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본인에게 묻기엔 난처한 질문2021.05.02.
라틸이 밖으로 나가자 서넛이 자연스럽게 뒤로 따라붙었다. 라틸이 모른 척 걸어가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라틸을 따라왔다. 그러다 라틸이 온실 앞에 도착해 문을 밀려 하자, 그제야 먼저 손을 뻗어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여전히 이 온실을 좋아하시는군요.”
라틸은 흥 코웃음을 치고서 온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여름의 온실은 사실 따뜻하다 못해 후덥지근한 데다 공기마저 무겁게 여겨질 정도여서, 산책하기에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틸이 이 안에 들어온 건 어릴 때 이 별궁에 오면 늘 온실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라틸은 연한 주홍색 돌길을 쭉 따라 걷다가, 꽃나무 여기저기에서 서넛의 흔적을 떠올리고는 결국 그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서넛 경도 자주 같이 왔죠.”
“계속 무시하시기에 제가 너무 아름다워 꽃과 구별을 못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라틸이 황당해서 쳐다보자 서넛은 빙그레 웃더니 꽃나무 옆에 슬쩍 무릎을 굽혀 앉아 자신과 꽃이 나란히 붙게 만들었다.
“구분 안 가지 않습니까?”
“아뇨. 다 됩니다.”
“폐하는 여전히 안목이 없으십니다.”
능구렁이처럼 상대가 경계선을 슬며시 넘어오자, 라틸은 괜히 열이 받아서 서넛의 발등을 한 번 꽉 밟고 싶어졌다. 하지만 라틸은 자신이 한 번 뻥 걷어찼을 뿐인데 공처럼 날아갔던 주정뱅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을 차 본 적은 없지만, 장난삼아 서넛의 발등을 밟았다가 자신의 근위기사단장이 발등이 부러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라틸은 발등을 밟는 대신 서넛을 반쯤 진심으로 비꼬았다.
“난 안목이 없어도 대신관한테 치료받으면 낫습니다. 누구랑 달리 대신관을 꺼리지 않거든요.”
서넛이 대신관의 치료를 거부하는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는 걸 돌려서 표현한 거였다. 장난스레 말하긴 했으나, 그 안에는 라틸의 의심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눈치가 좋으니 다 알아들었을 텐데도 서넛은 모른 척 웃으면서 화제를 돌려버렸다.
“폐하.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넘어갈 거 같습니까? 핑계도 성의 없게 대기는.”
라틸이 그 능구렁이 같은 태도를 슬쩍 비난했지만, 서넛은 정말이라면서 라틸의 이마 언저리를 쳐다보았다.
“꽃가루가 묻었습니다.”
“꽃가루가 왜 나한테 묻습니까? 꽃에 얼굴 비비적거린 건 서넛 경인데.”
“그러니까요.”
진짜 묻어서 묻었다고 하는 거야 아니면 또 장난하는 거야? 라틸은 서넛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려서 괜히 이마 부근을 자기 속으로 쓱쓱 문질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잖아.”
하지만 꽃가루는커녕 먼지 한 톨 묻어 나오지 않았다. 이에 라틸이 눈살을 구기며 항의하자, 서넛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라틸의 이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쪽 아닙니다.”
그럼 어디냐고 물으려는데 서넛의 숨결이 머리 위쪽에서 느껴져 라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숨결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온 터라 코앞에 서넛의 넓은 가슴이 펼쳐져서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라틸은 시선을 얼른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 붙어 섰을 때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까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라틸은 놀라서 고개를 도로 위로 올렸다가 서넛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에 열이 올라 괜히 큰소리를 쳤다.
“거울!”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서넛이 입술을 씹으면서 입꼬리만 올리는 바람에, 라틸은 민망해져서 결국 그의 정강이를 툭 가볍게 치고 말았다.
“윽!”
“서넛 경!”
서넛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린 통에 놀랐지만, 장난친 거였던지 그는 바로 멀쩡해져서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댔다.
“아 진짜!”
화가 난 라틸이 씩씩거려도 그는 쉬이 웃음을 거두지 못하다가, 라틸이 부글부글 끓는단 표정으로 쳐다보자 애써 숨을 고르며 손을 조심스레 뻗었다.
“가루만 털어드리겠습니다.”
그의 손이 거의 이마에 닿았고, 라틸은 이번에는 확실히 위쪽을 쳐다보았다. 가운데가 확실하게 나온 그의 목을. 그러나 서넛의 손이 라틸에게 완전히 닿기 전.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클라인이 나타났다. 웃는 얼굴로 나타난 클라인은 서넛을 보자 잠시 표정이 굳었는데, 그것도 잠시. 곧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라틸과 서넛 곁으로 다가오더니, 친절한 목소리로 서넛을 향해 말을 걸었다.
“뭐 하는 거지, 서넛 경?”
“폐하께 꽃가루가 묻어 털어드리려 했습니다.”
서넛이 태연히 대답하자, 클라인은 ‘아 그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꽤 도량이 넓어 보이는 표정으로. 하지만 그건 표정일 뿐. 거기에 클라인이 대꾸한 말에는 뾰족한 가시가 가득했다.
“그런 건 폐하의 연인인 내가 할 일이지. 호위인 자네가 할 일은 폐하에게 뭐가 묻었나 살피는 게 아니라 잘 호위하는 거고.”
그러니 가서 호위나 계속하지? 클라인이 손가락으로 온실 입구를 가리키자, 서넛은 순순히 알겠다 말하고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지라, 라틸은 저도 모르게 서넛 쪽을 계속 쳐다보고 말았다.
“폐하.”
