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웃으면서 먹이기2021.06.06.
서넛은 오늘은 당직이 아니기에 라틸의 일과가 끝나자 바로 궁에서 나왔다. 라틸이 구해 달라고 한 책도 있으니, 그 책을 찾아서 한 바퀴 서점을 다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두 군데 서점에서 실패한 다음 세 번째 서점 안에 들어가는데, 어디서 본 적이 있던 사내가 굳이 옆을 비집고 안으로 같이 들어왔다. 궁전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 같은데? 서넛은 잠시 의아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쪽을 보았으나, 나쁜 느낌은 없었던지라 그냥 오다가다 봤겠거니 싶어서 카운터에 있는 주인을 찾아가 물었다.
“‘연애의 시작’이란 책을 구하려 하는데. 있소?”
그 순간. 주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평이하게 지나가던 그 ‘어디서 본 듯한 사내’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뭐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주인이 화를 내며 외쳤다.
“거기! 뛰지 말아요!”
하지만 주인은 곧 근위기사단 복장을 한 서넛이 앞에 있자,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이 저러다가 책꽂이를 쳐서 우르르 무너진 적이 있어서요. 이쪽으로 오세요.”
서넛은 주인을 뒤따라가면서도 아까 본 그자에 대해 떠올렸다. 어디서 봤는데. 대체 어디서 봤더라…….
“이쪽 서가 찾아보면 되실 겁니다.”
그 사이 주인은 그 책이 꽂혀 있는 책꽂이를 가리키고서 물러났다. 생각보다 꽤 커다란 책꽂이를.
“고맙소.”
서넛은 한숨을 내쉬고서 책꽂이를 가장 가까운 곳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어쨌든 여기서부터는 하나하나 다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옆에서 누가 자꾸 부산스럽게 움직여서 쳐다보니, 아까 문가에서 스쳐 지나간 그 남자도 이쪽 서가에서 엄청난 속도로 책을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서넛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썹을 찌푸렸지만, 상대는 조금 거슬릴 뿐 사고를 친 건 아니었기에 다시 자신의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서넛은 조금 깊숙이 꽂혀 있는 ‘연애의 시작’ 책을 발견하고서 얼른 그걸 빼냈다. 그런데 그 순간.
“아!”
그 남자가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탄식하는 게 아닌가. 서넛이 쳐다보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서넛과 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제게 그걸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말도 안 되는 부탁에 서넛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남자는 그래도 끈질기게 부탁했다.
“꼭 찾던 책이어서요. 급하게…….”
“나도 급하게 찾던 책인데.”
“아, 물론 그러시겠지만…… 그…….”
서넛은 남자를 상대하길 그만두고 돌아섰다. 얼른 이걸 라틸에게 전해주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하지만 뜻밖에도 남자는 서넛의 앞길을 막아섰다. 이 사람 좀 보게? 근위기사단 복장을 보고서도 상대가 저렇게 나오자, 서넛은 황당해서 눈썹을 치켜뜨고 그자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저…… 진짜로 필요한 책이어서요.”
“폐하께서 읽고 싶어 하는 책이니 양보할 수 없다. 기다리면 다시 나오겠지.”
서넛은 이번에도 남자를 그냥 지나가려 했으나, 남자는 황제 이야기가 나오자 낯빛이 창백해져서 “제발요!” 하고 간절하게 서넛의 앞을 다시 막았다. 서넛은 남자를 손으로 밀어내려다가, 책꽂이가 우르르 무너진 적이 있다는 책방 주인의 말을 떠올리고서 손은 내렸다. 그러고서 보니 상대의 얼굴빛이 해쓱하니 아주 좋지 않아 보였다.
“이 책을 당장 구해가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상대가 죽으니 어쩌니 하는 말까지 꺼내자, 서넛은 아까보다는 마음이 좀 흔들려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남자, 라나문의 시종 카르둔은 그런 서넛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이 책을 서넛이 가져가면 라나문은 분명 부끄러워 죽을지도 몰랐으니. 서넛은 망설이다가 결국 카르둔에게 책을 내밀었다. 다른 책방을 찾아다니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라틸이 최대한 빨리 구해와야 한다 했다면 양보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건 아니었으니 그가 아는 라틸도 이 정도는 이해해줄 거란 판단에서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르둔은 꾸벅꾸벅 인사하고서 얼른 뒤돌아 카운터로 달려갔다. 서넛은 그 황당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제야 저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라나문 뒤를 늘 쫓아다니는 그 시종이었다. 이후 서넛은 다른 책방도 다 돌아다녔지만, 수도에 있는 모든 서점을 다 돌아다녀도 그 책은 없었다. 카르둔이 앞서 다른 책방을 다 휩쓸었기 때문이지만, 이를 모르는 서넛은 들어본 적도 없는 책이 죄다 팔려나갔다고 하자 의아해졌다. 정말로 인기가 많은 책인가?
