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두 번째 만남2021.05.05.
한때 연인이었던 이의 동생이자 지금은 자신의 연인이 된 사람에게, ‘네 형과 사귀던 여자는 나야’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하이신스는 동생에게 자신과의 과거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즉, 하이신스 역시 두 사람 사이를 클라인에게 알릴 마음이 없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라틸이 진실을 말해 버리면, 자신과 하이신스는 그렇다 쳐도, 하이신스와 클라인의 사이까지 덩달아 나빠지게 된다. 게다가 클라인. 차라리 하이신스에게서 밀정 노릇을 지시받고 여기에 온 거라면, 진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상처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클라인은 하렘의 남자들 중에서도 제일 머리가 맑았다. 착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제일 맑은 성격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 맑은 마음으로 그는 라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클라인에게 진실을 알려준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폐하?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클라인이 재차 질문을 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라틸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손수건으로 또 입가를 문질렀다. 이걸 정말 어쩐다……. 그러고 있자니 클라인이 다 알겠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도 모르시는군요?”
라틸은 손수건을 입에서 떼고서 괜히 각도를 맞추어 접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황제지만 모든 걸 다 알진 않지…….”
“게다가 당시엔 황태녀도 아니라 그냥 황녀였으니까요.”
“그럼…….”
“근데 왜 계속 말끝을 그리 아련하게 늘이십니까?”
라틸은 큼큼 괜히 헛기침을 하고서 다 접은 손수건을 클라인에게 건네고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십니까?”
“생각해 보니 내가 바쁜 일이 있다.”
“생각해 봐서 바쁜 일이면 덜 바쁜 일 아닌가요?”
라틸은 대답 대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걸음걸음마다 심장이 콩콩 뛰어서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클라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와서야 라틸은 벽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쟤는 모르던 걸 왜 갑자기 알게 된 거야? * * *
“괜찮으십니까?”
라틸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자 서넛이 곁에서 물었다.
“안 괜찮습니다.”
라틸은 이번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안 괜찮았다. 클라인이 진실을 안 후 상처받을 것도 걱정되었고, 이후 하이신스와 클라인의 사이가 어떻게 틀어질지도 걱정되었고, 하이신스가 자신을 원망할지 모른단 것도 걱정되었다. 심지어 이 걱정에 하이신스 걱정이 포함된 것까지 걱정되었다.
“아.”
그러다 라틸은 온실에 있을 때 클라인이 서넛을 민망하게 만들었던 걸 기억 내해고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서넛은 대번에 그 기색을 눈치채고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서넛 경은 괜찮습니까?”
“저는 클라인 님이 상처받든 말든 관심 없습니다.”
“엄청 솔직하네. 근데 그거 물어본 거 아닙니다.”
“그럼요?”
“서넛 경이 괜찮냐고요. 아까 온실에서…….”
라틸이 말끝을 흐렸으나 서넛은 라틸이 말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눈치챈 듯 흐릿하게 웃었다. 아직 대답을 듣진 않았지만, 라틸은 서넛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때 그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감정이 상했겠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폐하와 자주 어울렸으니까요. 어릴 땐 제가 코도 풀어드렸-.”
그런 얘기까진 안 해도 되거든? 라틸이 손으로 입을 막아 버리자 서넛의 눈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그런데 이마에 묻은 꽃가루조차 털지 말라 하니 좀 머쓱했죠.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서넛 경.”
“이제 폐하는 다 큰 성인이시고, 저는 폐하의 호위이지 폐하의…… 아니니까요.”
서넛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어서, 라틸은 저도 모르게 멈추어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서넛은 태연하게 웃었다. 무척이나 담백하게. 착각이었나? 순간 떠오른 생각이 민망할 정도로 말끔한 미소여서, 라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웃했다. 그때였다.
“저…… 서넛 경.”
