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만 찾아2021.05.12.
라틸은 게스타의 편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다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 아트락시 공작……?”
아직도 그가 자신을 찾아와서 ‘게스타가 가짜 황제를 잘 따른다’고 고자질했던 게 눈에 선한데. 자기가 게스타에게 직접 그러라 지시한 거였다고?
‘그래서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이 갑자기 사이가 나빠졌나.’
라틸은 편지를 도로 접은 다음 봉투 안에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로르드 재상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자신 역시 그의 입장이었더라면 아트락시 공작과 크게 싸웠을 테니.
‘욕심 많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뒤통수도 잘 치는 사람이었네.’
라틸은 혀를 찼다.
‘이걸 어쩐다.’
아트락시 공작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건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 주기에는 너무 얄미웠다. 게다가 라틸 역시 이 일로 게스타에게 실망해서 한동안 멀리하지 않았던가. 미안해서라도 무언가 해주어야 했다.
‘바보 같긴.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거야?’
게스타도 그렇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되지, 그걸 또 미련하게 당하고만 있어.
‘진짜 순둥이는 순둥이네.’
* * *
“너희는 게스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다 함께 모여서 휴가 마지막 날의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라틸이 평온한 어조로 툭 던진 말에, 자기들끼리 잘 얘기 하던 후궁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클라인은 계란을 떼어 먹다가 눈썹을 치켜올렸고, 타시르는 대신관에게 자기 상단에서도 신전 물품을 취급한다고 홍보하던 걸 멈추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대신관도 어리둥절해서 라틸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라틸이 거듭 권하자 대신관은 의아해하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근질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골격도 굉장히 바르고요. 제대로 운동을 시작하면 금세 큰 성과를 보실 듯한데…… 몇 번이나 함께 운동하자 권유해 보았지만, 몸이 약하다며 거절하시더군요.”
근질은 언제 본 거야? 그게 눈에 보여? 라틸은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온 평가에 잠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골격이 좋구나.”
“네.”
“타시르랑 클라인은?”
클라인은 턱을 거만하게 들면서 짧고 강렬하게 평가했다.
“구렁이 같은 비루먹은 무말랭이 강아지라고 생각합니다.”
“싫단 거지?”
“네. 특히 그 밑에 있는 시종은 볼 때마다 제 인내심을 자극하고 있어요.”
“타시르는?”
라틸이 자신에게도 질문을 건네자 타시르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하게 라틸을 보는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을 한 의도를 살피는 눈치였다.
“재밌고 귀여운 분이죠.”
‘셋 다 말이 다르네.’
라틸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웃하다가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가짜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왜, 사람들이 막 수군댔잖아. 게스타가 가짜 옆에 붙어 다니고 그랬다고.”
타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이 돌긴 했죠.”
라틸은 ‘바로 그거야’ 하는 신호로 손짓하고서 다시 물었다.
“너희는 이 소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클라인은 자기 혼자 가짜가 가짜란 걸 몰랐기 때문인지 아무 말 없이 식사에 열중했고, 대신관은 사람들이 남을 쉽게 의심한다며 걱정했다. 반면 타시르는 이번에도 라틸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는 우리 폐하야말로 왜 갑자기 게스타 님 이야기를 계속하는 걸까요?”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라틸은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게스타가 자기한테 써둔 편지를 봐서.”
“편지요?”
“아트락시 공작이 게스타한테 시켰나 봐. 가짜 옆에 붙어 다니라고. 게스타가 그걸로 마음고생을 좀 많이 한 거 같더라.”
대신관은 바로 슬픈 표정을 지었고, 클라인은 아까는 게스타가 싫다더니 이번에는 라나문이 조금 더 싫어진 듯 슬쩍 말을 바꿨다.
“라나문이 누구 닮아서 그런가 했더니 자기 아버지 닮아서 그런 거였네요.”
욕 한마디 섞지 않고 욕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클라인의 말에 대신관이 뜨악한 표정으로 옆을 보았으나, 클라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타시르는 어쩐지 재밌어하는 얼굴이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라틸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신신당부했다.
“혹시 누가 게스타를 그 일로 괴롭히면, 너희가 중간에서 좀 말려줘. 그거 때문에 말해준 거니까.”
* * *
‘아트락시 공작을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게스타에겐 휴가에서 돌아가자마자 잘 대해 줘야겠네.’
원래는 클라인의 세력이 커질 동안은 라나문이나 게스타나 둘 다 조금 멀리하려 했는데. 하지만 아트락시 공작 때문에 이런저런 소문에 휩쓸린 데다 라틸의 의심마저 받게 되었으니, 게스타는 이미 상처를 잔뜩 받았을 터였다. 그런 게스타를 여기서 더 밀어냈다가는 안 그래도 심약한 그가 얼마나 아파할지 라틸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이 일을 알게 된 건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 문제가 하나 더 생긴 거나 다름없어서, 라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서넛은 그런 라틸의 축 쳐진 어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좀 더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서넛 경. 사흘째 쉬고 있습니다.”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몇 개 좀 골치 아픈 일들이…… 아, 서넛 경.”
‘골치 아픈 일’이라고 하자 게스타 일 때문에 잠시 잊었던 클라인 건이 떠올랐다. 라틸이 부르자 한 걸음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서넛이 얼른 옆으로 다가왔다.
“네.”
