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미리 반가워하는 사람2021.04.25.
겁이 많은 건 정말인지, 진범은 오래 가지 않아 속마음을 라틸에게 다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거짓을 뱉어서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겁은 많은데 입은 무겁다니, 이건 또 신기한 조합이네.’
하지만 이 신기한 진범이 감추려 한 진실은 유쾌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진범의 속마음에 따르면, 공작은 애초에 클라인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는 일차적으로는 클라인을 떠보려 했고, 그게 안 될 경우 클라인이 대리공사를 죽였단 누명을 씌우려 했다. 진범은 다가 공작이 클라인을 떠봐서 뭘 어떻게 하려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클라인에게 누명을 씌워서 뭘 하려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가 공작은 클라인이 정치에 야욕이 없단 이유를 들어, 이게 하이신스의 밀명이었다고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한 방에 황제를 무너뜨리기 힘드니 하이신스가 제멋대로 귀족들을 죽여대는 폭군인 것처럼 몰아가려 했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라틸은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고개를 기우뚱했다.
‘어쨌든 하이신스한테 알려줘야겠네.’
* * * 여우가면은 틀라가 왜 자신의 방에 있는지 따지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여기 계셨군요.” 하고 말할 뿐이었다, 틀라는 뛰지도 않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한 감각을 애써 감추었다.
“널 찾으려고.”
일부러 목소리도 높였다.
“어디에 갔던 거지? 한참 찾았는데.”
“파티가 있어서요.”
여우가면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파티?”
틀라는 되물었지만 여우가면의 대답엔 관심이 없었다. 여우가면은 농담을 좋아해서 원래 헛소리를 잘했다. 어마어마한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조금 긴장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벌레였던 적도 있을 정도로. 그렇다고 벌레가 여우가면의 약점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도.
“로드께선 무슨 일로 날 찾으셨는지?”
애초에 대답에 관심도 없었지만, 여우가면이 이 질문을 던지자 틀라는 더욱더 그 파티란 것에 관심이 사라졌다. 틀라는 짧고 빠르게 고민에 잠겼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숨기는 정보가 있냐’고 물어도 될까? 로드가 부하에게 할 법한 질문이 아니란 건 알지만 자꾸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틀라는 찝찝한 질문은 그냥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자존심을 위해 오기를 부리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찾으러 다니는 새에 까먹었다.”
“이런. 나중에 생각나시면 다시 오시지요.”
틀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여우가면의 방을 빠져나왔다. 뒤통수에서 여우가면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른 척 꿋꿋하게 걸어갔다. 자신의 왕좌로 돌아온 틀라는 옥좌 위에 앉아 초조하게 양손을 쥐었다.
‘여우가면은 왜 라나문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었을까.’
‘내가 로드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질문과 얽히면서 여우가면에 대한 의구심은 한층 불안한 형태를 띠었다. 틀라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서 구부정해졌던 허리를 폈다.
‘혹시 여우가면은 라나문이 로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로드가 아닌 것 같아서 다른 로드를 찾아보려고?’
무릎 위에서 손가락이 계속에서 튀어댔다. 이윽고 그의 눈은 굶은 짐승처럼 변했다.
‘그렇게는 둘 수 없다.’
로드는 분명 그이다. 확실히. 하지만 만에 하나 모르니까…….
‘좀비를 보내자. 아니. 좀비는 안 돼. 좀비는 이성이 없잖아. 거긴 내가 지배할 곳이다. 최대한 보존해야 해.’
게다가 대신관이 하렘에 있으니 들여보내도 효율적이지 못했다. 식시귀는 건물이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망가뜨리진 않겠지만 대신관 때문에 비효율적이긴 마찬가지. 틀라는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옥좌 한쪽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땡그랑 소리가 나자 얼마 뒤. 아치문 너머 복도에 물에 흠뻑 젖어 축축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지익 지이익’ 소리를 내며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그것이 거의 앞으로 다가오자 틀라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지시했다.
“라나문 아트락시를 죽여라.”
* * * 하이신스에게 이번 사건을 알리는 서신을 적어 보낸 라틸은 며칠간 플로라에 있는 별궁에서 쉬고 오기로 했다. 몇 달간 마음을 푹 놓고 다녀오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휴식이 꼭 필요해서. 일이 너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게다가 너무 지쳐서 오히려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구를 데려가실 겁니까?”
