서 책을 펼치다가, 고개를 들어 시종장에게 말했다.

16551102037859.png“사블레 후작. 후작도 식사 좀 하고 와요.”

16551101981779.jpg“예, 폐하.”

시종장이 정리하던 서류를 돌아와서도 분류하기 쉽도록 가지런하게 두고 나가자, 라틸은 얼른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으며 책을 펼쳤다.

16551102037859.png“대체 무슨 내용이길…… 어이쿠.”

그런데 펼치고 보니 소설이 아니었다. 라틸이 책을 들고서 묘한 표정을 짓자, 서넛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었다.

16551102037851.png“왜 그러십니까?”

16551102037859.png“음. 아닙니다.”

라틸은 서넛도 내보내고서,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여기저기 되는대로 펼쳐보았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이 책은 소설이 아니었다.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이론서. 연애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론서였다.

16551102037859.png“우와.”

뺨으로 열기가 확 돌아서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16551102037859.png“이게 뭐래.”

-아얏 아팡. 늘 강한 모습을 보여온 그대, 가끔은 약한 모습도 괜찮아요.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 부담스럽지 않게 우연을 가장해 만나봐요.

16551102037859.png“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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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보다 책을 좀 더 자세히 살피던 라틸은 황급히 책을 덮고서 숨을 빠르게 쉬었다. 심장이 마구 콩닥거리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내가 뭘 본 거지? 라틸은 두려워하며 시선을 내렸다가, 눈을 질끈 감고서 다시 책을 한 번에 펼쳤다. -뽀뽀 쪽 쪽쪽쪽. 키스 전엔 이 닦고 과일 맛 사탕 먹기.

16551102037859.png“악!”

라틸은 다시 책을 덮고서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굳건한 라틸의 정신이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 내용이라고, 마구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당장 이 책을 덮고서 여기서 5m는 떨어지라고 외쳐댄다.

16551102037859.png“이래서 라나문이 못 보게 했구나.”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책을 쳐다보다가, 서랍을 열어 책을 안에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봉인시키는 마음으로 서랍을 닫는 순간. 놀란 마음이 가시며 이번에는 조금씩 웃음이 흘러나왔다. 라틸은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턱을 눌렀다. 라나문이 차갑고 진중한 얼굴로 인덱스까지 하나하나 붙여 가면서 이걸 보았을 생각을 하자 웃겨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 인덱스. 결국 라틸은 흐느끼듯 울면서 책상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내용이 부담스러워도 그냥 그러려니 할 거다. 예를 들어서 게스타나 타시르. 게스타는 달달 떨면서 볼 것 같고, 타시르는 오렌지 까먹으면서 재밌게 볼 것 같다. 클라인이 보았다 해도 사실 별로 이상하지 않고, 칼라인이 보았다 해도 아주 이상하단 생각은 안 든다. 그런데 본 사람이 라나문이 되어 버리자 괜히 이쪽이 더 민망해지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라틸은 쪼그려 앉아 끅끅 웃어대다가, 자신이 너무 미친 사람처럼 여겨져서 의자를 붙들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에 앉아 까만 글씨가 꼬불꼬불 써진 서류를 보고 있자니,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아까와는 또 다른 마음이 들었다.

16551102037859.png‘라나문도 나하고 잘해 볼 마음이 있긴 하나 보네.’

라틸은 손으로 자기 뺨을 꽉꽉 누르며 웃었다. 그러니 이런 것도 보고 그러는 거겠지? 그 인덱……스까지 붙여 가면서.

16551102037859.png“으흐흐흐.”

인덱스 생각에 다시 흐느끼는 울음이 튀어나와서, 라틸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다시 한참을 웃어댔다.

16551102037859.png‘아트락시 공작은 능구렁이인데, 라나문은 의외로 순진한가 봐.’

어쨌든 이 일은 모른 척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서로가 부끄러워질 테니.

16551102037859.png‘내가 이걸 찾아본 걸 알면 라나문이 날 얼려 죽이려 할 거야.’

  * * * 서넛은 라틸이 책을 읽는 동안, 칼라인을 만나기 위해 하렘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정문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고 있자니, 신비로운 은발을 늘어뜨린 남자가 이쪽으로 무섭게 걸어왔다. 클라인이었다. 클라인이 자신 쪽으로 올 거란 생각을 하지 않기에, 서넛은 일부러 옆으로 비켜서서 괜한 다툼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굳이 서넛의 앞으로 온 클라인은 몸을 돌리더니 아예 서넛과 마주하고 섰다. 왜 갑자기? 서넛은 의아해서 클라인을 보았으나, 굳이 피할 일이 아닌지라 평소처럼 물었다.

16551102037851.png“무슨 일이십니까?”

질문을 던지자마자 서넛은 클라인의 표정이 평소보다 어둡다는 걸 눈치챘다. 물론 서넛을 보는 클라인의 표정은 늘 좋지 않지만, 오늘은 그보다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었다. 왜 저런 얼굴이지?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서넛은 클라인이 말하기를 먼저 기다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마주한 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넛은 클라인의 말을 기다리느라, 클라인은 서넛을 가만히 쳐다보느라. 클라인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그 상태로 얼마나 서로를 응시했을까. 마침내 클라인이 입을 열었다.

16551102102031.png“혹시 내 형님이 사귀었던 여자가…… 폐하시냐.”

클라인이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서넛은 그 질문을 듣자, 클라인의 표정에 서린 꺼림칙함이 불안감과 초조함 등이 뒤섞인 어떤 감정의 덩어리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16551102102031.png“대답해.”

클라인이 재차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잠겨 있었다. 조금 쉰 느낌도 났다.

16551102102031.png“형님이 폐하와 사귀었어? 형님의 첫사랑이 폐하야?”

어디서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는 아예 감도 잡지 못하고 있더니. 멍청한 게 어떻게 여기까지 추측을 해낸 모양이었다. 서넛이 대답하지 않자 클라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떨리는 그 시선으로 서넛을 보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16551102102031.png“짝사랑이었지?”

그건 질문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 간절한 눈빛을 보자 서넛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며칠 전 신이 나서 형님의 첫사랑을 찾아다니던 클라인의 모습과 대조되어서. 그는 클라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할 대답은 어차피 하나뿐이었다.

16551102037851.png“저는 선황제 폐하의 기사여서, 폐하께서 황녀이던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건 호위의 일이 아니니까요.”

서넛이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가자 클라인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바닐은 그 뒤에서 초조하게 클라인을 바라보았다. 게스타를 놀려대던 클라인이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내내 홀로 뭔가를 초조하게 생각하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는데. 그 내용이 설마 이런 것일 줄은 곁에서 내내 따라다닌 그도 알지 못했다.

16551101981779.jpg“황자님.”

바닐이 조심스럽게 불렀으나 클라인은 대답할 정신도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누군가를 발견하더니, 입술을 깨물고서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바닐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정문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황제를 보았다. 바닐은 걱정스럽게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설마…… 황자님, 폐하께 직접 물어보실 건 아니죠? 그 생각을 하자마자 클라인이 숨을 들이쉬더니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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