어느새 두 사람이 라틸의 방 앞까지 도착해 있었는데, 그 옆방에서 시녀인 애런델이 나오다가 둘을 발견하더니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서넛이 돌아보자 애런델은 주저하다가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라틸이 ‘난 신경 쓰지 말고 말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애런델은 그제야 안심하고서 서넛을 향해 말을 이었다.
“서넛 경의 사촌 동생인 엘리자벳 양과 제 오빠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걸 아시나요?”
“부끄럽지만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어 모르겠습니다.”
서넛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애런델은 조금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렇군요. 확정된 건 아니지만 말이 오가고 있어요. 저기, 그 일 때문에 물어볼 게 몇 가지 있는데. 시간을 좀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아는 게 없어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래도 서넛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애런델이 민망한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라틸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뭘 도와달란 거지? 서넛에게 시간을 주란 건가?’
“가문 일이라는데 둘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와. 어차피 나는 계속 방에 있을 거니까.”
대충 그런 뉘앙스인 듯해 라틸이 적당히 중재하자, 서넛은 그제야 알겠다고 중얼거렸다. 애런델이 행복하게 웃으면서 앞서 걸어가고 서넛이 그 뒤를 따라가는 걸 가만히 보다가,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왜 저렇게까지 기뻐하지? 서넛 경 사촌이 인기가 좋은가? 아니면…… 애런델이 서넛을 좋아하나?’
* * * 방으로 돌아온 라틸이 얇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내려놓자, 하녀가 얼른 다가와 옷을 들고 나갔다. 라틸은 1인용 안락의자에 편안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종을 들었다. 다른 시녀를 불러다가 애런델이 혹시 서넛을 좋아하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틸은 종을 울리기 직전 마음을 바꾸어 종을 내려놓았다.
‘물어봐서 뭐 어쩔 건데.’
애런델이 서넛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한 것부터가 민망한 일일 테고, 서넛을 좋아한다 해도 거기서 라틸이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니, 사실 해줄 수 있는 건 있다. 하지만 라틸은 가짜 황제 사건 이후 몇몇 궁정인들과 조금 불편해진 상태였다. 그들이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라틸이 서운할 일은 맞는, 그런 애매한 처지 때문이었다. 다른 시녀를 구한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거란 생각에 그냥 익숙한 시녀들을 곁에 두고 있었으나, 이전처럼 그들에게 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서넛도 애런델이 좋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자신이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주는 일까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잘하겠지.’
라틸은 그렇게 정리를 끝내고서 이른 시간이지만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가 버렸다. 길게 궁전을 비울 수는 없어서 별궁에서 머무르는 기간은 고작 사흘뿐이었다. 오고 가는 기간까지 더하면 딱 일주일짜리 휴가. 이곳에 있는 사흘 동안엔 조금도 머리를 굴리지 않고 그저 편하게 늘어져 있고만 싶었다. * * *
‘미치겠네. 편하게 쉬고 싶다니까!’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일부러 남 눈치를 보느라 속으로 욕한 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도 말이 나가지 않을 뿐. 또다시 그 도미스란 여자의 기억 속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도미스는 더이상 그 오두막집에서 울고 있지 않았다. 이미 쫓겨난 듯 그녀는 울면서 숲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방은 깜깜한 밤이었고, 불빛이라고는 저 높은 곳 나뭇잎 사이사이로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달빛뿐이었다.
‘뺨 쪽이 아파. 시간이 오래 흐르진 않은 건가. 어쩌면 아직 몇 시간 안 지난 건지도…….’
덩달아 숨이 가빠져서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 도미스란 여자가 칼라인의 연인이 되는 건 알지만, 이후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알아서인가. 제발 이 여자의 기억은 그만 보고 싶었다.
‘나중에 죽는 장면까지 보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몰라도 이 한밤중에 애를 내쫓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라틸은 도미스란 여자가 가엾게 여겨졌다. 자신도 친오빠에게 ‘뱀파이어 로드일지도 모른다’면서 몰려 고생한 적이 있기에,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게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 라틸의 곁에는 모든 걸 알면서도 그녀를 믿어주는 칼라인이 있었다. 다 알면서 믿어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라틸의 편인 이들도 몇 명 있었다. 하이신스, 서넛, 타시르, 클라인, 게스타, 소스란…….
