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첫사랑이란 걸 들키면 안 돼2021.05.19.
라틸은 아이니 황후와 처음 만난 날, 그녀가 자신의 단골 친구라면서 주고 간 술을 떠올렸다.
‘그날 술에 취해서 클라인을 만났지.’
카리센 명주라는 게 설마 그 술일까? 라틸은 클라인이 그 독한 술을 명주랍시고 가져오면 어쩌나, 괜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딱 예상대로였다. 따뜻한 물에 느긋하게 머리를 감은 다음 틀어 올리고서 나가보니, 클라인이 테이블 위에 그 술병을 내려놓고 있었다.
“너희 나라는 왜 이렇게 술을 독하게 마셔?”
그걸 본 라틸이 툴툴거리자, 클라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만만하게 굴었다.
“이 정도가지고 독하다고 할 수 있나요.”
참으로 의기양양하고 호기로운 태도였으나 라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술 마시고 뻗어서 잘 자던 사람이 갑자기 왜 주당이 됐대?”
“역시 다 기억하고 있었군요.”
라틸이 ‘아차’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클라인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뭘 부끄러워하냐고?
“사절단 대표로 가서 술 마시고 뻗어 있던 일이 자랑은 아니지.”
황녀가 아니라 일반 귀족이었더라도 부끄러웠을 일이었다. 그래 놓고서도 당당한 사람도 어딘가엔 있겠지만.
“함께 뻗었던 황자가 폐하의 남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이 앞에 있는 클라인 같은 사람. 낯부끄러운 추억을 좋게 해석하는 그의 말에, 라틸은 코웃음을 쳤다.
“그 당시엔 내 남자가 아니었잖아.”
“그때가 이젠 우리 둘만의 추억이지요.”
라틸이 코웃음을 치고서 코르크 따개로 술병을 따자, 클라인은 자연스럽게 잔을 내밀면서 또 놀려댔다.
“처음 뵈었을 땐 정말 술주정뱅이 같으셨는데.”
“누가 누구더러 술주정뱅이란 거야 이 술주정뱅이가?”
“먼저 취한 건 폐하시잖아요.”
“먼저 깬 것도 나거든요?”
라틸이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자, 클라인은 라틸의 손에서 술병을 부드럽게 빼내 가져가더니, 테이블에 놓인 빈 잔에 자신도 술을 따랐다. 라틸과 달리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라틸은 자연스럽게 클라인이 따른 술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라틸의 손이 닿기 전. 클라인은 자기가 따른 술을 자기가 가져가 버렸다. 얘 좀 봐라? 라틸이 황당해서 쳐다보자, 클라인은 방긋 웃더니 너무 많이 따라서 아직도 조금씩 표면 너머로 술이 흘러넘치는 잔을 라틸의 앞에 두며 말했다.
“폐하 건 이거.”
그러고는 예쁘게 따른 잔을 자기 앞에 두며 또 말했다.
“제 건 이거.”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게 황당해서 라틸이 묻자, 클라인이 태연스레 물었다.
“넘치게 마시고 싶어서 넘치게 따르신 거 아닙니까? 저는 요 정도가 딱 맞습니다.”
클라인이 날름 반 정도 따른 술잔을 가져가 먼저 마셔버리자, 라틸은 더욱 황당해졌다.
“서로한테 따라주는 거 아니었나?”
“오늘은 예외로 두시고 싶으신 거 아니었는지요.”
라틸이 황당해서 다시 헛웃음을 터트리자 클라인은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꾸며내며 충고했다.
“너무 많이 취하진 마십시오, 폐하. 체면과 간에 좋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나보다 술도 약하면서.”
“전 술 취한다고 해도 주정을 안 부리잖습니까.”
“나도 안 부리거든?”
“폐하는 많이 부립니다.”
“안 부려.”
“그럴 리가요. 아직도 기억에 선한걸요. 폐하께서 술 마시고서 제게 매달리던 게요.”
“누가 매달렸다고?”
라틸이 발끈해서 묻자, 클라인은 술을 다시 한 모금 홀짝 마시더니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라틸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조금 숙여 귀에 속삭였다.
