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연애의 시작2021.06.02.
틀라의 명령에 여우 가면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틀라를 빤히 보았다. 처음에는 같이 눈을 맞추던 틀라는 여우 가면의 그 태도에 괜히 긴장했다. 하지만 ‘이게 놈의 약점이다’ 하는 생각에 명령을 거두지 않고 있자, 여우 가면이 천천히 손을 올려 가면에 대었다. 틀라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실 명령을 내릴 때, 저 가면 뒤에서 깜짝 놀랄 의외의 정체가 나올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자신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데 부하란 작자가 얼굴과 표정을 숨기고 있으니 그게 싫었을 뿐. 하지만 상대가 바로 벗지 않자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벗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만.”
“?”
“얼굴을 보이고 나면 로드께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면에 손을 올린 여우 가면이 던진 말에, 틀라는 곧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며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협박하는 거냐.”
“진실을 알려드리는 거지요.”
각성하지 않은 로드는 아직 약하셔서, 중얼거리는 여우 가면의 입꼬리가 점점 더 위로 올라갔고 그만큼 틀라의 분노도 커져갔다.
“죽인다는 거냐 죽는다는 거냐. 똑바로 해라.”
“죽일 거란 뜻입니다.”
분노와 모멸감에 틀라는 얼굴을 구겼다.
“어쩌시겠습니까. 벗을까요?”
분노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상대의 말에 휩쓸리면 안 된단 건 알지만, 너무 화가 나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 말은 진실이었다. 지금의 그는 분명 여우 가면보다 약했다. 죽기 전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여우 가면은 그 이상으로 강했다. 저 가면의 말처럼 각성하지 않은 자신은 저자를 상대할 수 없었다. 문제는…….
‘내가 로드가 아니라면 각성할 일도 없다. 그럼 나는 평생 저 꼴을 보아야 하나.’
평소에도 여우 가면은 선을 넘을락 말락 건방진 모습을 능청스레 보였지만, 자신이 로드라고 굳건히 믿을 때의 틀라는 그 모습조차 웃으면서 넘길 여유가 있었다. 이젠 그 여유가 사라졌다. 그런데다 여우 가면이 오늘만큼 협박조로 나온 건 처음이다 보니,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여우 가면이 갑자기 활짝 웃었다.
“농담입니다. 뭘 그리 겁먹으십니까.”
“뭐?”
갑작스럽게 밝아진 목소리에 틀라가 아직 적응하지 못한 사이, 여우 가면은 시간을 끈 것과 달리 손쉽게 가면을 벗어버렸다. 틀라는 여우 가면의 태도 변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서 순간 넋을 놓았다. 여우 가면이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던 탓이다. 반면 여우 가면은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태연히 가면을 다시 착용하더니, 악보를 마저 챙겨서 나가버렸다. 틀라는 돌풍처럼 휩쓸고 간 일에 멍하니 있다가, 여우 가면이 나가며 문소리를 내자 그제야 주먹을 쥐고서 피아노 건반을 꽝 내리쳤다. 쾅 소리가 나며 지하 알현실이 울리자, 복도를 걸어가는 여우 가면의 입에서 잔잔한 휘파람에 흘러나왔다. * * *
“카리센에선 아직 답서가 안 왔습니까?”
“예.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요.”
질문을 던진 라틸은 다시 업무에 몰두할 것처럼 펜을 쥐었으나, 시계를 확인하자 바로 펜에 뚜껑을 끼우고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평소라면 여전히 업무를 볼 시간이라 서넛이 묻자, 라틸은 자기 머리를 한 번 쿡 찌르며 대답했다.
“라나문한테 갑니다. 머리 괜찮나 살피러.”
“머리요?”
“꾀병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라틸은 따라오려는 서넛에게 괜찮으니 쉬라 말하고서 하렘으로 걸어갔다.
“내가 왔다고 알려라.”
그런데 막상 하렘에 도착해보니 라나문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라나문 님께서는 이 시간마다 산책하러 가십니다.”
호위가 쩔쩔매며 하는 말에 라틸은 “그러냐?” 하고 중얼거리고서 몸을 돌렸다.
