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2021.04.18.
왜 여우 가면이 아트락시 공작가 장남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을까. 틀라는 한 손에 초상화를 들고서 주인이 부재한 방을 연신 돌아다녔다. 여우 가면이 돌아오기 전에 초상화를 들고 떠나야 하는데. 호기심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여우 가면. 라나문. 여우 가면. 라나문. 여우 가면. 라나문…….’
그런데 방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복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우님, 로드께서 계속 여우님을 찾으셨습니다.”
지하 성의 일꾼 중 하나가 여우 가면에게 말을 거는 소리였다. 여우 가면이 돌아온 것이다. 틀라는 황급히 여우 가면이 예비 가면을 놓아두는 곳으로 가서, 가면 사이에 초상화를 끼워둔 다음 최대한 처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로 두었다. 귀퉁이만 조금 튀어나오도록.
“그렇지 않아도 로드를 찾아갔는데 자리에 안 계셔서.”
여우 가면의 대답은 좀 더 가까운 장소에서 들려왔다. 여우 가면이 일꾼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동하고 있었다. 틀라는 얼른 손을 떼고 일어났다.
‘젠장!’
하지만 너무 서둘러서인가. 틀라가 일어나자마자 가면이 툭 앞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졌다. 귀퉁이만 조금 나왔던 초상화는 반절이 다 보였다.
“나도 로드를 찾고 로드도 나를 찾으시니 곧 만나게 되겠지.”
여우 가면이 능청스럽게 웃는 소리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제기랄!’
틀라는 다시 가면을 쌓은 곳으로 달려가, 가면을 세워두고 문으로 돌아왔다. 문에 귀를 대자 대화가 조금 더 뚜렷하게 들렸다.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 무슨 일일까요?”
틀라는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가까이에서 들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잘하면 여우 가면이 하인과 대화하는 틈에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로드인 내가 왜 부하의 눈치를 보아야 하지?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했으나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먼저였다. 누군가 자기 방을 뒤졌다는데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여우 가면에게 추궁할 게 있지만 이건 나중에 떳떳한 상황에서 해야 했다. 틀라는 자신이 로드가 아닐 수도 있단 가능성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이미 움츠러들고 있었다.
“각성이 쉽지 않으니 애가 타시나?”
여우 가면이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소리를 들으며 틀라는 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문틈으로 눈을 내밀었다. 그 순간. 틀라가 발견한 건 여우 모양 가면이었다.
“!”
그는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여우 가면은 어느새 문 바로 앞에 서서, 조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허리를 편 여우 가면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어라. 왜 여기 있으십니까?”
* * *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이렇게 황당한 경우가 있나. 라틸은 얼굴을 드러낸 사람을 쳐다보며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저 단정하고 영리해 보이는 얼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하게 누군지는 기억한다. 그럴 수밖에. 궁정 도서관에 가면 자주 보는 얼굴이니까.
“궁정 사서로군.”
궁정 사서는 낯빛이 회색으로 질려 바닥을 손으로 짚고 외쳤다.
“폐하,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온 건지 저는 잘…….”
라틸은 사서에게 다가가 턱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사서가 고개를 들자 한쪽 뺨에 선명하게 그어진 여러 줄의 상처가 보였다. 날붙이보다는 거친 잔가지들에 난 상처. 얕은 대신 깔끔하지 않다.
“오해 없는 거 같은데.”
“이건 나무를 타다가 떨어져서 난 상처입니다, 폐하. 그런데 갑자기 병사들이 와서 저를 끌고 왔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저는-.”
“나무를 어디서 탔는데? 너희 집 뒷마당에서 탔느냐?”
“예?”
“어디서 탔기에 나무를 타다 끌려왔는데? 이 근처 사니?”
사서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영문도 모른 채 내내 아니라고만 하던 사서는 한 방향을 쳐다보지 못했다. 라틸은 이번엔 경비단장에게 물었다.
“어디서 발견하고서 데려왔지?”
“연회장 주변 정원에 있었습니다.”
라틸은 다시 사서를 보았다. 사서는 이젠 얼굴에 핏기가 아예 없었다. 누가 봐도 찔리는 얼굴. 하지만 사서는 끝끝내 부인했다.
“아닙니다. 이건 오늘 아침에 난 상처입니다. 상처가 오래되지 않아서 헷갈릴 뿐이지, 절대로 아닙니다. 전 나무를 타던 게 아니라 그냥 그 근처를 지나가던 겁니다.”