“폐하께서요. 제게. 울면서 어찌나 절 붙잡으시던지.”
“기억에 없는데.”
“대체 언제부터 절 그리 좋아하신 겁니까?”
“누가 누굴 좋아했단 거야.”
“저를 손에 넣으시고도 모른 척하시다니. 자존심이 강하시군요, 폐하는.”
클라인이 한숨까지 폭 내쉬자 라틸은 더욱 기가 막혀왔다. 술 두 모금에 쟤가 완전히 취했나?
“누가 보면 신랑한테 차인 사람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클라인이 장난스럽게 이 말을 하고서 다시 술을 마시는 순간. 라틸은 자신도 얼른 손을 뻗어서, 내내 안 마시려 버텼던 넘치는 술잔을 잡아 한 번에 꿀꺽꿀꺽 식도 안으로 털어 넣었다. 라틸이 너무 급히 마셔대자, 클라인이 황급히 잔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빨리 취합니다, 폐하.”
“어. 아. 좀 취기가 오르네.”
사실 너무 놀라서 전혀 술기운이 오지 않았지만, 라틸은 일부러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클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클라인은 고개를 기웃하고 있었는데, 저게 무슨 의미의 기우뚱인지 알 수 없어서 라틸은 괜히 불안해졌다. ‘신랑한테 차인 사람’이란 말을 되짚어 생각하나? 아니면 갑자기 술을 마셔대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후자이길 바란다. 라틸은 얼른 침대로 가서 앉아 베개에 몸을 옆으로 기댔다.
“아 취해.”
클라인은 영 미심쩍어하는 얼굴이었으나, 일단 자신도 잔을 내려놓고서 라틸 가까이로 와서 옆에 놓인 이불 끝을 잡아다 배에 덮어주었다.
“거봐요. 폐하가 술에 더 약하시다니까.”
아니라고 발끈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게. 좀 덥다. 창문 좀 열어줄래?”
라틸이 부탁하자 클라인은 바로 창문을 열러 갔고, 그 틈에 라틸은 잠든 척 눈을 감아버렸다. 창문을 닫고 돌아선 클라인이 “안 주무시는 거 같은데요.”라고 웃어댔지만, 라틸은 단단히 눈을 감고서 절대로 뜨지 않았다.
‘미치겠네. 클라인이 1/3 정도의 진실을 알고 나니까 더 신경 쓰여. 하이신스한테 편지로 이 얘기를 좀 해봐야겠다. 이걸 어떻게 할지.’
* * * 일주일 동안 떠나 있었더니 그새 이 새로운 집이 친근하게 여겨져서, 대신관은 바로 잠드는 대신 수행사제 구벨을 데리고서 천천히 밤 산책을 시작했다. 구벨은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대신관을 따라 멍하게 걸어 다녔다. 그러기를 15분 가량.
“응?”
대신관이 멈추어 서더니 어느 방향을 보며 호탕하게 외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라나문 님!”
외치자마자 대신관이 그 방향으로 바로 달려갔으므로, 구벨은 마지못해 그 뒤를 따라 뛰어갔다. 대신관이 간 곳은 정원 동쪽 구역에 있는 호수의 정자였다. 라나문이 정자 가장자리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라나문은 미간을 아주 조금 찌푸리고서 대신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 늦은 밤에 여기서 무슨 일이십니까?”
누가 봐도 환영하는 내색이 아니었으나, 대신관은 얼른 곁으로 가 서더니 까맣게 보이는 호수를 보며 물었다.
“수영하시려고요?”
“야밤에 호수에서 수영하는 취미는 없는데.”
“하하, 사람이 어떻게 하던 것만 하고 사나요. 새로운 시도도 해봐야 새 취미도 생기는 거지요.”
“커다란 수영장을 두고 굳이 호수에서 수영하는 취미를 가지고 싶진 않군.”
라나문은 계속 쌀쌀맞은 목소리였으나 대신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할 말만 했다.
“라나문 님도 근질이 좋으니, 잘 훈련하면 좀 더 벌크업이 가능할 텐데요.”
