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이미 결혼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2021.04.28.
마차에서 내리자 연한 녹색과 금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의 선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이 별궁은 라틸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건물이기도 했다. 오빠는 여기에 와서도 늘 공부를 했고, 라틸은 자신의 덩치만 한 책을 안고서 그 뒤를 쫓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오빠가 내 추억을 다 망쳤어.’
몽실몽실하던 추억 속에 오빠의 잘난 얼굴이 떠오르자 바로 기분이 구겨진다. 라틸은 과거를 추억하길 멈추고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식사 시간이 되자 기분이 다시 나아졌다. 황제가 즉위 후 처음으로 이곳에 방문했기 때문인지, 하인들이 날라오는 음식마다 전부 힘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바삭하게 튀긴 과자와 작은 접시에 덜어낸 다섯 종류의 과일잼, 사과 타르트와 닭고기로 만든 스튜, 당장에라도 녹아버릴 것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흰 빵과 위에 크림을 얹은 이름 모를 음료수 등등 하나같이 침이 넘어갈 정도로 강렬하게 달콤한 향을 풍겼다. 게다가 라틸의 양옆으로 앉은 이들은 하나같이 손꼽히게 아름다운 후궁들이어서, 테이블 위를 볼 때도 의자 위를 볼 때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젠장. 갑자기 좀비니 흑마법사니 이런 것들만 안 나타났어도 얼른 황위 안정시키고서 이런 편안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음료수를 먹다가 입술 부근에 크림이 묻자 타시르가 약간 혀를 내밀어서 그 주위를 핥았다. 그걸 본 라틸은 심장이 찌르르 울려서 더욱 틀라와 레안을 원망했다.
* * *
“타시르 그자는 겉으로 보기엔 폐하께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속으론 아닌가 봐.”
식사를 마친 클라인이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뱉은 소리에, 바닐이 하인들에게 짐을 이리 옮겨라 저리 옮겨라 지시하다 말고서 “예?” 하고 되물었다. 악시안은 눈치 빠르게 하인들을 다 내보냈다. 바닐은 하인들이 나가자 짐을 자신이 다 옮기게 되어서 인상을 찌푸렸으나, 클라인은 좀 더 편하게 타시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 같이 식사를 하는데, 타시르 그자가 입에 크림이 묻은 척 혀로 입술을 핥지 뭐냐. 여우 같기는.”
클라인의 말에 바닐이 여행용 가방을 옷장으로 끌고 가면서 혀를 찼다.
“그자는 딱 보기에도 여우 같잖습니까, 황자님. 얼굴을 보면 종족이 수상할 정도인데요.”
“그렇긴 하지.”
늘 웃고 다니는 타시르의 가느다란 눈매를 떠올린 클라인이 수긍하자, 악시안이 여행 가방 두 개를 동시에 들고 옮기면서 조금 타시르를 편들었다.
“그래도 가까이 지낼 만한 자입니다. 전에 폐하와 황자님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도 중간에서 황자님을 편들어 폐하의 오해를 풀어주었고, 무엇보다 그자의 상단이 카리센과도 교역을 하지 않습니까.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황자님에게 잘할 겁니다.”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클라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역시 후궁들 중에선 그나마 대신관과 타시르 이 둘이 가장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빨리 짐이나 정리해. 그리고 바닐, 노출도 많고 화려한 옷으로 골라줘. 대신관은 헐벗고 다니고 타시르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니 난 두 개 다 해야겠다.”
그 두 개를 조합하신다고요? 바닐은 여행용 가방을 열다가 당황해서 클라인을 쳐다보았으나, 클라인은 진심인지 이미 윗옷 단추를 풀고 있었다. * * * 클라인은 라틸이 여독을 풀자마자 자신을 부를 거라 확신했지만, 저녁 시간이 되도록 라틸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별궁에 왔으니 이젠 예전의 그 바다맛 키스 이상으로 진도가 나갈 거라고 예상했는데도.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푹 쉬시려나 봐요.”
바닐은 눈에 띄게 기운이 빠진 클라인에게 애써 긍정적인 말을 해주다가, 안 되겠다 싶자 맛있는 음식이라도 가져다주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클라인 님이 기운이 없으시니, 좀 단 간식을 가져다드리고 싶은데.”
다행히 이곳의 주방장이 자신이 카리센 요리가 특기라고 나서서, 카리센 궁정 파티에 내보내도 손색이 없을 법한 음식을 만들어냈다. 바닐은 얼른 그 음식을 웨건에 담고 접시를 커다란 은색 뚜껑으로 덮은 뒤 다시 클라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황자님, 이거 좀 드셔보세요.”
그러고서 거울 앞에서 떠나지를 못하는 클라인에게 그 음식을 내밀자, 클라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 감탄했다.
“이거 눈사과잖아? 이게 왜 여기 있어?”
“여기 주방장이 카리센 요리가 특기래요.”
눈사과는 카리센 궁정에서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간식으로, 사과 위에 하얀 눈을 얹은 것처럼 생겨서 모양이 예쁜 데다 그 하얀 부분에서 다 단맛이 나기 때문에 우울할 때 간식으로 먹기에 딱 맞았다. 클라인은 신이 나서 눈사과를 받아 들고 조금씩 베어 먹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눈사과를 도로 접시에 내려놓았다.
“어? 맛이 별로인가요?”
“아니. 내가 이걸 폐하께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싶어서.”
“폐하께요? 황자님이 직접요?”