그러나 막상 불러 놓고서, 라틸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원래 라틸이 하려던 말은 ‘클라인은 하이신스에게 연인이 있었단 이야기를 별궁에 와서 들은 것 같다. 나와 사귀었단 건 아직 모르는 눈치이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사람들 입단속을 잘 시켜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라틸이 하이신스와 사귀었단 걸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자주 붙어 다니긴 했지만 또래인 데다 신분이 비슷했기에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심받을 입장은 아닌 덕이었다. 그러니 클라인에게 하이신스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라틸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터. 이 와중에 라틸이 사람들을 입단속 시키면, 오히려 ‘내가 하이신스 옛 연인이다!’라고 알려주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폐하?”
“아닙니다.”
라틸은 마음을 바꾸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옆에 있으라고 부른 겁니다.”
“…….”
* * * 그 시각. 클라인은 자신에게 하이신스에 관해 이야기해 준 주방장 존을 찾아가서 그 영애가 누구인지 한 번 더 캐내려 애쓰고 있었다.
“형님이 어떤 영애에게 요리를 해주려 했다 그랬지?”
“예, 황자님.”
“누구에게 해 줬는지는 몰라?”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만드는 걸 도와드렸을 뿐이니까요.”
“잘 생각해봐.”
“……잘 생각해도 정말 만드는 것까지만 도와드렸습니다, 황자님.”
클라인이 팔짱을 끼고서 빤히 쳐다보자, 존은 거품기를 들고 그릇에 빠르게 돌리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저 호의로 하이신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인데, 클라인이 이 정도까지 호기심을 품고 달려들자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결국, 존은 그릇에 하얀 거품이 생기기 시작하자 거품기를 옆에 내려놓고 그 위에 설탕을 부으면서 책임을 황제에게로 돌렸다.
“폐하께 여쭈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폐하는 또 왜?”
“유학하실 적에 두 분이 제일 친하셨거든요. 하이신스 폐하께서 라트라실 폐하께 이와 관련한 상담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얘긴 없으시던데.”
“남의 연애 상담 내용을 함부로 이야기하긴 어려우니까요.”
존이 필사적으로 이유를 만들어내자 클라인은 그것도 그럴듯하다 생각하고서 주방 밖으로 나갔다. 황자가 나가며 번쩍거리는 옷자락이 사라지자, 주방장은 안심해서 삐걱거리는 휴대용 의자를 끌어다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방보조가 얼른 존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클라인 황자님은 호기심이 강한 분이네요. 이럴 줄 알았다면 괜히 알려드렸어요.”
“그러게 말이다.”
* * *
“그 영애라는 사람이 진짜 존재하긴 하는 거야?”
주방을 나온 후로도 한참을 돌아다닌 클라인은, 아무리 묻고 다녀도 하이신스의 첫사랑을 찾을 수 없자 호숫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빠르게 손부채질을 했다.
“짝사랑하시던 게 아닐까요?”
옆에서 함께 돌아다닌 시종 바닐이 얼른 챙겨온 부채를 꺼내며 물었다. 바닐이 빠르게 클라인의 얼굴에 부채질을 해주는 동안 호위인 악시안은 내내 제기하던 그 주장을 또 꺼내 들었다.
“이미 결혼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전하.”
“우리 형님을 뭘로 보는 거야?”
클라인이 발끈해서 묻자 악시안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제게는 주군이시지요.”
“말은 잘하지.”
클라인은 툴툴거리면서 괜히 발치의 돌을 주워 호숫가에 하나씩 하나씩 퐁당퐁당 던지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일어섰다.
“역시 안 되겠네. 한 번 더 폐하한테 가서 물어봐야겠다.”
“폐하는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모른다고 하셨지. 하지만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
“그건…… 거짓말을 할 정도면 알려줄 마음이 없으시단 게 아닐까요?”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리저리 잘 캐보면, 형님이 흔적을 흘려두었을지도 몰라.”
바닐은 부채를 접어 도로 챙기면서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첫사랑 영애를 찾아도 문제 아닐까요? 다가 공작은 아이니 황후께서 하이신스 폐하와 절대로 이혼을 못 하게 하려 들 텐데. 이런 와중에 찾아봐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가 공작이 사람을 보내 날 습격하고, 바로 대리공사를 보내서 자결까지 시키는 걸 보고 마음을 바꿨어.”
“어떻게요?”
“형수님은 좋은 분이지만, 다가 공작은 해로운 사람이야. 하지만 형수님이 다가 공작과 연을 끊진 않을 거잖아?”
악시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한숨을 내쉰 클라인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자.”
그런데 클라인이 두 부하를 데리고 동서쪽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려 하는데, 뒤쪽에서 “잠시.”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인이 멈춰서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근위기사단장인 서넛이 서 있었다. 클라인은 서넛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대번에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지?”
서넛은 대답 대신 역으로 되물어왔다.
“아직도 하이신스 폐하의 첫사랑이 누구인지 찾고 계십니까.”
“그런데.”
클라인이 불쾌하다는 듯 대답했으나 서넛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만 찾으십시오.”
그 말에 클라인은 더더욱 기분이 상해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서 서넛 쪽을 쳐다보았다.
“네가 뭔데 내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지?”
“황자님의 형님께서 굳이 그 이야기를 황자님께 하지 않은 건,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그 첫사랑의 끝이 아련하고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냐고 한소리를 하려던 클라인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너…… 우리 형님이 누구랑 사귀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