“저, 폐하. 라나문 님은 매번 비슷한 시간에 산책을 하셔서 비슷한 시간에 돌아오십니다. 돌아오실 시간이 거의 다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호위가 다시 급하게 말을 잇자, 라틸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여유 시간이 좀 있긴 했다. 라틸은 돌아갔다가 다시 여기까지 오는 것과, 이 자리에서 라나문을 조금 기다리는 것. 둘 중 뭐가 더 귀찮을지 비교해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방문을 잡았다.
“그럼 들어가서 기다리지.”
호위는 금세 얼굴이 밝아져서 “예.”하고 말했고, 라틸은 방문 두 개를 지나 라나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품을 하면서 소파에 가 앉으려고 보니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딱 들어왔다. 일반 책이면 그냥 책이구나, 하고 고개를 돌렸을 텐데. 아주 색이 화사하고 예쁜 연한 분홍색인 데다 그 위에 새빨간 하트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눈길이 갔다.
“표지 귀엽네.”
라틸은 웃으면서 다가가서 책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표지가 사랑스러워?
“응?”
그런데 막상 앞에 가서 보니 표지보다 제목이 더 눈길을 사로잡았다.
“연애의 시작?”
로맨스 소설인가? 기다리면서 읽을까 싶어서 라틸은 책을 들고 소파로 가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런데 책을 펼치려다 보니, 책의 1/3 정도에 인덱스가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은가.
‘보통 소설을 이렇게까지 표시하면서 읽나?’
“열심히 읽네.”
라틸은 라나문의 철저한 면에 감탄하면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을 반 정도 펼쳤을 때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곧 올 거라더니. 라나문이 정말로 바로 온 것이다. 라틸이 돌아보자, 라나문 역시 호위에게 황제가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평온하게 들어오며 말했다.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나가지 않고 기다렸을 텐데요.”
“아니, 괜찮아. 나도 방금 왔다.”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늘 데리고 다니는 시종 카르둔은 중간 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나문은 평소처럼 태연히 걸어왔다.
“그러면…….”
라틸은 커피 한 잔이나 달라고 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우아하게 걸어오던 라나문이 라틸이 손에 든 책을 힐긋 보더니,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왜 저러지? 의아해서 쳐다보는 사이. 라나문이 눈 깜짝할 사이 코앞으로 다가와 확 책을 낚아채 등 뒤로 숨겼다.
“어?”
방금 뭐가 지나갔어? 라틸은 당황해서 빈 무릎을 내려다보다가 감탄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라나문. 너 빠르구나?”
춤도 못 추고 검술 배웠단 얘기도 없어서 약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칭찬을 하면서 보니, 라나문은 목덜미까지 피부가 붉어져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정색한 채로. 칭찬 때문에 빨개진 건 아니었다. 라틸이 무어라 말할 때부터 이미 저랬으니.
‘숨이 차나?’
“아니, 그거 뛰었다고 얼굴이 빨개졌느냐?”
라틸이 혀를 차자, 라나문은 입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다물었다. 의아해하던 라틸은 곧 라나문이 숨이 차서 저러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저런단 걸 눈치채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로맨스 소설 보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차가운 이미지인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기가 로맨스 소설 보는 걸 감추려는 경우가 많았으니. 라틸은 라나문도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라나문은 몇 번 더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순순히 “예.”하고 대답하더니, 얼른 책을 책장 안에 집어넣었다.
“이마는 좀 어때? 아직 아파?”
“괜찮습니다. 이젠 안 아픕니다.”
“그래?”
라틸은 라나문이 오늘도 야하게 꾀병을 부리진 않을까, 조금 기대를 했던 터라 그 냉담한 태도에 살짝 아쉬워졌다.
“그렇구나. 안 아프다니 다행이다.”
게다가 라틸이 뭐라 더 말을 이으려 해도 라나문은 무표정하게 바닥만 볼 뿐 영 고개조차 들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라고 하기에는 목덜미가 여전히 붉은 채라, 라틸은 머쓱해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온 걸 별로 안 반가워하나 보네. 그렇게 민망한가.’
“그래. 그럼 나는…… 어, 갈게.”
“살펴 가십시오.”