‘하긴. 폐하께서 이름을 듣고 구해오라 하신 책이니 알음알음 입소문을 탄 책일지도.’
아쉽긴 하지만 그런 책이라면 다음에 또 들어와 있겠지 싶어서, 서넛은 우선은 책방 순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 * *
“그래. 서넛 경이 그 책을 구하러 나왔다고.”
“폐하께서 읽고 싶어 하는 책이라 했습니다.”
“용케도 양보하지 않았구나.”
“강압적이진 않았거든요. 폐하께서 읽고 싶다곤 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오라던가, 그런 명은 없던 눈치였습니다.”
“잘했다.”
카르둔의 어깨를 두드린 라나문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대로 창가로 걸어가 밖의 화사한 경치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창가로 가는진 모르겠지만, 카르둔은 라나문의 구겨진 자존심을 펼쳐주기 위해 열심히 아부했다.
“도련님은 역시 영리하십니다. 폐하께서 그 책을 구하려 하실 거란 걸 바로 짐작하셨잖아요.”
“2주일 정도는 계속 서점들을 다 돌아봐라.”
“2주일이나요?”
“한 번에 포기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까.”
“예.”
카르둔이 나가자, 라나문은 책꽂이 앞으로 다가가 <연애의 시작>을 뽑아 책상 앞에 앉아 펼쳤다. 단시간 내에 이 내용들을 죄다 머릿속에 집어넣은 다음 이 책까지 없애버릴 예정이었다. 그는 절대로, 절대로 라틸에게 자신이 이런 공부를 하고 있단 걸 알리지 않을 거니까. * * * 다음날. 책을 구하러 나간 카르둔은 돌아와서 ‘이젠 그 책이 없다’고 보고했다. 라나문은 그래도 2주일은 계속 확인하라 지시했고, 그다음 날에도 카르둔은 돌아와서 ‘이젠 그 책이 없다’고 똑같이 보고했다. 그가 이틀 전에 그 책을 다 사간 이후 더이상 들어오고 있지 않단 것이다. 이렇게 되자, 라나문 역시 더이상 책방들이 그 책을 가져다 두진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카르둔은 계속 보낼 거지만, 잘 생각해보니 유명한 책도 아닌데 서점들이 계속 그 책을 가져다 둘 것 같진 않았다. 어쨌든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자, 라나문은 경치 좋은 곳에서 간만에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싶어져서 카르둔이 외출한 사이 다른 하인을 데리고 정원에 있는 휴식 공간을 찾아갔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이미 선객들이 와 있지 않은가. 한쪽은 클라인과 그의 시종들이고, 다른 한쪽은 게스타와 시종이었다. 심지어 이곳에는 벤치 세 개가 나란히 있는데, 둘 다 양 끝 벤치에 앉은 터라 남은 벤치는 중앙 벤치 하나뿐이었다. 선객들이 자연스럽게 라나문을 쳐다보자 라나문은 괜히 왔단 생각에 불쾌해졌다. 그는 혼자서 여유를 즐기며 커피를 마시고 싶은 거였지, 다른 후궁들의 구경거리가 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서서 가자니, 그 역시 자기가 저들을 피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도련님. 그냥 가시렵니까?”
이런 기색을 눈치챈 하인이 작게 물었으나, 라나문은 “내가 뭐하러.” 하고 도도하게 대답하고서 중앙의 벤치로 가 앉았다. 하인은 게스타와 클라인의 시선에 좌우 옆구리가 다 쑤셨으나, 라나문을 본받아 태연한 척 챙겨온 커피를 잔에 따라 라나문에게 건넸다. 라나문은 평소보다 좀 더 기품 있게 커피를 받아 마셨다.
이렇게 모였으니, 여기서 서로 모른 척하면 좋을 텐데. 그 모습을 힐긋거리던 게스타가 쑥스러워하는 목소리로 그를 칭찬했다.
“라나문 님은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너무 멋지세요.”
뜬금없는 칭찬에 라나문이 쳐다보자, 게스타가 어색하게 웃었다. 게스타는 게스타대로, 서로 아는 사이인데 모른 척하기도 뭐해서 말을 건 눈치였다. 이에 라나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커피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말랭이는 속도 없지. 족제비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나원 참.”
“무말… 저요? 제 얘기인가요?”
그 말에 게스타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고, 라나문 역시 불쾌한 뉘앙스를 느끼고서 커피잔을 내리며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클라인은 방긋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아, 오해 말지, 라나문. 자네 얘기한 게 아니라 자네 아버지 얘기한 거거든.”
그러나 변명한다고 하는 말이 더욱 놀리는 투라, 라나문은 커피잔을 든 손에 힘을 꽉 주며 물었다.
“제 아버지를 지금 족제비라고 한 겁니까.”
클라인은 대답 대신 아까 게스타의 말투를 따라 하며 라나문을 또 놀렸다.
“우리 족제비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제일 멋지세요. 커피나 계속 드세요.”
