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준비된 덫2021.05.09.
라틸은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 창문 커튼 틈으로 들어온 조명과 창틀 그림자, 연한 녹색의 이불보였다. 몸을 감싼 이불은 가볍고 부드러웠고 공기는 더웠다. 뺨에선 아무 느낌도 없다. 라틸은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고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느새 깬 건지 다시 자신의 방이었다. 아까 숲에서 맡은 그 밤공기와 숲의 냄새가 코끝에 선한데도. 하지만 손을 더듬어 뺨을 만져 보아도 분명 아무 흉터도 없었다. 발목 역시 좀비에게 물린 자국 따위도 없고, 앞으로 넘어지면서 바닥에 찍은 턱에서도 통증은 없다. 라틸은 눈가를 더듬었다. 손가락에 눈물이 묻어 나왔다. 아픈 곳은 없었지만, 바닥에 턱을 찍으면서 찔끔 나온 눈물은 그대로였다.
‘젠장. 그 꿈은 이제 안 꿨으면 좋겠어.’
라틸은 그 무력한 감정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동시에 두려워졌다. 그토록 약했던 사람이 칼라인의 기억 속만큼 강해질 때는 얼마나 많은 일이 있던 걸까. 그게 다 꿈으로 나오는 건가?
‘그 하얀 머리 남자는 뭐였지? 기르골? 이상한 이름이던데.’
라틸은 눈가를 비비면서 마른 세수를 하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
하지만 아까 꾼 아슬아슬하고 아픈 꿈 때문인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잠을 자라고 비명을 질러댔고 실제로도 피곤했으나, 눈을 감을 때마다 그 숲이 떠올라 제대로 휴식할 수 없었다. 게다가 꿈을 꿀 당시엔 너무 상황이 급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시기 역시 좀 이상하다.
‘도미스의 기억에 좀비가 나왔다는 건, 좀비가 최근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게 아니란 건가? 이미 그 전부터 나오고 있었나?’
게다가 도미스는 좀비를 보자마자 바로 좀비라고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니 도미스와 칼라인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도미스는 허공을 달리던 그 흑색 마차를 보았을 때도 잠깐 놀랐을 뿐 거기에 대해서는 큰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라틸은 결국 도로 몸을 일으켜 앉고서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시계를 확인하고서 탁상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서넛과는 대화를 다 나눈 건지, 종을 흔들자 애런델이 들어왔다.
“물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물은 됐고…… 대신관을 데려와줘.”
“예.”
애런델이 밖으로 나가자 라틸은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다가 꼭 끌어안았다. 이대로 잠들면 또 그 꿈을 꿀지 모르는데. 그 이상은 꾸고 싶지 않았다. 대신관이 악몽에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도해서 나쁠 건 없었다. * * * 따뜻한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마시고 있자니, 잠시 뒤 대신관이 들어왔다. 라틸은 이불 사이에 들어가 차를 홀짝이다가, 대신관이 오는 걸 보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평소처럼 헐벗고 들어온 대신관은 라틸이 내려놓으려던 찻잔을 대신 받아 탁상에 내려놓고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악몽을 꿔서.”
라틸은 이불 사이에서 나와 무릎 걸음으로 대신관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커다란 몸에 기대어 앉았다.
“넌 대신관이잖아. 네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불렀다.”
대신관은 한쪽 팔을 조심스레 뻗더니 라틸의 몸을 감싸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완전히 대신관의 몸 안에 파묻힌 라틸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서 눈을 반쯤 감았다.
“혹시 자고 있었는데 내가 깨웠느냐?”
“아닙니다. 마침 잠이 오지 않아 팔굽혀펴기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팔굽혀펴기를 하고 나면 잠이 더 안 오지 않을까?”
덩달아 잠이 싹 달아난 라틸이 고개를 들자, 대신관이 라틸의 머리에 자신의 뺨을 기대면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전 아닙니다.”
“넌 진짜로 운동 좋아하는구나.”
라틸이 황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웃음을 터트리자, 대신관은 “그런가요?” 하고 중얼거리더니 라틸이 기대지 않은 쪽 팔을 내밀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돌처럼 솟은 그의 팔근육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지긴 해서, 라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눌러보았다.
