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사랑이 시작되는구나2021.05.23.
라나문은 눈은 호수에 고정하고 있었으나, 사실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계산 중이었다. 자존심을 굽히고 라틸을 계속 찾아가서 총애를 받는 것과 자존심을 지키고 라틸에게 총애를 받지 못해 국서가 못 되는 것. 두 가지 중 어떤 게 더 나을지를 두고서. 표정이 고요하다고 해서 라나문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머리만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와중에 대신관이 찾아와서 떠드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갑자기 웬 괴물까지 나타나자 그는 더욱 귀찮고 피로해졌다. 좀 놀라기도 했지만 귀찮은 마음이 더 크다 보니 눈도 깜짝하기 싫었다. 그저 이걸 대신관에게 처리하게 해야 하나 내가 처리해야 하나, 어느 게 덜 귀찮을까만 고민될 뿐. 그 사이 괴물은 어느새 라나문의 코앞까지 다가와 흉악한 이빨을 쩍 들이밀었다. 그러나 위태로워 보이는 그 순간. 라나문의 눈앞에 다가온 괴물의 얼굴에 없던 눈이 생겨나더니, 괴물이 갑자기 고라니가 오중창을 하는 듯한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괴물은 단 한 번에 검은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
그래도 여전히 라나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라나문 님은 참 대범하시군요!”
이를 지켜보던 대신관이 옆에서 감탄하자, 그제야 라나문은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엄지와 검지로 누르며 턱으로 아까 괴물이 사라진 자리를 가리켰다.
“자네가 했나?”
“글쎄요.”
“자네가 했겠지. 잘했다.”
중얼거린 라나문이 대신관의 어깨를 툭 치고서 정자 밖으로 나가 천천히 사라지자,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던 구벨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감탄했다.
“굉장하네요. 저 사람, 진짜…… 와. 괴물 목구멍에 키스하기 직전이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네요.”
* * *
“대신관이 생각보다 강한 것 같더군.”
방 안에 들어선 서넛은 문을 닫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칼라인이 창틀에 한 발만 걸치고 앉아 와인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서넛은 그 잔 안에 담긴 붉디붉은 액체를 바라보며 문을 닫았다.
“대신관이라니요?”
“다크리처가 라나문을 공격하는데, 대신관이 손도 대지 않고 없앴다.”
“대신관의 힘이란 게 그런 식으로도 공격한 가능한 거였습니까?”
“모든 대신관이 가능한진 모르겠지만, 그자는 딱 보기에도 가능해 보이잖아.”
아. 서넛은 대신관의 위협적인 팔 굵기를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지금은 로드가 아직 각성하지 않았으니, 대신관이 방패막이도 되고 유용해 괜찮지만…… 혹시라도 각성하게 되면 바로 죽이는 게 낫겠다. 그 정도로 위험하다면.”
말을 마친 칼라인은, 한 모금 더 마시다가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서넛 쪽으로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넛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대신관이 대적자일 확률은 없습니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럼 가능하긴 한 겁니까?”
“글쎄. 대신관이 대적자였던 적도 없고, 전투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적도 없다.”
칼라인이 손안에서 잔을 굴리자, 잔이 기울어질 때마다 붉은 액체도 모양을 바꾸면서 유리 안에서 계속 움직였다. 칼라인은 한동안 그 자세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다른 대신관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서지도 않지.”
“그러면 꼭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칼라인은 잔 굴리던 걸 아예 멈추고 서넛을 쳐다보았다. 서넛은 이젠 완전히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두 팔을 자기 무릎에 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칼라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물었다.
“그자가 마음에 드나 봐?”
서넛은 부정하지 않았다.
“싫진 않습니다.”
칼라인도 그 대답에 픽 웃었다. 그러나 짧은 미소는 바로 사라졌다.
“싫어하도록 해봐라.”
뒤이어 나온 무정한 대답에 서넛이 흠칫해 보자, 칼라인은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작은 정에 휩쓸려 계속 봐주다간, 큰 정을 잃고 후회하게 될 테니.”