‘아. 게스타는 아닌가? 가짜가 가짜란 건 알았지만 가짜와 사이가 좋았다잖아.’
하지만 이 도미스란 여자에겐 자신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돌아갈 곳도 없고, 지금 상황을 봐서는 갈 곳도 없어 보인다. 나중에 칼라인을 만나 잘되리란 걸 알지만, 그조차도 끝이……. 그 순간.
“으!”
도미스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멈칫하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라틸 역시 덩달아 아래를 보게 되었고, 속으로 같이 비명을 질렀다.
‘XX!’
뒤덮인 나뭇잎 사이로 웬 앙상한 손이 빠져나와 있었던 것이다. 손만 있다면 그나마 낫다. 멀지 않은 곳에 머리까지 있었다. 그 머리에 달린 눈은 흉흉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얼굴 옆쪽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좀비?’
라틸이 눈치챈 것과 엇비슷하게 도미스도 “좀비……!” 하고 숨죽인 채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돌아서서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밤의 숲길에서 정신없이 뛰는 건 도끼로 제 발을 찍는 격이었다. 안 그래도 더듬거리면서 가까스로 나아가던 도미스는 얼마 가지 않아 바닥에 퍽 엎어졌다. 얼마나 세게 턱을 찍었던지, 라틸은 덩달아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아 씨. 엄청 아파.’
하지만 라틸은 빠르게 깨달았다. 지금 턱이 문제가 아니란 걸. 차갑고 축축한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주욱 끌어당긴 것이다.
“아아!”
도미스도 놀라 땅을 양손으로 짚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고 오히려 손가락만 아팠다. 이윽고 무언가 날카로운 게 발목을 꽉 깨물었고, 도미스는 다른 다리로 자신을 끌어당긴 무언가를 마구 걷어찼다. 그러면서 몸을 뒤틀다 보니, 아까의 그 좀비가 도미스의 발을 노리고 있었다. 썩은 부분이 거의 없던 그 귀족 영애 좀비와 달리, 이쪽 좀비는 이미 얼굴의 반이 썩어서인가. 그 모습이 더욱 흉악하고 끔찍하게 여겨져서 라틸은 속으로 욕을 빠르게 뱉어냈다.
‘걷어차 도미스! 머리통을 차버리라고!’
하지만 칼라인의 기억 속에서 상당히 강한 것 같던 도미스는 지금은 그리 강하지 않은 듯 무력하게 헛발질만 할 뿐이었다. 그때, 눈앞에 갑자기 새하얀 코트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코트 자락이 펄럭이며 앞을 잠시 가려주었다. 발목에 붙어 있던 그 날카로운 느낌 역시 쑥 사라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퍽 걷어차는 소리. 저 하얀 코트가 좀비를 걷어찬 것 같았다. 도미스는 숨을 몰아쉬면서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마침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드러나면서, 하얀 코트가 등에 메고 있던 창을 휘두르는 모습이 환상처럼 드러났다. 좀비를 순식간에 제압한 하얀 코트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다가온 누군가가 도미스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칼라인!’
일으켜 세워준 사람은 과거의 칼라인이였다. 하지만 아직은 연인 사이가 아니라서인지, 도미스는 칼라인에게서 떨어져 근처의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섰다. 칼라인은 도미스에게 괜찮냐고 묻는 대신 하얀 코트 쪽을 향해 말했다.
“좀비는 나뭇잎으로 덮어둬, 기르골. 이 아가씨가 보고 기겁하겠다.”
그 소리를 듣자, 창을 휘둘러 도미스를 구해준 사람이 창을 어딘가에서 뽑아 도로 등에 메면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하얀 코트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에서 유난히 신비하게 반짝이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