“신기하네.”
라틸이 계속해서 근육을 꾹꾹 눌러대자, 대신관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이 팔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떤 루틴으로 운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 조용해졌나 싶어서 라틸이 쳐다보자, 그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왜 그래?”
의아해서 묻자, 대신관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폐하의 머리카락이 제 목덜미에 닿아서 조금 흥분됩니다.”
주저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솔직한 대답이 나왔지만. 라틸은 얼결에 대신관의 목덜미를 보았다. 계속 기대고 있던 터라, 정말 머리카락 일부가 대신관의 목덜미를 미역처럼 감싸고 있었다. 라틸이 킥킥대며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서 자신의 한쪽 어깨에 늘어뜨리자, 대신관은 아쉬운 듯 라틸을 더욱 꽉 잡아 자신의 몸에 붙였다. 라틸은 그 촉감이 좋아서 대신관에게 더욱 몸을 편안히 기대면서 눈을 감고 웃었다,
“넌 부드러운 돌의자 같아서 좋다, 자이신.”
하루 종일 운동을 해대서인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대신관에게서는 아무리 힘을 주어 기대도 넘어지지 않고 받쳐줄 것 같은 신뢰감이 있었다.
“폐하는 좋은 향이 나는 말랑한 대형 개구리 같습니다.”
“그러냐.”
“예.”
“입은 다물고 있어라.”
라틸이 손을 뻗어 자이신의 입술을 두 손으로 집어버리자, 자이신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라틸은 말랑말랑한 그의 입술을 슬쩍 당겨 보다가 손을 놓고서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보니, 대신관은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아?”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아 묻자 자이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폐하와 이러고 있는 게 좋습니다.”
“!”
꾸밈없는 대답이라서인가. 라틸 역시 덩달아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갔다. 라틸은 괜히 그의 팔뚝을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리다가 몸을 일으키고서 지시했다.
“내 옆에서 자거라.”
대신관이 어색하게 침대 위에 드러눕자, 라틸은 다시 명령했다.
“한 팔 뻗고 한 팔 들어봐.”
대신관이 시키는 대로 하자 라틸은 얼른 그사이에 들어가 대신관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러고서 한쪽 팔을 그의 허리에 두르고 눈을 감자 대신관이 엉거주춤 허공에 들었던 팔을 내려 라틸을 감쌌다. 완전히 그의 품 안에 안기자 악몽이 근처에도 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왔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향이 나서, 옆에 두고 있기 더욱 좋았다. 라틸은 이 상태가 딱 좋다 싶어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다음날 아침, 라틸은 커다랗고 단단한 몸뚱이를 꼭 끌어안고 머리를 비비적거리다가 뒤늦게 이게 누구인지 깨닫고서 고개를 들었다. 대신관이 어젯밤 자세 그대로 라틸을 품에 안은 채 누워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눈 밑이 퀭해 있단 거겠지만.
“못 잤느냐?”
그걸 본 라틸은 ‘좋은 아침’ 하고 인사하려다가 당황해 물었다. 혹시 머리가 무거워서 팔이 저리나? 클라인이 어깨 좀 베고 잤다고 팔에 쥐가 난 게 떠올라 조심히 묻자, 대신관은 아니라고 웅얼거리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잘 주무신 것 같습니다.”
“네가 옆에 있으니 악몽을 안 꿨어. 넌 악몽을 쫓는 역할도 하나 보다, 자이신. ……너는 전혀 못 잔 거 같은데.”
자이신은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만 누가 봐도 못 잔 얼굴이라, 라틸은 그와 아침을 먹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얼른 방으로 돌려보냈다. 여기에 두고 자라 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방에 돌려보내는 게 더 편하게 잘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너무 베개로 썼나.’
라틸은 괜히 미안해져서 볼을 긁적이다가 ‘오늘 밤에도 부르면 되겠네!’라고 잠시 생각했던 마음을 고이 접어 옆으로 치웠다.
‘버텨보다가 안 되면 불러야겠어.’