사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경비병이 누군가의 목덜미를 끌고 와 사서의 옆에 내동댕이쳤다. 하인 복장을 한 사람인데, 사서와 아는 사이인지 오자마자 사서부터 보았다. 게다가 심약한 듯 라틸이 뭘 하기도 전에 바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어떡해? 이렇게 일이 커질 거란 말은 안 했잖아.]
“이자는 누구지?”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패 같습니다.”
하지만 동료가 등장했는데도 사서는 절대로 아니라고 발뺌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폐하!”
하인도 사서와 얽혀서 좋아질 일이 없다고 여겨지는지 말을 맞추었다.
“저, 저도 저 사람을 모릅니다. 그냥 경치가 좋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겁니다.”
이런 일까지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라틸은 서넛에게 ‘저 두 사람 수사한 다음 말해’란 눈짓을 보내고 다른 쪽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망을 보다가 잡혀 온 하인의 머릿속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지? 수사를 받으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던데! ‘그 일’까지 털어놓게 되면 난 죽을지도 몰라! 그 일을 말하느니 차라리 사실을 인정하겠어!]
‘뭔가 약점이 있는 모양인데?’
라틸은 서넛과 경비단장이 사서와 하인을 윽박지르려는 걸 보다가 결국 다시 몸을 돌려 그들을 말렸다.
“아니, 됐다. 그냥 내가 계속하지.”
그게 더 빠를 거 같아. 게다가 말 몇 마디로 상대가 진실을 털어놓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시간과 정신력을 소모해가며 고문할 필요는 없었다. 서넛은 그러시라고 얼른 옆으로 물러났다. 경비단장도 황제가 나서자 한껏 눈에 줬던 힘을 풀고서 옆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비단장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라틸을 힐긋거렸다. 라트라실 황제가 범인을 심문하는 능력은 빼어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라트라실 황제는 누군가를 심문할 때 되도록 혼자 들어갔다가 혼자 나왔다. 라틸은 자신의 ‘속마음 읽는 능력’을 최대한 잘 활용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이를 몰랐다. 그러다보니 경비병들은 이따금 라트라실 황제의 심문 방법이 무엇인지를 두고 내기까지 벌이곤 했다. 그런데 그 라트라실 황제가 당장 여기에서 심문을 하겠다고 나서자 어떤 식으로 심문을 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같은 생각인지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던 다른 경비병들도 라틸 쪽을 열렬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라틸이 하인의 턱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면서 오싹하게 웃자, 경비단장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위협적으로 웃는 표정이 협박의 교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보여서. 실제로 하인 역시 라틸과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미 덜덜 떨고 있었다. 물론 황제와 이런 상황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멀쩡할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겠지만.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을 알려줄까?”
라틸이 스산하게 중얼거리자 경비병들은 단체로 라틸의 눈과 입을 주목했다. 우리 폐하가 무슨 수로 저자의 입을 열게 할까? 설마 연회장에서 고문을 하진 않으시겠지. 라트라실 황제의 서늘한 표정을 보며 기사들은 심장이 두근두근해졌다. 권좌를 차지하자마자 이복 남매를 처형시킨 그 냉혈한 모습을 여기에서 보게 되는 건가!
“15년 전…….”
라틸이 공포 소설의 도입부를 읽어주듯 낮게 중얼거리자, 병사들은 마른침까지 삼켰다.
‘15년 전!’
협박의 시작을 왜 15년 전으로 시작하는 건진 모르겠으나, 예상이 안 가는 걸 보니 그만큼 더 무서운 협박 방식이 나올 게 분명하다. 병사들은 그 생각을 하자 미친 듯이 두려워졌다. 라틸의 입술이 천천히 다시 열리자, 병사들의 눈동자도 덩달아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수님이 너한테 청혼한 줄 알았지?”
부끄러운 역사.
‘어?’
‘청혼?’
병사들은 잔뜩 긴장할 준비를 했다가 라틸을 보았다. 다들 순간 자신들이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미친, 뭐라고?’
