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폐하는 머리가 가볍네요2021.04.21.
“클라인 님을 짝사랑한다고?”
“단순히 짝사랑한단 이유로 밤에 궁궐 나무를 탔다니. 이상한데?”
“둘러대는 거 아닙니까?”
“저 말이 진짜라면 정말 짝사랑해서 그런 게 맞긴 한가요?”
사람들은 사서의 말에 놀라 수군거렸다. 몇몇은 사서의 말을 몇 겹이나 꼬아 듣고서 괜히 클라인을 힐긋거렸다. 머릿속에서 이미 클라인과 사서 사이의 이야기를 몇 편이나 완성시킨 얼굴들이었다. 반면 라틸은 사서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머릿속에서 한 계산을 다 들었는데 넘어갈 리가 없었다. 라틸은 그 뿐만 아니라, 사서가 실제로 보고 싶어 했던 이가 게스타란 것, 하지만 게스타에게 피해가 갈까 봐 다른 후궁의 이름을 말했단 것, 굳이 클라인의 이름을 둘러댄 건 게스타가 ‘받아야 할 총애’를 클라인이 가져간 게 싫어서란 것 등까지도 다 알아냈다.
“폐하.”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서넛도 한마디를 보탰다.
“저 사서가 정말로 클라인 님을 사모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리공사를 죽인 범인은 아닐 겁니다. 대리공사는 검술을 익혔는데, 저 사서는 무술을 익힌 체형이 아닙니다.”
사서가 덜덜 떨면서 라틸을 보았다. 용서를 청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라틸은 시종장에게 바로 지시했다.
“과하지 않게, 봐주진 말고 처벌하라.”
라틸이 아는 바가 맞다면, 아마 사서는 궁정 사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사서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라틸이 데리고 가라 눈짓하자 경비병들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끌고 가 버렸다. 끌려가는 동안 사서는 “폐하,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하고 사정을 했지만, 그 너머로는 [XX,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무 타다 떨어진 게 그렇게 죄냐! XX 황제면 다야?] 하는 욕설과 저주가 겹쳐져 들려왔다. 사서는 나무를 타다 떨어진 게 문제가 아니라, 여러 번 거짓말로 수사에 혼선을 주었단 게 결정적 문제였단 걸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속마음을 들으니 이런 건 별로네.’
라틸은 난생처음 듣는 생경한 욕지거리에 불쾌해졌다.
‘속으로 욕한 걸 처벌할 수도 없고.’
하지만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지라, 결국 라틸은 피곤해져서 연회장에 딸린 휴게실로 걸어가며 지시했다.
“다시 범인을 찾아오면 말하라.”
* * * 라틸이 휴게실의 긴 의자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을 때였다. 슬그머니 동그란 머리통 하나가 장막 사이로 나타나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제가 다리를 주물러 드릴까요?”
클라인의 목소리였다.
“왜 거기 숨어서 말해?”
라틸이 웃으면서 묻자 클라인은 슬며시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전의 자신 없는 목소리엔 그사이에 자신감이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라틸과 같은 소파에 앉더니, 라틸을 향해 ‘내가 이래도 좋지?’ 하는 웃음을 보냈다.
“왜 갑자기 귀엽게 굴어?”
그 표정이 자신의 매력에 확신을 가지고 한껏 자랑하러 온 소형견처럼 보여서 라틸은 덩달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 소형견 같은 애가 암습을 나뭇가지로 막아냈단 게 신기하긴 하지만.
“아까 보니까 다리 아파하시기에.”
클라인은 라틸의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치마 위 종아리에 손을 올리고서 쳐다보았다.
“저는 폐하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이니까 다리를 좀 주물러 드려도 되겠지요?”
“상관없긴 한데.”
말이 끝나자마자 클라인이 라틸의 다리를 커다란 두 손으로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황자님이 다리를 뭘 얼마나 잘 주무르겠어, 생각했으나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을 가진 클라인답게 근육과 살을 주무르는 손길에는 힘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뭐 하나 볼까, 생각하면서 쳐다보던 라틸조차 나중에는 ‘시원하네’ 싶어서 반쯤 눈을 감을 정도였다. 라틸이 편안하게 몸을 맡기자 클라인의 입가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러다 라틸이 완전히 잠에 빠지자, 클라인은 조용히 다리에서 손을 떼더니 라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얼마 남지도 않은 자리에 기어코 끼어든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라틸의 머리가 자신의 어깨에 닿도록 교묘한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각도까지 계산하고서 대기하자, 마침내 라틸이 그의 어깨 위로 잠에 취해 머리를 떨구었다.
“폐하도 참.”
클라인은 그제야 구부정하게 내밀었던 어깨를 펴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그리 좋으신가. 자꾸 머리를 기대시네.”
* * *
[어깨가 아프다. 어깨가 결린다. 어깨가 떨어질 거 같다.]
라틸은 누군가 주문처럼 빠르게 괴로워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잠시 라틸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괴로워하는 목소리, 정확히는 속마음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미치겠군. 폐하는 머리가 무겁잖아? 이러다가 팔이 떨어지면 대신관이 치료해줄 수 있는가?]
내 머리가 무겁다고? 라틸은 인상을 구기고서 확 머리를 들었다. 상체를 똑바로 하고 보자 클라인이 옆에서 한쪽 어깨가 탈골된 것처럼 늘어뜨리고 있다가, 화색이 되어 “폐하.” 하고 부른다.
[살 것 같다.]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클라인은 팔이 저리는지 아픈 팔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면서 설명했다.
“다리를 주물러 드리다가 저도 쉬고 싶어서 폐하의 옆에 앉았습니다. 피곤하신지 제 어깨를 베고 주무시더라고요.”