* * * 자이신은 그의 팔을 대고서 색색 잘도 자던 황제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누군가 온전히 그에게 기대 잠들어 있는 건 묘하게 뿌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은 잠이 들 때 가장 방어력이 약해진다. 그 상태로 황제가 그를 곁에 두었다는 건 그만큼 그를 믿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자이신을 지켜보는 수행사제 구벨은, 자이신의 입꼬리가 올라갈 때마다 입꼬리가 반대로 내려갔다.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대신관 님.”
“암! 좋지! 나쁠 리가.”
구벨은 대신관의 퀭한 눈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 안에서 대신관이 라틸의 베개 노릇을 했단 걸 모르는 그에게는, 대신관이 정말 황제의 후궁이 된 것처럼 여겨져 기분이 싱숭생숭했던 것이다.
“너무 대놓고 좋아하시니 제가 참. 뭐라 말씀드리기도 어렵네요.”
“구벨, 그거 아느냐.”
“뭘요.”
“폐하는 내 품에 쏙 들어오신다.”
“그런 거 안 궁금해요. 알려주지 마세요. 과한 정보입니다.”
“폐하가 나는 돌처럼 단단하다고 하시더라.”
“아 그런 거 안 궁금하다고요!”
구벨이 얼굴이 벌게져서 귀를 막자, 대신관은 어리둥절해서 수행사제를 쳐다보았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이 돌처럼 단단하다는 게 뭐가 어떻다고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구벨이 그와 황제 사이의 좋은 분위기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으므로, 대신관은 싫다는 이야기를 더 들려주는 대신 호탕하게 외쳤다.
“이렇게 기쁜 날에는 달리기를 해야지. 구벨, 별궁을 백 바퀴 뛰고 오자!”
“일단 좀 주무세요!”
* * * 대신관이 잠을 자기는 커녕 별궁을 백 바퀴 뛰면서 기쁜 마음을 운동으로 승화하는 그 시각. 라틸은 오믈렛과 샐러드만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내고서 별궁의 관리인을 찾아가 어려운 일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관리인은 워낙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지내기도 관리하기도 편하다고 대답했고, 라틸은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이 많다.”
“이런 곳을 관리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폐하.”
그런데 라틸이 짧은 대화를 끝내고 서재로 가보려 할 때였다.
“아. 폐하.”
관리인이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게 있는지 라틸을 불렀다.
“왜? 무슨 일이 있었나?”
의아해서 쳐다보자, 관리인이 큰 일은 아니라면서 덧붙이면서 보고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저, 게스타 님 앞으로 편지가 온 적이 있습니다.”
“게스타? 그게 왜?”
“폐하께서 가짜 폐하 사건으로 궁전을 떠나계셨을 때 온 편지입니다. 게다가 게스타 님 쪽으로 전달하지 않아도 되고, 여기서 맡아 두다가 게스타 님이 오면 그때 전해주면 된다고 겉봉에 쓰여 있었지요. 그래서 따로 전하진 않았습니다만, 혹시 싶어서요.”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관리인의 말처럼,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이상하긴 했다. 게스타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궁전으로 바로 보내도 될 텐데 굳이 여기로? 게다가 전해줄 필요도 없다고?
“내게 가져와라.”
라틸이 지시하자 관리인이 얼른 보관소에서 뜯지 않은 편지를 하나 가져와 내밀었다. 라틸은 서재로 가서 편지 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내는 사람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편지.
‘열어봐도 되나?’
남의 편지를 허락 없이 열자니 조금 찝찝하긴 했으나, 라틸은 고민하다가 결국 편지 봉인을 뜯었다. 이상한 점이 있는데다 편지가 온 기간도 수상쩍으니 확인하는 거였다. 그러나 약간 의혹을 품고서 편지 내용을 확인한 라틸은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편지는 게스타가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아트락시 공작님은 내가 가짜 폐하 곁에 머물러야, 가짜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단 걸 모를 거라고 하신다. 그러고는 내게 가짜 폐하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런 거라면 라나문이 해도 될 텐데, 왜 굳이 내게 시키시는 건지.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괜히 아버지와 공작님 사이가 더 틀어질까 봐 무서우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답답하고 불안한데. 이런 속내를 털어놓을 곳이 없으니 그저 나한테 편지나 쓰는 수밖에. 폐하께서 괜한 오해를 하시면 안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