“클라인은 이번에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 꼭 데려갈 거고…….”
“라나문 님도 데려가시지요.”
“라나문이랑 게스타는 안 데려갈 겁니다, 사블레 후작. 아트락시 공작이랑 로르드 재상한테 과하게 싸워댔다간 둘 다 손해란 걸 알려줘야죠.”
“예. 그러면 타시르 님을 데려가시겠습니까? 연회 때 진범도 잡았으니까요.”
라틸은 여러 가지로 고민한 끝에 클라인과 대신관, 타시르를 데려가기로 했다. 사실 여기에 칼라인도 넣고 싶었지만, 그 둘만 고립시키면 이번에는 거꾸로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이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라틸은 두 거물 귀족이 과도하게 싸워대는 것도 싫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 * * 플로라는 수도에서 마차로 이틀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영지로, 이곳에 있는 별궁은 정원이 유달리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황족들은 긴 휴가를 떠날 수 없을 때 가끔 이곳으로 와 쉬다 가곤 했다. 라틸이 짧은 휴가를 위해 플로라의 별궁을 선택한 것도, 많이 멀지 않으면서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다섯 대의 마차가 줄지어 이동하는 동안, 라틸은 마차 안에서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고, 타시르는 아버지가 보내준 현재 시세 관련 보고서를 읽었다. 대신관은 속세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세태에 대해 신에게 기도를 올렸으며, 클라인은 자신의 측근들과 다른 후궁들을 내리누를 방법을 의논했다. 그러기를 세 시간 정도. 카리센에서 있었던 하렘 암투에 대해 알려주던 바닐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황자님, 솔직히 전 가짜 폐하 사건 이후에요. 이제 황자님은 총애를 얻긴 다 글렀다고 생각했어요.”
“뭐야?”
클라인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자, 바닐은 기가 죽어서 웅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황자님만 진실을 모르셨잖아요.”
맞는 말이긴 했기에 클라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클라인 본인 역시 그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이후 라틸이 한동안 그를 찾아오지 않기에 화가 난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란 걸 안다. 라틸은 그를 찾아온 건 물론 지난 생일까지 챙겨주었고, 대리공사를 죽였단 오해를 살 뻔했을 때도 두말없이 믿어주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자 클라인은 갑자기 너그러워져서 거만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그럴 수도 있지.”
“네. 물론 강대국 황자님이니 예의는 차려 주겠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얻긴 힘들지 않을까…… 뭐 이렇게 체념 좀 했죠.”
“그런 내색 없더니.”
“당연하죠. 그걸 어떻게 내색해요?”
바닐이 당시 일은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치를 떨자, 바닐의 옆자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던 악시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폐하께서 클라인 님을 아끼시니 이제 한숨 놓았습니다.”
“맞아요, 황자님. 이젠 다른 귀족들도 다 황자님 얘기밖에 안 해요.”
두 사람이 번갈아서 자신을 추켜세워주자 클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흐뭇하게 올렸다. 겸손한 척해야겠단 생각은 아예 없기에, 클라인은 턱을 들어 올리고서 뿌듯하게 웃었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황자님. 정적들은 많은데, 황자님은 여기에 세력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으니까요.”
악시안이 충고를 했으나 클라인은 ‘그쯤은 나도 생각하고 있다’는 투로 손을 휘휘 젓다가, 돌연 인상을 찌푸리더니 바닐에게 물었다.
“그보다 바닐. 넌 그날 정말로 혼자 미끄러진 게냐? 네가 그렇게 조심성 없다곤 생각되지 않는데.”
그 이야기가 나오자 바닐은 아까보다 좀 더 화난 얼굴로 바로 대답했다.
“누군가 절 잡아당겼어요.”
“민 게 아니라? 보통은 밀잖아?”
“그러니까요! 민 게 아니라 잡아 ‘당겼’어요. ……그래서 아무도 제 말을 안 믿어요, 황자님. 계단에서 떨어진다면 다들 민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분명 밑에서부터 잡아당겼어요. 그건 헷갈리고 뭐고 할 일도 아니잖아요.”
바닐이 하소연하자 악시안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목격자만 없었어도 사람들이 신중히 이야기를 들어줬을 텐데. 안타깝게 됐군요.”