냉정한 말 같았으나 옆에서 보는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서넛은 누구보다 강인해 보이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로드의 전생 얘기입니까.”
칼라인은 옛날이야기를 잘 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쓸모없기 때문에. 그래서 슬쩍 흘러나온 옛날이야기의 끄트머리를 잡고 물어본 것이지만, 칼라인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다시 손에 든 액체만 마시기 시작했다. * * *
‘또 시작됐다…… 또 도미스의 기억이야.’
라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숲의 공기. 욱신거리는 뺨과 눈물이 찔끔 나올 것처럼 아픈 턱, 못이 파고드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발목. 이젠 이게 누구의 기억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몇 번 들어왔다고 좀 익숙하긴 하네.’
통증이 이리 생생한 걸 보니, 아무래도 칼라인과 하얀 머리가 도미스를 구해 준 직후 상황 같았다.
“고맙습니다.”
역시나. 도미스가 작게 중얼거리고 있다. 흙바닥만 보이나 했더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인사를 하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가면 또 좀비한테 걸릴 텐데.”
하지만 하얀 머리가 놀려대자, 도미스는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고서 다시 반 보 앞으로 돌아왔다. 하얀 머리는 발로 툭툭 쳐서 좀비 위에 나뭇잎을 건성으로 덮다가, 그런 도미스를 보더니 친절한 척 웃으면서 다가와 제안했다.
“마을까지 데려다줄게.”
그 말에 도미스는 쩔쩔매면서 손을 휘저었다.
“괜, 괜찮은데요.”
양부모에게 버려진 직후라서일까? 그녀는 조금 전 이 하얀 머리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와 칼라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머리가 갑자기 도미스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자, 도미스는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얀 머리가 방긋 웃기까지 하자 도미스는 순간 얼어서 입을 벌렸다. 하얀 머리는 도미스의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더니, 슬픈 척 말했다.
“우리가 안 괜찮아서 그래.”
“네……? 혹시 걱, 걱정되어서 그러시면 저는 진짜 괜찮…….”
“너 좀비한테 물렸잖아.”
“!”
“얼마 못 가 좀비가 될 텐데. 우리가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해줘야지.”
하얀 머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자, 도미스는 기겁해서 칼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라인을 신뢰해서 그런다기보다는 그냥 당황해서 아무나 근처에 있는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그만 놀려.”
칼라인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더니, 자기 코트를 벗어서 도미스에게 걸쳐주었다. 하지만 도미스는 아직도 놀라서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고, 그 고동은 라틸 역시 생생하게 느꼈다.
“아까는 질문하는데 왜 도망갔지?”
그러다 칼라인이 질문을 던지자, 도미스는 대답하는 대신 자기 발목을 곁눈질했다. 발목의 상처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 통증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하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어도 자신이 좀비에게 물렸단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도미스도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단 걸 알고 있구나. 그러면 저 하얀 머리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겠지. ……무서워하고 있네.’
도미스의 손이 달달 떨리자 라틸은 자신이 다 안타까워졌다.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을 만큼. 그때, 놀랍게도 아주 희미하게 도미스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흑마법사를 찾는 걸 보면 이 사람들은 분명 ‘사냥꾼’이야.
‘이젠 기억에 이어서 속마음까지 들리냐…….’
기가 찼지만, 어차피 기억을 꿈으로 꾸나 속마음을 들으나 별 차이는 없기에 라틸은 능력이 확장된 데 집중하는 대신 도미스가 말한 ‘사냥꾼’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일반적인 사냥꾼을 말하는 뉘앙스는 아닌데.’
그 사이에도 도미스는 계속해서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흑마법사로 오해하고 있잖아. 그럼 저 사람도 엄마를 잡으러 온 건가? 아버지는 내가 저주받은 존재라고 욕했지만…… 그건 아닐 거야. 당연히 엄마도 흑마법사가 아니고.
