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젠 널 믿을게2021.05.16.
라틸이 짧은 휴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마침 하이신스가 보낸 급보도 도착해 있었다.
“딱 잘 맞춰 오셨습니다, 폐하.”
라틸은 방에 들를 틈도 없이 바로 집무실로 걸어가며 시종장이 건넨 서신을 받아 펼쳤다.
“…….”
라틸이 무표정으로 서신을 내려다보자 시종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대답이요.”
“?”
“마음에 드는 대답.”
하이신스는 라틸과 말을 맞추어주겠으니, 라틸이 잡은 습격자는 자신에게로 보내 달라고 써두었다. 그러면 자기는 그 습격자를 다가 공작을 역습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대답이었다. 집무실에 도착한 라틸은 서신을 서랍 안에 넣으면서 시종장에게 지시했다.
“어쨌든 범인은 카리센에 보내야 하니까 범인을 인도할 사절단을 꾸려야겠습니다. 적당한 사람을…….”
잘 얘기하는가 싶던 라틸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미간을 구기자, 시종장이 의아해서 “폐하?” 하고 다시 불렀다. 라틸은 잠시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조금 바꾸었다.
“적당한 사람을 준비해주고, 타시르도 불러와줘요.”
* * * 집무실에서 몇 가지 급한 안건을 확인하자마자 라틸은 바로 하렘에 있는 게스타의 방까지 직접 찾아갔다. 라틸이 찾아갔을 때, 게스타는 그의 처소에 딸린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연한 보라색 꽃과 하얀색 꽃들이 어우러져 피어 있는 사이로 물뿌리개를 든 그의 모습은 그림처럼 포근했고, 라틸은 이 모습을 보자 자신이 게스타를 의심한 일이 더욱 후회되었다.
라틸은 게스타가 물을 뿌리다 말고서 허리를 숙여 꽃향기를 맡고는 햇살처럼 웃는 걸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며 그를 불렀다.
“게스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게스타는 화단 가꾸던 걸 멈추고서 고개를 돌렸다. 라틸을 본 그는 곧 귀까지 빨갛게 변하더니 허둥지둥 물뿌리개를 뒤로 감추었다.
“폐하.”
라틸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화단을 가꾸는 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쩔쩔매면서 중얼거렸다.
“그냥 날씨도 좋고…… 할 일도 없고…… 며칠 비도 안 왔고…….”
“변명할 일이 아닌데 뭘 그렇게 쩔쩔매.”
라틸이 그 모습을 보고 웃자, 게스타는 ‘그런가?’ 싶은지 고개를 기웃하더니 어색하게 라틸을 따라 웃다가 또 허둥거렸다.
“돌아오셨단 말씀을 들었지만 바로 집무실에 가셨다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설마 바로 여기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자 라틸은 가슴이 찡해졌다. 세상에. 내가 이런 애를 의심하고 있었다니. 라틸은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흙이 묻었는데…….”
품 안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심장만 콩콩 크게 뛰는 작은 동물. 새끼 토끼나 새끼 고양이, 강아지 같은 그런 작고 연약한 것들. 라틸은 게스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순하다 못해서 억울해도 제대로 하소연조차 못 하고 꾹 참고만 있는 미련한 남자. 라틸이 변명이라도 들어보고자 찾아갔을 때, 게스타가 아트락시 공작에 관해 말했더라면…….
‘하긴. 그때는 그 말을 들어봤자 변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폐, 폐하?”
라틸이 계속 품 안에 그를 두고만 있자 게스타가 더듬거리며 라틸을 불렀다. 게스타의 시종인 트리는 새로 심을 묘종을 들고 코너를 돌아 오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하지만 이미 트리를 본 후인지라, 라틸은 게스타를 놓아주고서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주었다.
“갑자기 이러시면…….”
게스타가 녹아내리는 솜사탕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라틸은 그의 손을 잡고서 방 안으로 데려간 다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쥐고서 사과했다.
“일단 사과할 게 있어.”
“사과요?”
“……네 편지를 봤어.”
“편, 편지라면…….”
“네가 네 자신에게 보낸 편지.”
라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까스로 진정하는가 싶던 게스타는 또 얼굴이 새빨갛게 또 달아올랐다.
“그걸 폐하가 어떻게…….”
