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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여기서 침을 삼키면 (130/367)

130화. 여기서 침을 삼키면2021.05.26.

한숨을 내쉰 라틸은 괜히 성질이 나서 만년필을 집어다가 빈 종이를 꺼내서 칼라인의 이름을 힘주어 퍽퍽 적었다. 펜촉이 뚝 부러지자 놀라서 손을 뗐지만, 이미 박살난 펜촉 사이로 잉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라틸은 펜을 옆에 내려놓고서 짜증이나 책상에 머리를 묻었다. 사실 생각하면 짜증이 날 게 아닌데.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칼라인의 미소라면, 그냥 찾아가서 “웃어봐.” 말하는 것만으로도 볼 수 있는 건데도.

1655110100228.png‘어?’

그러다가 라틸은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1655110100228.png‘근데 도미스, 분명 좀비에 물렸는데. 왜 죽을 때까지 사람의 모습이었지? 그 기르골이란 사람도 도미스가 좀비가 될 거라고 했잖아?’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 라틸은 이번에는 무언가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허전한 걸 발견했다.

1655110100228.png“서넛 경은요?”

평소라면 눈에 보이는 어딘가에 있을 서넛이 보이지 않았다.

16551101002295.jpg“칼라인 님과 커피를 마시러 갔습니다.”

시종장이 바로 대답해주었으나 라틸은 더 황당해서 되물었다.

1655110100228.png“예? 그 둘이 친해요?”

용병왕과 근위기사단장이 잠시 짬을 내어 둘이서 커피를 마시다니. 어떻게 이렇게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16551101002295.jpg“그런 눈치였습니다.”

1655110100228.png“둘 다 세서 그런가?”

16551101002295.jpg“그럴 지도요.”

그럴 수도 있지.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새 만년필을 꺼냈다. 그렇게 얼마나 일에 몰두하고 있었을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란 신호로 종을 누르자, 비서가 들어와 인사를 올리고서 말했다.

16551101002295.jpg“라나문 님의 시종이 폐하께 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1655110100228.png“라나문의 시종이?”

1655110100228.png‘무슨 일이지?’

1655110100228.png“들어오라 해.”

의아했지만 라틸은 바로 허락했다. 라나문은 먼저 라틸에게 연락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한낮에 사람을 보낼 정도면 급한 일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16551101002295.jpg“네.”

비서가 나가자 바로 라나문의 시종인 카르둔이 들어와 인사를 하는데, 역시나. 표정이 굳어 있는 게, 예상대로 심각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라틸이 말해보라 눈짓하자 카르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51101002295.jpg“폐하. 호수에서…….”

라나문의 시종이 해준 이야기는 라틸의 예상보다 훨씬 놀라웠다. 어젯밤, 라나문이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하다가 호숫가에 있는 정자에 갔는데, 거기서 괴물이 튀어나와 라나문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마침 대신관이 옆에 있다가 괴물을 해치워주어서 다행이지,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며 카르둔은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1655110100228.png“라나문은? 괜찮으냐?”

16551101002295.jpg“네. 좀 놀라긴 하셨지만 괜찮으십니다.”

1655110100228.png“아니, 어젯밤 일어난 일을 왜 지금 알려?”

16551101002295.jpg“자칫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으시다고, 폐하께만 조심히 알리라고 하셔서요.”

그 인간은 자기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진짜…… 라틸은 혀를 찼다. 클라인이라면 온갖 방정을 다 떨면서 하렘부터 1차로 뒤집고, 이곳에 와서 2차로 뒤집었을 텐데. 괴물 습격을 받고서도 어떻게 이렇게 조용히 처리할까.

1655110100228.png‘하지만 이런 점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긴 할지도 몰라. 지나치게 방심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해도 통제가 잘 안 될 테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라나문 쪽이 국서에 맞을 것도 같고…….’

1655110100228.png“사블레 후작.”

16551101002295.jpg“네, 폐하.”

1655110100228.png“백화를 불러다 이 일을 말하고 성기사들이 호수 근처, 아니, 하렘 전체를 샅샅이 조사해달라 부탁해요.”

16551101002295.jpg“네, 폐하.”