빙그레 웃는 클라인은 뒤늦게 자신이 팔을 주무르고 있단 걸 깨닫고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러다 라틸이 가자미눈을 하고서 쳐다보자 몹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맑게 웃으며 거짓말했다.
“폐하는 머리가 가벼우시네요.”
“그럼 좀 더 벨까?”
그게 얄미워서 라틸이 일부러 그의 팔에 착 달라붙자, 클라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꼭 붙어 있으니 좋다. 그렇지, 클라인? 너도 좋으냐?”
그래도 라틸이 놓지 않고서 클라인의 팔에 꽉 달라붙자, 클라인의 비명이 더욱 거세졌다.
[쥐! 쥐! 쥐!]
쥐가 난 모양이다.
“우리 클라인은 이렇게 팔이 튼튼해.”
[쥐! 쥐! 쥐!]
“왜 대답이 없느냐, 클라인? 응?”
라틸은 아예 클라인의 팔을 조물조물 문지르면서 올려다보았다.
“너도 네 다리를 주물러 주었으니 나도 네 팔을 주물러줄까? 이렇게?”
하지만 클라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표정 관리도 못 하고서 그저 입을 벌리고 몸을 꿈틀대고 있자, 라틸은 그제야 팔을 놓아주고서 놀란 척 새침한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클라인! 너 팔에 쥐 났구나? 튼튼해 보이는데 의외로 연약한 팔인가 보네?”
클라인이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라틸은 그제야 방긋 웃고서 말했다.
“우리 클라인한텐 이제 못 기대겠다. 팔이 부실해서.”
“폐하!”
“팔은 대신관이 튼튼하지. 쥐가 나도 혼자서 치료할 수도 있고.”
“너무하십니다!”
“뭘 너무해. 사실을 말한 건데.”
“사실이라고 다 그렇게 입에 담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사실이라고 인정은 하는 거네. 알았어. 조심할게.”
“그게 아니라……!”
발끈해서 반박하려던 클라인은 인기척을 느끼고서 입을 다물었다. 라틸도 클라인을 놀리던 걸 멈추고서 “들어와.” 하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서넛이 안으로 들어왔다. 클라인은 서넛을 보자 기분이 상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예전에 라틸이 오래간만에 그를 찾아왔을 때, 서넛이 두 번이나 라틸을 데려간 적이 있다. 아직도 서넛을 보자 그 생각이 나 기분이 나쁜 탓이다. 서넛 역시 굳이 클라인에게 아는 체를 하진 않았다.
“폐하, 타시르 님이 습격자를 잡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 말 없는 기 싸움의 승자는 서넛이었다. 타시르가 공을 세웠단 이야기에 클라인의 표정이 굳은 것이다. 반면 라틸은 화색을 띠고서 일어섰다.
“그래? 역시 타시르는 이런 쪽으론 대단하네.”
가짜 황제 사건 때부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클라인은 그 말이 어쩐지 자신에게 하는 듯해 어깨가 축 쳐졌다. 물론 머리로는 라틸이 자신을 지적한 게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감정은 꼭 머리가 지시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진 않았다. 클라인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라틸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클라인의 속마음은 수월하게 읽는단 점이었다.
“클라인.”
라틸은 클라인이 급격히 자신감을 잃자 나가려다가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네…….”
“베개 해줘서 고마워. 팔 안 튼튼하단 건 그냥 한 말이다. 네 팔 최고.”
라틸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클라인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도 기운이 펄펄 넘치는지, 바로 벌떡 일어서서 라틸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제가 부축해드릴까요?”
그래 놓고서는 본인도 ‘아차’ 싶은지 팔이 저린 내색도 못 하고 움찔했다.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됐다고 웃는다.
‘팔에 쥐 난 거나 풀어…….’
* * *
“습격에 실패하자마자 바로 탈출했답니다.”
라틸이 진범을 잡아둔 방에 도착하자 타시르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설명했다. 둘만 있을 때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하더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오히려 새어나가는 말이 없었다.
“어디서 잡았어?”
라틸은 의자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는 범인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수도 밖에서요. 미친 듯이 달아나고 있었죠.”
타시르의 대답에 진범의 눈이 공포로 까맣게 물들었다. 뭘 어떻게 잡아 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암살자들을 풀어서 잡아 왔을 테니 무서웠겠지.’
“겁이 많은데 의외로 입이 무겁더라고요. 아는 건 다 뱉고 목숨을 부지하라는데 입을 안 엽니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겁이 나는 뭔가가 있나 보지.”
“가족의 생명, 뭐 이런 걸까요?”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타시르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경비병들, 심지어 서넛에게까지 지시했다.
“이젠 내가 알아볼 테니까 나가 봐.”
경비병들은 라틸이 아까 사서가 나무를 탈 동안 망을 봐주었던 하인을 떠올리고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떤 경비병들은 라틸이 또 그런 식으로 심문을 하는 건가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라틸이 아까는 눈속임이었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심문을 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호기심을 풀기 위해 황제의 명을 어길 이들은 여기에 없었다.
“저도 나가야 하나요?”
타시르가 후궁의 위치를 이용해 라틸에게 슬쩍 붙어 시도했지만, 라틸은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서 쭈욱 문밖으로 밀어냈다. 타시르가 아쉬워하며 문밖으로 나가자 라틸은 손을 들어 그에게 까딱까딱 밝게 인사했다. 하지만 문을 닫아걸고 돌아서는 순간. 라틸은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로 웃고 있었다.
“네가 겁이 많아서 다행이야.”
친구에게 하듯 말을 건넨 라틸은 의자에 묶인 범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서 뺨을 톡톡 두드린다.
“왜 내 남자를 죽이려 했나 한번 차근차근 살펴보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