“그러니까요!”
바닐이 생각만으로도 억울한지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변하자, 클라인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반쯤 열려 있던 창문을 꽉 닫고 또 물었다.
“범인은? 못 봤어? 짐작 가는 사람은 없고?”
“없어요, 황자님.”
“잘 생각해봐. 게스타네 ‘나무’가 보였을지도 몰라.”
“아니요. 못 봤어요.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게, 그럴 틈도 없이 떨어졌는걸요.”
바닐의 단호한 대답에 클라인은 쳇, 혀를 차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때 바닐이 갑자기 “아!” 하고 외쳤다.
“역시 트리지?”
그럼 이참에 꼬투리 좀 잡자. 클라인은 얼른 몸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바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클라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아뇨, 트리는 아닌데요. 절 처음 발견한 게 로르드 재상이었어요. 게스타 아버지요, 황자님. 사실 그때 반쯤 정신이 나가서 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했고. 맞는 거 같아요.”
“로르드 재상이 널 잡아당겼다고?”
“그건 아닐 거예요. 제가 떨어진 걸 보자마자 놀라서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 준 것도 그분이거든요.”
클라인은 범인이 트리나 게스타가 아니라면 재미가 없는지 다시 벽에 등을 기대면서 흥미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흥미가 없는 것과 별개로, 그는 자신의 시종을 건드린 사람이 누구든 그냥 넘어갈 마음은 없었다.
“악시안. 본궁에 돌아가면 그 목격자란 놈을 잡아 와.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겠다.”
악시안 역시 카리센에서 바닐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다른 나라 사람이 자국인인 바닐을 괴롭히는 건 참을 마음이 없었기에, 그는 클라인을 말리는 대신 대번에 차갑게 대답했다.
“예.”
* * * 그 시각. 황제가 후궁 세 명을 데리고 처음으로 플로라의 별궁을 방문한단 소식에, 그곳의 모든 일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건물 전체를 쓸고 닦고 광을 내야 했다.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온기가 사라진 방 역시 미리 돌아다니며 먼지를 털고 침구류를 보송하게 만들었다. 주방 역시 오래간만에 몹시 분주해져서, 주방장은 쉬지 않고 목청을 높여 눈에 안 차는 보조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아니, 그건 찬장 안에 두지 마! 이봐, 그거 버리는 거 아니야! 아니, 뭘 또 버렸다 꺼내는 거야? 버렸으면 그냥 둬! 쓰레기를 폐하께 드릴 셈이야?”
그렇게 온종일 분주히 움직인 덕에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는 드디어 잠깐이나마 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쉰다고 해도 아까보다 덜 움직일 뿐 여전히 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었기에, 주방장은 쉬지 않고 커다란 냄비를 국자로 저으며 뿌옇게 떠오르는 거품을 거두어냈다. 약 30분 정도를 그러고 있었을까. 곁에서 설거지를 하던 넉살 좋은 주방보조가 참지 못하고 주방장에게 말을 걸었다.
“존 씨는 카리센 요리를 잘하시죠?”
심심하긴 마찬가지였기에 주방장은 엄격하게 ‘조용히!’라고 외치는 대신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래.”
“존 씨는 전엔 본궁에 계셨잖아요. 그때 하이신스 황제가 유학 와 있었고요. 하이신스 황제가 존 씨 요리를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주방장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괜히 뻐기는 소리를 냈다.
“좋아하다 뿐이야. 하이신스 폐하께선 연인에게 음식을 해주고 싶다면서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달란 부탁까지 하셨는걸!”
처음 듣는 이야기에 주방보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짜예요? 그럼 존 씨는 폐하를 가까이서 뵈었겠네요?”
“당연하지.”
주방보조는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궁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사실 대부분은 동선이 겹치지 않기에 황족들의 얼굴을 보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황제, 그것도 옆 나라 황제에게 요리까지 가르쳐 주었다니. 주방보조는 주방장이 구국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존경스러워 쳐다보았다. 그 눈길을 받은 주방장은 더욱 으쓱해져서 자랑했다.
“이번에 오는 후궁 중에 하이신스 폐하의 동생도 있다지? 그분은 이복형과 얼마나 많이 닮았나 궁금하군. 입맛이 비슷하다면 그분도 내가 한 음식을 좋아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