“사람은 말에 품격이 묻어 나온다고 하지. 그대는 묻어 나올 품격도 없는 모양입니다.”
“알아들을 귀가 없는 건 아니실지.”
게스타는 숨을 죽이고서 라나문과 클라인을 번갈아 보았다. 다행히 라나문 쪽이 먼저 이 부질없는 말싸움을 할 마음이 사라진 듯, 더 말 상대를 하는 대신 무시하는 태도로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좋을 것을.
“역시 귀가 없네.”
클라인이 한 번 더 비꼬자, 라나문 역시 무시하길 멈추고서 그를 또 상대했다.
“하이신스 황제께서는 유학 시절 상냥하고 반듯한 태도로 이름이 높으셨는데. 역시 형만 한 아우는 없나 보군요.”
“장남이 그런 말을 해봤자 자기 얼굴에 금칠이지.”
하나는 사람들이 손꼽히게 불쾌해하는 비교를 해대고, 다른 하나는 그 말을 자화자찬이라며 비웃어대자 게스타는 다리까지 덜덜 떨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하인들 역시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쩔쩔맸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누가 그 불똥을 뒤집어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가 장남이라 제 말을 못 믿겠거든 폐하께 직접 물어보시지요. 하이신스 황제와 황자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폐하께서는 황자님의 형님과 절친한 친구셨으니, 아마 누구보다 잘 비교해 주실 겁니다.”
그런데 이 말에 클라인이 발끈하면서, 라나문이 잠시 승기를 잡는가 싶은 순간. 라나문의 시종인 카르둔이 먼발치에서부터 황급히 뛰어오기 시작했다. 라나문이 커피를 홀짝이면서 보고 있자니, 카르둔은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헐떡거렸다.
“도련님. 도련님.”
그 와중에도 계속 라나문을 불러대자, 라나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충고했다.
“여기 있을 테니 숨부터 골라라.”
“숨을 고를 때가 아니…… 잠시, 잠시만 시간 좀…….”
그 급해 보이는 모습에 클라인이 흥미롭게 둘을 쳐다보았다. 라나문은 예전에 클라인이 칼라인과 하녀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적이 있단 걸 기억했다. 여기서 자리를 비키면 클라인이 이번에는 그를 상대로 또 뭔 헛소리를 할지 모르기에, 라나문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여기서 말해도 되나? 카르둔은 양옆에 앉은 클라인과 게스타의 눈치를 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서 라나문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도련님. 이틀 전에 제가 ‘그 책’을 다 사 갔더니, 인기 서적인 줄 알고 모든 책방에서 그 책을 수십 권씩 들여두었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카르둔은 울먹였고, 라나문은 조금 전까지 클라인과 말다툼 하던 것도 다 잊어버렸다.
“이렇게 됐으니, 다시 그 책을 다 사 봤자 분명 서점에선 또 사들일 겁니다. 진짜 잘 팔리는 책이라고요.”
라나문은 덜 마신 커피를 하인에게 건네고서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고서 인사도 없이 가버리자, 카르둔이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클라인은 그 모습을 호기심에 가득 차 바라보다가 게스타 쪽으로 허리를 조금 숙이면서 물었다.
“이봐. 저 족제비가 왜 갑자기 꼬리 말고 도망가는 거 같아?”
“저, 저는 잘…….”
게스타가 얼굴만 벌게질 뿐 제대로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자, 클라인은 몹시 궁금하단 눈으로 라나문을 뒤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 입에서 당장에라도 별 희한한 억측이 나올 분위기이자, 게스타는 더욱 쩔쩔매다가 무슨 말이든 다른 화제로 돌려야겠다 싶은지 클라인에게 물었다.
“저기, 그게, 그런데 정말인가요?”
“뭐가.”
“정말로 하이신스 폐하와 우리 폐하가 사이가 좋으셨는지…….”
“그렇다더라고.”
“그렇군요.”
게스타는 클라인이 라나문 뒤를 쳐다보느라 건성으로 대답하는데도 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황자님께선 폐하에 대해 저희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겠어요. 부럽습니다.”
클라인은 그 말에 픽 거만하게 웃으면서 드디어 게스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었다. 그러고보니 이상해서. 왜 하이신스는 동생이 후궁으로 간다는데, 저들 말처럼 라트라실 황제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았나? 보통 사이좋은 동생이 친구의 후궁으로 간다면, 그 친구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정도는 알려주지 않나? 의문을 느끼자 전에 들었던 말들도 다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남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서넛이 하이신스의 첫사랑 찾는 걸 말린 일. 하이신스가 라트라실 황제와 친했다면서, 후궁으로 가는 동생에게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은 일. 라트라실 황제 역시 늘 붙어 다녔면서 하이신스의 첫사랑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는 일. 그리고…… 하이신스의 결혼식 날, 펑펑 울던 라틸.
-누가 보면 신랑한테 차인 사람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클라인은 머리에 번개가 내려꽂힌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혹시 폐하가…… 형님의 첫사랑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