1655110100228.png“또…… 아, 5경비단 단장을 불러서 이 일을 얘기하고, 호수 주위에 사람들이 못 오게 막으라 해요. 혹시 모르니까.”

16551101002295.jpg“네, 폐하.”

지시를 끝낸 라틸이 다시 카르둔에게 “라나문은?” 하고 묻자, 카르둔은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당황해서 대답했다.

16551101002295.jpg“아, 도련님은 지금…… 아, 도련님 방에 계십니다.”

1655110100228.png“가지.”

라틸이 휙 밖으로 나가자, 카르둔은 얼떨떨해서 시종장과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황제가 바로 라나문을 보러 가겠다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눈이 마주치자 시종장이 카르둔에게 잘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뭘 어떻게 잘하란 건진 모르겠지만 카르둔은 알겠다고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고서 황급히 황제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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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110100228.png“라나문이 많이 놀랐어?”

하지만 다짐을 한 게 민망할 정도로, 카르둔은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바로 위기에 봉착했다. 황제는 라나문이 많이 놀랐을까 봐 찾아가는 모양인데. 사실 라나문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 일을 들은 자신이 놀라 기절할 뻔했고, 라나문은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거울만 보고 있었다. 라나문이 아주 놀랐다는 건 카르둔이 말을 전하면서 섞은 과장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황제가 걸어가다 말고서 힐긋 돌아보았다. 카르둔은 두 손을 포개고서 황급히 주절거렸다.

16551101002295.jpg“네, 많이 놀라셨습니다. 그게, 그, 너무 놀라서 표정이 어셨어요. 겉으로 보기엔 그래서 오히려 무표정한…….”

1655110100228.png“항상 그러잖아?”

16551101002295.jpg“물론 항상 그러시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저게 무슨 소리야? 라틸이 이상해 쳐다보자, 카르둔은 더욱 횡설수설했다. 라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괴물이 나타나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서, 라나문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문을 두드리고서 열었다. 중간 방을 지나 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라나문이 무표정하게 체스를 두는 게 보였다.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1655110100228.png‘괜찮아 보이는데?’

그걸 본 라틸은 더욱 의아해졌지만, 라나문이 놀라도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다가가며 걱정스레 물었다.

1655110100228.png“라나문. 괜찮으냐?”

그리고 라틸이 라나문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피는 사이, 카르둔은 두 손을 모으고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도련님. 제발 눈치껏! 대신관이 근처에 살다 보니 기도 효과가 잘 나타났나. 정말로 라나문이 대답하기 전 카르둔 쪽을 힐긋 보았다. 카르둔은 온몸을 다 이용해서 ‘아픈 척, 놀란 척’하란 신호를 보냈다. 그 사이. 라틸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라나문의 낯빛이 너무나 멀쩡하고 안색도 좋자, 슬슬 카르둔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라나문이 라틸의 손을 가져가더니 자신의 이마에 올려두었다. 열이 안 나는데도. 손은 왜? 라틸이 의아해서 바라보자, 라나문이 그 상태로 우두커니 있다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16551101085032.png“아야.”

라틸은 얼결에 손을 도로 회수했다가, 놀라 물었다.

1655110100228.png“거기 다쳤어? 이마?”

반듯하니 주름 하나 없는 그 이마? 떨떠름하지만 아프다니, 라틸은 라나문의 손을 치우고서 이마를 잘 살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이마는 더 멀쩡해 보였다. 그렇다고 괴물의 습격을 받을 뻔한 라나문에게 ‘너 멀쩡해 보여’라고 말하기도 곤란해서, 라틸은 멀쩡한 이마를 붙잡고 라나문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라나문이 두 손을 뻗어 라틸을 어색하게 안으며 중얼거렸다.

16551101085032.png“폐하께서 잠시 같이 있어 주신다면 머리가 덜 아플 것 같습니다.”

1655110100228.png“머리가 아프면 대신관을 부르는 게…….”

16551101085032.png“겉의 상처가 아닙니다.”

1655110100228.png“그래. 겉엔 상처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놀라서 머리가 아프단 걸까? 그런가 보다. 그래. 상처가 없어도 두통은 있을 수 있으니까. 라틸은 납득하고서 라나문의 이마를 손으로 가만히 쓸면서 물었다.