라틸도 자기가 말을 해 놓고서 자기가 욕을 뱉었다. 라틸 역시 저 하인이 뜸을 들이다 생각한 걸 그대로 읽은 거였기 때문이다. 라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무섭게 웃고 있자, 병사들은 역시 자기들이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라틸이 억지로 이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라틸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따위이긴 하지만 분명 이건 저 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비밀이 맞았다. 라틸은 마음을 굳게 먹고서 표정을 당당하게 한 채 한 번 더 쐐기를 박아주었다.
“심지어 받아들였지?”
사람들은 당황해서 라틸과 하인을 번갈아 보았다. 라틸은 여전히 표정은 냉혈한 그 자체였다. 하인도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그걸 폐하께서 어떻게…… 형수님이 절대 얘기하지 않으신다고…….”
‘치정극!’
‘사실인가?’
그런 하인에게 라틸이 악당처럼 히죽 웃으면서 협박조로 머리를 비틀었다.
“이 비밀을 네 아내와 형이 알면 어떻게 될까? 네 아내가 네 머리통을 부숴서 그릇으로 쓰려 할 거야. 네 형은 널 볼 때마다 ‘내 아내에게 차인 놈’이라고 놀려대겠지. 네 부모님도 이 일을 아실 테고, 네 조카들은 널 보면서 ‘우리 엄마한테 차인 삼촌’이라고…….”
“으아악!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병사들은 당혹스러워졌다. 라틸의 협박 방식이 자신들이 생각한 공포가 아니다 보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인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건 분명했다.
“그것만은! 제발 그것만은!”
“그럼 말해.”
황제가 차갑게 요구하자, 하인은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흐느끼면서 털어놓았다.
“맞습니다. 망을 봐주는 대가로 황궁 서가에 비치된 책 한 권을 몰래 대여받기로 했습니다.”
병사들은 혼란스러워졌다.
‘저게 통했어!’
‘근데 폐하는 저걸 어떻게 아시는 거야?’
‘모르겠어. 난 폐하가 저걸 아시는 게 더 무서워.’
‘15년 전에 폐하는 어린아이였잖아?’
라틸의 표정 관리 덕에, 아무도 라틸이 지금 가장 수치스러운 상태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10년 치 놀릴거리를 찾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서넛 외에는. 라틸은 서넛에게 ‘놀리면 죽일 줄 알아’란 시선을 강렬하게 보내고서 사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사서는 이를 악물면서 하인을 노려보았다. 고작 그따위 비밀에 입을 가벼이 놀린 하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하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끝끝내 궁전에서 나무를 탄 게 아니라 주장하던 사서는, 더는 물러날 수가 없자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궁전 정원에서 난 상처가 맞습니다. 하지만 나무를 타다 생긴 상처는 맞습니다, 폐하.”
사서가 인정하면서 다행히 분위기가 다시 수사처럼 변했다. 경비병들의 심란한 마음도 한결 진정이 되었다. 라틸은 이 틈을 타서 얼른 얼음처럼 캐물었다.
“이 밤중에 정원에서 나무는 왜 탔는데?”
“그, 그게…… 그러니까 그게…….”
“말하는 게 좋을거야. 넌 지금 나무 탄 죄로 끌려온 게 아니라, 카리센 대리공사 살인 용의자로 끌려온 거라서.”
살인 용의자란 말에 하인이 무릎걸음으로 사서 옆에서 멀어졌다. 궁전 사서도 눈이 다섯 배쯤 커지더니, 갑자기 사서의 속마음이 술술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폐하께서 이웃 나라 황자를 챙기느라 게스타 님을 등한시한단 소리를 들어서 진짠가 확인하러 왔다고는 할 수 없는데!]
‘게스타 보러 온 거였냐.’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거라면 저 사서는 참 타이밍이 나쁘다. 그냥 걸려도 벌을 받았을 텐데. 하필 살인 용의자와 시기가 딱 겹치다니. 게다가 라틸 자신은 사서의 속마음을 읽어서 그녀가 범인이 아니란 걸 바로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이걸 어떻게 납득시킨단 말인가.
‘그래도 살인 용의자가 되는 것보단 낫겠지.’
어쨌든 여기서 라틸이 거짓말을 코치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라틸은 사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워낙 큰일에 얽혀 버리자, 사서는 머리가 얼어서 적당히 둘러댈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내 [어쩌지? 어쩌지? 어떡해.] 하고 속으로 외치던 사서는 결국 한참만에 눈을 번뜩 뜨면서 외쳤다.
“클라인 님을 짝사랑해서……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올라갔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