너무 익어서 툭 치면 흐느적 뭉개져버릴 것 같았다.
“너한테 온 편지인데 너한테 전달할 필요는 없다 쓰여 있기에 이상해서.”
게스타가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자, 라틸은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게스타는 한동안 그 상태로 숨만 희미하게 쉬다가 나중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이 행복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평소보다 좀 더 활짝 웃은 게스타가 “폐하.” 하고 중얼거리며 라틸의 옆으로 가까이 달라붙자, 라틸은 얼른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 말간 표정을 보며 라틸은 결심했다. 이젠 누가 뭐라고 해도 게스타를 바로 의심하진 말아야지. * * * 라틸이 게스타를 찾아가 시간을 보냈지만, 클라인은 평소와 달리 여기에 열 받아 씩씩거리진 않았다. 클라인이 갑자기 마음이 넓어져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게스타가 오해를 사서 수군거림을 들었던 게 가엾어서 봐주는 것도 아니었다. 바닐이 계단 아래로 떨어진 사건 때. 혼자 넘어져서 떨어진 거라 증언했다던 목격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목격자란 자는 감히 자신의 시종을, 미끄럽지도 않은 바닥에서 혼자 떨어져 놓고서는 남 탓을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목격자가 바닐을 밀친 사람이 아니더라도 찾아서 혼쭐을 내주어야 했다. 물론 바닐을 밀친 사람은 더더욱 혼을 낼 거지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문밖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악시안이 안으로 들어와 알렸다.
“황자님. 목격자를 잡아 왔습니다.”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악시안은 복도와 침실 사이의 중간 방에 데려다 두었던 목격자를 질질 끌고 들어와 안에 패대기쳤다. 목격자가 바닥에 엎어지듯 무릎을 꿇자, 클라인은 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자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우리 바닐을 멍청이로 만든 자냐.”
목격자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덜덜 떨다가 “네?” 하고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일하던 와중에 갑자기 끌려와 이러고 있으니, 그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내 시종이 혼자 자빠져 놓고서 남 탓 하는 놈이라 몰아간 새끼냐고.”
그러다 클라인이 험악한 단어를 써 가면서 이를 드러내자, 목격자는 상황을 파악하고서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황자님. 저는 그저 보고 들은 대로 폐하께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내 시종을 멍청한 거짓말쟁이로 몰아가 놓고서, 보고 들은 대로 말한 거라고?”
클라인이 험악하게 웃으면서 한 손으로 목격자의 귀를 잡아당기자, 목격자는 놀라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앉았다.
“네 눈과 귀에는 내 시종이 거짓말쟁이 멍청이로 보였다. 이건가?”
“그게 아니라…….”
“똑바로 말해. 아니면 이 쓸모없는 귀 한 짝은 그대로 뜯어버릴 테니.”
클라인이 섬뜩하게 웃자 목격자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경국지색이라 불리는 외모와 고귀한 신분, 막대한 재산까지 갖춘 클라인이 자국에서 인기가 없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타리움에 온 후로 라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성격을 조금 누르긴 했지만, 그는 원래도 절대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귀가 뜯어질지 모른단 공포에 질린 목격자는 기억 속에서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샅샅이 더듬으며 빠르게 말했다.
“좀 이상해 보이긴 했습니다. 넘어지는 거야 혼자 넘어질 수도 있는데, 그러고 나서 난간까지 너무 길게 미끄러졌거든요. 바닥이 미끄럽지도 않았는데요.”
“이 새끼가, 역시 거짓말한 거 맞잖아!”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도 클라인이 더 날뛰자, 이번에는 악시안이 나서서 클라인을 말렸다.
“전하. 전하. 고정하세요.”
“이 자식이 우리 바닐을!”
“전하. 우선 뒷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죽이면 말을 못 합니다.”
클라인이 씩씩거리면서도 경고조로 손가락을 내밀자, 목격자는 더욱 두려워 덜덜 떨었다.
“사실대로 말해라. 그편이 멀쩡하게 살아나가기 쉬우니.”
악시안이 혀를 차면서 말을 보태자, 목격자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재빨리 자신이 보고 들은 걸 모조리 털어놓았다.