1655110100228.png“그럼 내가 뭘 해줄까?”

카르둔은 그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안도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공작님이 밤일이고 뭐고 낮일부터 잘하라며 가져다준 ‘연애의 시작’이란 서책을 요 며칠 내내 끼고 사시더니. 그게 도움이 되는 게 분명했다. 카르둔은 자신도 자리를 비켜드리는 게 좋을지, 아니면 심부름을 할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라틸은 라나문의 지나칠 정도로 매혹적인 얼굴 탓에 눈을 천장에 두었다 눈을 맞추었다 바닥을 보길 반복하고 있었다. 클라인도 이 정도로 아름답긴 하지만 워낙 밝게 온갖 말을 다 해대니까, 마주하고 있으면 시각보다 청각이 더 자극받는다. 반면 라나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끄러미 라틸을 보기만 하자 괜히 쑥스러웠다. 라틸은 어색하게 창문을 쳐다보다가 라나문의 어깨를 보다가 이번에는 라나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1655110100228.png‘얘는 어떻게 머리카락까지 부드러워 보여? 아니, 머리카락 구경할 때가 아니지.’

1655110100228.png“라나문. 말해봐. 내가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16551101085032.png“머리가 아프니 좀 누워야겠습니다.”

1655110100228.png“아, 그래. 그럼…….”

라틸이 라나문을 침대에 옮겨주기 위해 번쩍 들어 올리려 하자, 라나문은 제 발로 일어나더니 대신 라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얼결에 라나문과 두 손을 맞잡게 되자, 그는 그대로 라틸을 침대로 데려가더니 이불을 걷으면서 라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침대 안쪽에 누우면서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16551101085032.png“옆에 누우시겠습니까?”

그게 머리 아픈 거랑 무슨 상관인데? 라틸은 순간 생각했으나, 침대에 누운 라나문은 의자에 앉은 라나문보다 2.5배 정도 더욱 사람을 홀리게 했다. 옆으로 돌아누운 터라 그의 머리카락이 침대에 흐트러져 있어서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아니면 한 손으로 윗옷 단추를 푸는 행동 때문에 그런지도. 라틸은 괜히 시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1655110100228.png“그렇게 오래는 못 있는데.”

16551101085032.png“제가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 주시면 됩니다.”

라틸의 오른쪽 뇌가 ‘누워! 누워! 누워!’라고 외쳤고, 왼쪽 뇌는 ‘눕지 마! 눕지 마! 눕지 마!’하고 외쳐댔다. 라틸은 고민하다가 눕는 대신 침대에 깊게 걸터앉았다.

16551101085032.png“제 옆에 눕기 싫으십니까.”

1655110100228.png“그럴 리가.”

16551101085032.png“그러신 것 같은데요.”

1655110100228.png“네 옆에 누우면 잠들까 봐 그래. 일하다가 온 거라 그렇게는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라틸이 중얼거리자, 라나문은 “그렇군요.” 하고 수긍하더니, 깊숙이 누웠던 몸을 조금 빼내 라틸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라틸은 앉아 있는데, 라나문이 누운 몸을 가까이로 오자 라틸의 허벅지와 라나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게다가 그가 아까 윗옷 단추를 푸는 바람에, 하얀 셔츠 사이로 그의 가슴이 들여다보였다. 라틸은 시선을 피하고자 어정쩡하게 사방을 살피다가, 라나문이 좀 더 가까이 오자 숨을 들이쉬고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라나문이 라틸의 다리에 자신의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라틸의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발목에 닿자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척추가 찌릿해졌다. 그가 라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만하고…… 그 누구의 밑으로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냉정한 눈동자로. 그 표정과 분위기, 행동에서 오는 괴리감 탓일까. 누구에게도 손길을 허락하지 않는 거만한 눈표범이 딱 한 번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는 것 같다. 라틸은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쓸었다.

1655110100228.png“아파?”

그가 아프지 않은 걸 이미 알지만,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라틸을 뚫어져라 올려다보던 라나문이 그 손길에 맞추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틸은 자신의 입에서 침 넘기는 소리가 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여기서 침을 삼키면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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