‘젠장. 발목 아파.’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니, 분명 엄마를 사냥하려 할 거야. 어쩌지?
발목이 엄청나게 아픈데도 도미스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인지, 생각하기에 바빴다. 그러더니 천천히 시선을 들어 칼라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말을 했다.
“내, 내가 흑마법사라서요. 그래서 도망갔어요. 무서워서.”
그녀는 더듬거리면서도 최대한 흑마법사처럼 보이기 위해 어깨를 쭉 폈지만, 하얀 머리가 바로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자 그 어깨는 도로 오그라들었다.
“요즘 흑마법사는 좀비 하나 처리 못 하는 거야?”
하얀 머리가 놀려대자, 도미스는 얼굴이 빨개진 게 분명하다. 라틸은 얼굴에 화끈거리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저 하얀 머리. 엄청 짓궂잖아? 애 좀 그만 놀려대지. 구해줘 놓고선 아주 장난감처럼 대하네.’
다행히 이 꼴을 보던 칼라인은 나서서 하얀 머리에게 당부해주었다.
“그만 놀려.”
“하지만 이 자칭 흑마법사 아가씨가…….”
“기르골. 그만 놀려.”
거듭 말한 칼라인은 이윽고 도미스 쪽을 보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업혀.”
라틸은 칼라인과 도미스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단 걸 알기에 그 제안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도미스는 무척 놀랐는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부상이 큰 건지, 그녀는 그 몇 걸음조차 발목이 아파 제대로 가지 못하고 휘청였다. 바닥에 쓰러질뻔한 그녀를 칼라인은 휙 잡아 일으키고서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 상태로는 속도가 안 나서 그래. 내가 답답해서 업고 가려는 거니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다.”
그래도 도미스가 주저하자, 칼라인은 좀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어쨌든 이 때까지만 해도 칼라인이 도미스를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은 건 분명해 보였다. 도미스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기가 죽어서 웅얼거렸다.
“죄송해요. 나는 그냥 걱정이 되어서…….”
“기르골이 한 말 때문에 그래? 좀비가 되면 죽일 거라 해서? 걱정 마. 좀비가 되었을 땐 우리를 뜯어먹겠단 생각 외엔 두려움도 없어질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
“?”
“내가 좀비가 되어서 그쪽을 깨물면…….”
그 소리에 칼라인은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아까의 답답해하는 표정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마치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태도여서, 도미스는 다시 얼굴에 열이 올라 속으로 항의했다.
-못 할 말을 한 게 아닌데. 왜 저렇게 웃어?
* * * 라틸이 눈을 번쩍 뜨고 확 상체를 일으키자, 시종장이 근처에 있는 책상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서 놀라 물었다.
“폐하?”
라틸은 당혹스러워서 얼굴을 쓸었다. 졸았다. 침대에서 잔 게 아니라 책상에 엎드려서 불편하게 잤다. 그런데 그사이에 또 도미스의 꿈을 꾼 것이다. 점점 빈도가 잦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라틸이 대답이 없자 시종장은 결국 걱정이 되는지 다가오며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라틸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계속 일하라 손짓하자, 시종장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가 앉았다. 라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두 손으로 얼굴을 다시 비볐다. 그래도 오늘은 이전에 꾼 도미스의 기억들보다는 보기 그나마 나았다. 최소한 쫓기고 맞고 무서워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아. 도미스는 무서워하긴 했구나.’
하지만 그것보다 라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깨어나기 전에 칼라인이 자신을 향해 지어준 그 웃음이었다. 라틸은 괜히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칼라인 뭐야. 도미스 기억 속에서 되게 멋지게 남아 있잖아.’
그 미소라니. 그런 미소는 라틸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미소였다.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호감을 느낄 때나 나타날 법한 미소. 누군가를 새롭게 볼 때 터져 나오는 그런 미소. 그걸 떠올리는데 순간 라틸은 심장이 욱신거려왔다.
‘아니구나. 나한테 지어준 미소가 아니지. 도미스한테 지은 미소였어. 착각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