바닐은 당황해서 동그란 사과 모양 간식과 클라인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눈사과는 보기엔 예뻤으나 만드는 난도가 꽤 높았다. 한데 황자님이 요리를…… 잘하나?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닐은 클라인이 요리를 했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아예 없었다.
“요리는 할 줄 아세요?”
결국 바닐이 솔직하게 묻자, 클라인은 뭐 어렵냐는 듯 거만하게 턱을 들고서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면 되지. 이거 만든 주방장을 데려와 봐.”
* * *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닐은 긴장한 주방장을 데리고 나타났다. 클라인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대외 이미지 구축용 책을 읽다가, 주방장이 들어오자 얼른 책을 덮어 옆에 내려놓고서 명령했다.
“내가 폐하께 직접 카리센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다. 아까 내 시종이 네게서 받아 온 그 눈사과 같은 거. 만드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다오.”
그런데 뜻밖에도 주방장은 클라인의 명령을 받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해 있었으면서. 그 반응에 클라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주방장은 황급히 사과하며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예전에 하이신스 폐하께서도 같은 부탁을 하셨던 게 떠올라서요.”
클라인은 주방장이 자기 말을 무시하나 싶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뜬금없이 여기서 자신의 형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해 물었다.
“내 형님이? 같은 부탁이라니? 눈사과?”
그러고서 클라인이 “형님이 여기 온 적이 있던가?” 하고 악시안에게 묻자, 악시안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주방장은 얼른 말을 정정했다.
“제가 몇 년 전까지는 본궁에서 요리를 했습니다, 황자님. 하이신스 폐하께서는 당시에 유학을 와 계셨지요.”
“아아. 그때.”
“눈사과를 만들겠다 하신 건 아니지만, 어떤 영애에게 요리를 해주려 하셨습니다.”
“영애?”
클라인은 주방장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다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나오자 눈썹을 찌푸렸다. 형님이 외국 영애를 위해 요리를 배운 적이 있다고?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클라인은 고개를 기웃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주방장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단 판단을 내렸다. 하이신스는 첫사랑이나 옛 연인이 있단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아이니 황후에게 마음 한 조각 주지 않은 건 물론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로 받아들인 후궁들과도 합방을 하지 않고 지냈다. 당시 클라인은 나라가 불안정하니 하이신스가 몸을 사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저 주방장의 말처럼 하이신스에게 진짜 사랑이 있다면…….
‘그 여자 때문에 끝끝내 아이니 황후를 못 받아들였나 보네.’
아니, 그런 상대가 있다면 미리 좀 말을 하지. 클라인은 속으로 형이 참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하이신스가 아이니 황후와 결혼을 할 당시엔, 아이니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 * * 시간이 늦었으니 요리는 내일 배우기로 한 클라인은,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펼쳐둔 다음 거기에 하이신스에게 보낼 편지를 적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지났을까. 연신 들려오는 사각사각 소리에, 바닐은 근처에서 목각 인형을 깎다 말고서 클라인에게 물었다.
“폐하께 첫사랑이 누구인지 물어보시는 건가요?”
주방장이 돌아가자마자 클라인은 자신이 하이신스의 첫사랑 영애를 찾아볼 거라고 했다. 악시안이 “영애가 아니라 부인일 수도 있습니다, 황자님.”이라고 초 치는 말을 하긴 했으나, 클라인은 그래도 찾아볼 거라 말하더니 씻자마자 저렇게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바닐이 이런 질문을 던질 만도 했다.
“아니.”
그러나 클라인은 대번에 바닐의 말을 부정했다.
“어? 아니십니까?”
바닐이 조각칼을 내려놓으며 묻자, 클라인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첫사랑이 누구인지 찾지도 못했는데 형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 악시안 말처럼 이미 결혼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일단 찾은 다음에 얘길 해야지.”
“아. 그렇군요. 그러면 무슨 편지를 쓰시는 건지…….”
“이제 여기에도 많이 적응했으니 임시 후궁은 그만두고 정식 후궁으로 들어와 있을 거란 편지.”
바닐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한발 늦게 “예?” 하고 놀라 외쳤다.
“진심이세요?”
클라인이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바닐은 당황해서 괜히 악시안 쪽을 쳐다보며 허둥거렸다.
“그러다가 폐하가 다른 사람을 국서로 정하면 황자님은 평생 그 밑에서 후궁으로 지내야 하는 건데, 그걸 견딜 수 있으시겠어요? 물론 후궁도 황족이지만 그래도 황자님 같은 분이…….”
바닐은 악시안이 자신을 돕길 바라며 본 것이지만, 악시안은 ‘뭐 어때’ 하는 표정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클라인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 올리면서 웃었다.
“폐하는 날 사랑하시지. 그런데도 날 국서로 올리지 못하고 있는 건 내가 임시 후궁이라, 언제든 돌아갈 수도 있다 여겨서 그런 거다.”
“그게…… 그럴까요?”
“그래. 그러니 나도 폐하께 내 결단을 보여 드려야지. 그래야 마음 놓고 날 국서로 올리실 게 아니냐.”
“그게…… 진짜 그럴까요?”
바닐이 재차 불안해서 묻자, 클라인의 눈꼬리가 위로 서서히 올라갔다. 바닐은 얼른 입을 다물었으나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물론 바닐이 보기에도 지금 황제는 클라인을 가장 잘 챙겨주었다. 대리공사가 죽었을 때도 두말없이 클라인을 믿어 주었고, 클라인이 엮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숨겨 주었다. 지나간 생일도 챙겨주고, 사람들 앞에서 클라인을 향한 총애를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황제가 클라인을 국서로 올리려 한다 확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