클라인이 라틸을 부르고서야 라틸은 자신이 지금 서넛이 괜찮나 살필 때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라틸은 클라인을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에게 대항할 만큼 키워줘야 했다. 두 가문 사이에서 난처해하는 중립 귀족들이 클라인 쪽에 힘을 보탤 정도로. 그러려면 클라인 스스로도 라틸에게 총애받고 있단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라틸은 클라인에게 말을 좀 부드럽게 하라고 지적하는 대신, 웃으면서 반쯤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자니 클라인이 조심스럽게 이마를 손으로 쓰는 게 느껴졌다. 피부를 뜨겁게 감쌌다 떨어지는 따뜻한 손길에 라틸은 저도 모르게 작게 탄식하며 눈을 떴다.
“너는 손이 따뜻해서 좋다.”
그러고서 눈을 뜨자 뿌듯하게 웃고 있는 클라인의 찬란한 얼굴이 보였다. 나라에서 얼굴로 유명하다는 게 이해가 갈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라틸이 잠시 넋을 놓고 감탄하는 사이, 클라인은 자연스럽게 라틸을 팔로 감싸 자신의 품으로 넣었다. 얼굴에 바로 닿는 단단한 근육의 느낌에 라틸은 저도 모르게 손을 조금 들어서 클라인의 배와 가슴 사이에 손을 올렸다. 오늘따라 클라인이 상의를 제대로 여미지 않은 터라, 손바닥 위로 곧장 탄력 있으면서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반면 손가락 끄트머리에서는 그가 건 목걸이 탓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이 느껴졌다. 라틸은 당황해서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라틸이 오늘 여기서 이 이상 진도를 나갈 마음은 없다고 말하기도 전. 클라인이 내내 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폐하?”
눈으로는 보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던 납작한 상자였다. 라틸은 분위기에 취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주려는 것이니 아마 로맨틱한 선물이겠지. 꽃일까? 라틸은 꽃 외엔 로맨틱한 선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한테 주는 거냐.”
라틸의 질문에 클라인은 당연하단 듯이 웃고는 마저 속삭였다.
“네. 눈사과입니다.”
라틸은 희미한 한숨을 내쉬면서 그쪽으로 손을 뻗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휙 도로 고개를 들었다.
“뭔 사과?”
* * *
“어떠십니까?”
여름의 온실은 후덥지근해서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안에서 뭘 먹을 환경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테라스로 자리를 옮겨서, 거기에 작은 테이블을 차리게 한 다음 클라인이 만들었단 그 눈사과를 꺼내 먹었다. 클라인은 라틸이 입가에 가얀 가루를 묻히고 입을 오물대는 걸 보다가 뿌듯하게 웃었다.
“맛있습니까?”
“어.”
라틸은 순순히 수긍했다. 처음에 납작한 상자에서 웬 얼린 사과 같은 게 나왔을 땐 당황했지만 정말로 맛있었다.
“네가 만든 거 맞아?”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진짜 자기가 만든 게 맞는지, 클라인은 라틸이 의심스러워하는데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 맑은 미소를 본 라틸은 괜히 목구멍 한쪽이 꽉 막혀와서 입 우물거리는 속도를 늦추었다.
‘요리 만들어서 주는 게 카리센 황족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유혹 방법인가.’
하이신스도 이랬다. 유학 와 있던 시절, 카리센 요리라면서 뭔가를 만들어서 가져다주고는 라틸이 먹는 모습이 재밌다는 것처럼 구경하곤 했다.
‘쓸데없이 이런 점만 비슷하네.’
얼굴도 성격도 전혀 다르면서. 입맛이 좀 사라져서 라틸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하이신스 때문에 클라인을 데려온 건 맞지만, 예전에는 클라인과 하이신스가 한 세트처럼 여겨진 것과 달리 요즘은 클라인은 클라인이고 하이신스는 하이신스로 보였다. 카리센의 황자라는 걸 제외하면 아마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클라인이 유달리 해맑은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여기.”
클라인이 손을 뻗어서 라틸의 입가에 묻은 하얀 가루를 털어주자, 입술 언저리에 뜨끈한 체온이 남아 라틸은 괜히 사과를 뒤적거렸다. 설탕이 묻은 건 입술인데 단맛은 이상하게도 좀 더 마음 안쪽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런데 폐하. 제가 뭘 하나 물어도 될까요?”
라틸은 그의 손이 닿았던 입가를 괜히 자신의 손으로 따라 눌러보다가, 이게 뭔 짓이냔 생각에 얼른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어, 그래. 몇 개든 물어봐라.”
“제 형님이 여기에 유학차 와 있었지 않습니까.”
하나만 물어보라고 할걸. 클라인이 하이신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라틸은 급격히 후회되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심장에 툭툭 설탕을 뿌린 듯하던 기분 역시 사라졌다. 설탕이 아니라 소금이었다.
‘클라인은 왜 하필 지금 하이신스 얘기를 꺼내는 거지?’
물론 모르니까 꺼내는 거지만. 라틸은 애써 평소 같은 표정을 만들어 내며 계속 말해보라고 손을 저었다. 어쨌든 여기에 대고 ‘하지마!’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할 테니까.
“폐하, 혹시 우리 형님이 여기에서 지내던 동안에 누구와 사귀었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클라인의 말을 듣자마자 라틸은 바로 후회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할걸. 라틸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손수건을 꺼내서 입가를 마구 문질렀다.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서넛도 미묘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몰랐는데, 형님이 유학 와 있던 시절에 만나던 여자가 있나 보더라고요. 폐하께선 그 영애가 누구인지 혹시 아실까요?”
라틸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서 손바닥 안에서 괜히 손수건만 굴렸다. 이걸 어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