“혼자 넘어진 것도 맞고 주변에 사람이 없던 것도 맞습니다. 넘어지고서 난간까지 미끄러진 거리가 많이 길긴 했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저는 그냥 심하게 넘어져서 길게 미끄러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자님!”
“그걸 말이라고!”
“정말입니다. 게다가 그 밑에도 아무도 없어서…….”
“로르드 재상이 있었다던데?”
“있었지요. 하지만 재상님은 거리가 좀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클라인이 목격자에게 거짓말을 한 만큼 맞으라며 달려드는 걸, 악시안은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 사이 바닐은 목격자를 뒤에서 잡고 밖으로 끌어내듯 탈출시켰다.
“꺼져!”
하지만 바닐 역시 목격자 때문에 자신이 오해를 산 지라 목소리가 곱게 나가진 않았다. 목격자가 두려워하며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클라인은 눈을 매섭게 뜨고서 “로르드……”까지 말했다. 그러나 클라인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악시안이 딱 잘라서 반대했다.
“안 됩니다.”
클라인은 자신을 반쯤 부둥켜안다시피 한 악신안을 툭툭 쳐 떼어내면서 날카롭게 화를 냈다.
“사각지대란 게 있지. 저놈이 진범을 못 봤다면 로르드 재상은 봤을 거 아냐. 진범을 못 봤어도 실마리가 될 건 봤겠지!”
하지만 클라인이 무어라고 말해도 악시안은 다시 반대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로르드 재상을 억지로 데려와 추궁했다간, 두 나라 간에 사이가 나빠질 겁니다.”
바닐도 문을 닫고 들어오며 악시안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황자님. 재상에겐 기회를 보다가 물어볼 수밖에 없어요.”
호위와 시종이 둘이서 말리자, 클라인은 이를 갈면서도 더 고집을 부리는 대신 안락의자로 가 털썩 주저앉으며 사납게 중얼거렸다.
“진범이 어떤 놈이든…… 확실한 건 로르드 재상이 지키고 싶어 하는 놈이란 거지.”
클라인의 머릿속에 털 깎은 양처럼 늘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스타가 떠올랐다. 이어서 그 얼굴 위로 커다란 엑스자 모양이 생겨났고, 그 자리를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차지했다.
“역시 트리 그놈 같은데.”
* * *
“폐하, 클라인 황자님께서 본궁에서 일하는 하인 하나를 데려가 호되게 혼내셨다 합니다.”
게스타를 위로하고서 덩달아 몽실몽실해진 마음으로 돌아와 보니, 시종장이 이런 보고를 올렸다. 라틸은 ‘게스타는 참 포근해’라고 생각하면서 책상 앞으로 가 앉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인? 왜? 본궁 하인은 거기 갈 일이 없잖아?”
“클라인 황자님이 자국에서 데려온 시종이요. 연회 때 그 시종이 혼자 미끄러져 놓고서 ‘떠밀렸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목격자가 나서서 혼자 미끄러졌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거짓말이 걸렸지 않습니까.”
“아아. 그 일.”
“그 목격자를 데려다가 호되게 혼을 냈다 합니다.”
“클라인도 나름대로 조사해보고 싶은가 보죠.”
“그래도 그렇지 어디 외국인이…….”
“외국인이지만 내 후궁입니다, 시종장.”
라틸의 말에 시종장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으나, 클라인이 하인을 불러 혼을 낸 일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데려다가 때렸습니까? 팔다리 부러뜨리면서? 고문하고?”
“그건 아닙니다. 무섭게 굴긴 했다지만요.”
“그럼 넘어가요.”
그래도 시종장은 영 불만스러워하는 내색이었다. 그런 시종장의 표정은, 클라인이 보낸 심부름꾼이 찾아와 황자의 말을 전하자 더욱 부루퉁하게 변했다.
“폐하, 클라인 황자님께서 카리센에서 결혼 오실 때 들고 온 명주가 있으니, 밤에 함께 마시고 싶다 하십니다.”
“설마 그 명주가 아이니 황후 친구는 아니겠지.”
“예?”
“아니. 아니다. 들고서 한…… 일곱 시쯤? 내 방으로 오라 해.”
“예, 폐하.”
라틸이 흔쾌히 승낙하고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기 위해 잉크병을 따자, 시종장은 무거운 얼굴로 아트락시 공작을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