“으응.”
라틸이 문을 열고 나가자, 중간방 문 앞에 있는 넓은 소파에서 카르둔이 벌떡 일어나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벌써 가십니까?”
“그래. 라나문이 피곤한가 보다.”
라틸이 ‘라나문 때문에 가는 거다’는 걸 확신하게 하고서 나가자, 카르둔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배웅한 후.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나문에게 황제를 왜 벌써 보내냐고 잔소리를 할 생각으로. 그러나 예상외로 책장 앞에 서 있는 라나문은 이미 얼굴이 빨갰다. 뭐야. 할 거 다 하셨잖아. 얼굴이 빨간 걸 보니 키스하신 게 아닐까? 그걸 본 카르둔은 흐뭇해져서 아까와 달리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폐하와 좋은 추억을 만드셨나 봅니다. 그래도 조금 더 붙잡고 계시지요.”
그러고서 아쉬워하면서 다가가는데, 웬걸. 자세히 보니 라나문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늘 차가운 표정이긴 하지만 라나문도 약간씩 표정에 희미한 변화가 있긴 한데, 지금은 분명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도련님?”
그게 이상해서 불러보자, 라나문이 책장에서 ‘연애의 시작’ 책을 꺼내면서 중얼거렸다.
“보신 거 같다.”
“예? 무엇을…… 책을요?”
카르둔은 덩달아 눈이 커다래져서 되묻자, 라나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초조하게 창문을 쳐다보았다. 카르둔은 허둥지둥하면서 제자리 뛰기를 몇 번 하다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아, 아니, 별로 그런 내색은 아니었습니다. 폐하는 아무것도 못 본 눈치셨어요.”
“내 눈에도 그랬다.”
“예? 보신 건 확실한 겁니까?”
“모르지. 그보다 카르둔.”
“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수도 안에 있는 이 책을 다 산 다음 전부 저택에 가져다 두고 와라.”
“예? 그렇게까지 많이 사실 필요가 있나요?”
“폐하께서 궁금해서 찾아보실지도 모르지 않나.”
“아!”
“빨리. 서둘러라.”
“예, 예 예!”
카르둔이 허둥지둥하며 나가자, 라나문은 초조하게 책을 펼쳤다. 책은 저절로 가장 마지막에 인덱스 표시를 해 둔 부분이 펼쳐졌다. 아얏 아팡. 늘 강한 모습을 보여온 그대, 가끔은 약한 모습도 괜찮아요. 소제목을 본 라나문은 책을 도로 덮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걸 라틸이 봤을지도 모른단 생각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다. * * * 라틸이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집무실에 들어서자, 집무실 앞에서 서성거리던 서넛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쉬라니까요.”
라틸이 그 모습에 혀를 차자 서넛은 얼른 말을 돌렸다.
“쉬려 했습니다. 빨리 오셨네요.”
“아, 그게…….”
그 질문에, 라틸은 이곳에 오는 내내 의아했던 질문을 서넛에게 했다.
“서넛 경. 혹시 로맨스 소설 보다가 나한테 들키면 부끄럽습니까?”
대외적으로 차가운 성격이라 이름난 이들이 허세를 많이 부리긴 했으나, 그래도 그냥 소설 좀 읽었단 이유로 라나문이 목덜미까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하는 게 영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전 자주 봅니다. 추천 원하시면 목록 작성 가능합니다.”
“아.”
“추천해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라틸은 라나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그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게 이해는 되지 않지만, 어쨌든 본인이 그 정도로 민망해하는 데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서. 대신 라나문이 보던 책 제목을 떠올리고서 물었다.
“그, ‘연애의 시작’이란 책이 요즘 유행입니까?”
“요즘 유행하는 책은 ‘아름다운 순정, 바지를 벗어봐’ 입니다.”
“아.”
그건 제목이 좀…… 라틸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물었다.
“읽었습니까?”
“읽었습니다.”
서넛이 당당하게 “빌려드릴까요?” 하고 묻자, 라틸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고. 그, 뭐야. ‘연애의 시작’이란 책은…….”
“읽어본 적 없습니다.”
“한 권 구해다 주겠습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