구벨은 대신관이 너무 오지랖 넓게 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대신관도 라나문처럼 좀 가만히 의젓한 분위기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이 몸 자체로 완벽하다.”
하지만 라나문의 당당한 답변을 듣자, 구벨은 그 생각을 얼른 취소했다. 세상에. 스스로 완벽하대. 구벨은 괜스레 자기가 민망해져서 라나문을 힐긋거렸다. 원래 귀족들은 저런 말을 태연하게 하나? 맞는 말 같긴 한데. 그래도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 않을까?
“하하, 완벽하시긴요. 팔이랑 가슴이랑 다리 쪽으로 근육을 더 찌워야지 완벽한 거지요. 지금은 좀 가느다랗습니다.”
이 와중에 그의 대신관은 악의도 없고 눈치도 없었다.
“내 팔다리가…… 가느다래?”
자신이 완벽하다는 게 진심이었던지 라나문의 표정이 서늘해지자, 구벨은 결국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라나문 님. 대신관 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기준이 두껍습니다. 라나문 님은 완벽하세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라나문은 어깨도 넓고 자세도 발랐으며, 화가들이 가장 선호할 만한 적당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내 기준이 정확한 거다, 구벨.”
하지만 거기에 대고 대신관이 또 눈치 없이 호탕하게 웃자, 구벨은 ‘우리 대신관님은 눈치가 근육이 되셨나 보다.’라고 한탄하며 괜히 라나문을 곁눈질했다. 다행히 라나문은 더이상 대신관을 신경도 쓰고 싶지 않은 듯 다시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구벨은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섭다고 생각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외모가 바로 이렇지 않을까. 외모도 외모지만 그 분위기가 참으로 서늘하고 맑아서, 호숫가에 선 라나문은 호수의 정령처럼 보였다. ‘언젠가 황제가 라나문에게 빠질지 말지 내기를 하자’고 누군가 제안한다면, 바로 ‘빠진다’ 쪽에 웃돈까지 얹어 걸 정도로. 반면 대신관님은…….
“아! 달빛이여! 신이 만들어 낸 이 완벽한 세상!”
얼굴로 치면 빠지지 않는데, 분위기가 어째 저렇게 다를까. 대신관이 두 팔을 벌려 달을 향해 외치자, 구벨은 너무 부끄러워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대신관이 신의 취향에는 확실히 맞는데, 황제의 취향에도 맞을까? 지금은 신선해서 곁에 두고 총애하지만, 나중에는 부끄럽다고 멀리하진 않을지, 구벨은 그게 걱정이었다. 생각하자니 머리가 아파져서 구벨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후궁은 힘드네요.”
황제가 대신관을 총애하면 총애하는 대로, 총애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걱정이 되다니. 하지만 지금 구벨이 신경 써야 할 건 라나문의 옆모습이나 달빛에 취한 대신관이 아니었다. 호수 저 아래쪽. 호수 바닥에 고정된 정자 다리로 스멀스멀 기어가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까만 밤의 호수 아래에서, 커다란 비단구렁이가 수영하는 것처럼 물살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자 위에 선 세 사람은 구도상 그것을 볼 수가 없었고, 그것은 어둠을 틈타 수월하게 정자 다리까지 도착했다. 그 무언가는 정자 다리를 타고 올라가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얼핏 보아서는 아주 거대한 구렁이 같았으나, 그 몸통에서 사람의 손자국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의 구렁이들과 달리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으며, 한 번씩 몸통 밖으로 나온 손이 사방을 가늠하듯 허공을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느릿한 속도로 정자를 타고 올라온 괴물은 정자 위로 슬그머니 몸통 끄트머리만 올려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정자 아래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아서, 괴물은 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찬찬히 세 사람 중 누가 자신의 공격 대상인지를 확인했다. 셋 다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었기에, 괴물은 틀라가 정해준 목표 대상을 대번에 구분해냈다. 그 순간. 대신관이 불쾌한 기운을 느끼고서 고개를 내렸고, 정확하게 괴물을 발견했다. 상대가 자신을 보았단 판단이 들자마자, 괴물은 지체없이 감춰두었던 두 다리를 꺼내 펄쩍 라나문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