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낯선 상황에서 낯익은 얼굴2021.04.14.
왜 죽은 대리공사가 내 후궁의 방울 단추를 쥐고 있을까?
‘아니, 클라인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귀족들은 유행을 잘 따르고 유행에 따라 옷이 만들어지니,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을 입기가 더 힘들지 않던가. 서넛은 라틸을 지켜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본 적이 있으시군요?”
라틸도 남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소리를 낮추어 수긍했다.
“있습니다.”
방울 단추는 이 와중에도 손 안에서 유독 보송보송하다. 눈살을 찌푸린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귀족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망토를 걸친 귀족들은 라틸이 자기들만 유독 집요하게 쳐다보자 괜히 주춤 뒤로 물러섰다.
“폐하? 찾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있다. 클라인을 찾는 거였다. 클라인을 확인해보면 이 방울 단추가 클라인의 것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괜히 ‘이거 클라인 거 아냐?’ 하고 초조해하느니, 그냥 한 번 보고 안심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아까 찾아도 없던 클라인이 이 자리에 갑자기 나타날 리가…….
“있네.”
라틸이 중얼거리자, 서넛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라틸을 힐긋 보았다. 하지만 라틸은 클라인의 겉옷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분명 바닐에게서 망토를 받아다 가져다 주었고, 클라인은 라틸의 앞에서 망토를 입고 끈을 여몄는데. 지금 클라인은 아예 망토를 걸치고 있지 않다.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클라인을 빤히 보았다. 클라인도 평소에는 그 시선에 자신만만한 답례를 할 텐데 오늘은 바로 눈을 피했다.
‘진짜 클라인이 범인? 아니야. 그것도 이상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나라 대리공사를 연회에서 죽이겠어. 클라인이 타리움과 카리센의 전쟁을 바라지도 않을 텐데.’
클라인은 낯빛이 파랗게 변했으나 라틸은 무작정 클라인을 의심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클라인은 충분히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생각해보니 욱해서 자주 사고를 치긴 했네. 일단 살짝 불러다가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겠다.’
“서넛 경.”
“예.”
“경찰부에 연락해라.”
라틸이 서넛에게 반장난처럼 기사들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 건 황제로서 지시한단 뜻이었다.
“예.”
서넛 역시 이에 맞추어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대답했다. 라틸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클라인을 향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불렀다.
“클라인.”
화난 내색은 아니었으나 클라인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도 평소보다 의기소침하자,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평소처럼 굴기라도 해라. 생각 없던 사람도 다 의심하겠네.’
“계속 찾았는데 어디 간 거야? 오늘은 옆에 있으라니까?”
어쨌든 당장 클라인을 추궁할 생각은 없기에, 라틸은 일부러 애첩을 열심히 찾아 다니던 황제처럼 가짜 화를 냈다. 클라인은 잔뜩 긴장해 있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틸을 보았다.
“이리와.”
라틸이 안쪽으로 걸어가자, 귀족들이 라틸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다시 조금씩 이동했다.
“폐하, 절 찾으셨습니까?”
라틸이 클라인의 팔을 잡고서 안쪽으로 끌어당기자, 클라인은 아까 떨던 것도 그새 잊었는지 바로 화색이 되어서 따라 붙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틸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어떻게 얽힌 건진 모르겠지만, 역시 얘가 나쁜 수를 써서 자국 대리공사를 죽였을 거 같진 않아.
“저 대리공사 말이다.”
클라인은 웃고 있다가 라틸이 죽은 대리공사 이야기를 꺼내자 다시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표정 관리 좀 하라니까.’
어쨌든 여기서 달래면 더 시선을 끌게 뻔해서, 라틸은 귀족들이 춤을 추면서 놀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만든 방에 들어갔다.
“아. 실례.”
하지만 커튼을 확 열자마자 방 안에서 진하게 입맞춤을 나누는 귀족 둘이 보였다.
“폐하!”
“폐하!”
말없이 커튼을 닫고 옆방으로 가자, 다행히 그 옆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앉아봐.”
라틸은 자주색 벨벳 소파에 가 앉으면서 옆자리를 두드렸다. 클라인은 나란히 앉긴 했으나 아직도 심란한 얼굴이었다.
“저 대리공사, 너희 나라 사람이잖아?”
라틸은 클라인이 조금만 찔러도 속마음을 술술 뱉는 걸 알기에 일부러 조금 자극적인 말을 사용했다.
“자결한 것처럼 보이는데, 살해당했을 수도 있어. 그런데 클라인. 내가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그러고서 손바닥을 펼쳐 자신이 아까 주운 방울 단추를 보여주었다.
“이거 아까 네 망토에 달려 있던 거 아냐?”
단추를 보여주자마자 클라인이 벌떡 일어났으나, 라틸은 손을 잡아서 그를 다시 앉혔다.
“앉아.”
클라인은 손을 뿌리치진 않았으나, 앉지도 못하고 라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눈동자는 몹시 흔들렸고, 입술도 초조하게 짓씹고 있었다.
[날 범인으로 의심하시나? 내가 아닌데! 자기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그냥 죽어버린 건데!]
클라인의 유리장 같은 마음이 오늘도 투명하게 내부를 보여주자, 라틸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제야 클라인을 달래 주었다.
“클라인. 날 널 믿어.”
클라인은 추궁을 각오하다가 라틸이 따뜻하게 말해주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절 믿으신다고요?”
“널 믿으니까 이렇게 따로 불러서 묻는 거야. 넌 연회장에서 누굴 헤칠 사람이 아닌데, 왜 네 방울 단추를 대리공사가 쥐고 죽은 건지 이상해서.”
클라인은 그제야 주춤주춤 다시 엉덩이를 라틸의 옆에 붙였다.
“어떻게 된 일이야?”
라틸이 다시 묻자, 클라인은 이번에는 좀 억울해하는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라틸이 자신을 믿어주는 게 고마워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려 애쓰는 게 보였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악시안이 등장한 부분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를 하려 할 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틸이 클라인의 입을 막자 주위를 살피자, 클라인은 놀라서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라틸은 클라인의 입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방금 근처 어디에서 인기척이?’
휴게실은 아주 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넓지도 않았다. 푹신하고 긴 낮은 소파와 작고 동그란 테이블을 제외하면 어떤 가구도 없어서 숨을 곳도 없다. 그런데 인기척이 날 수가 있나? 벌떡 일어난 라틸은 클라인의 입에서 손을 떼고 얼른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문 밖에 있던 사람은 아니다. 분명 안쪽에서 느낀 인기척인데.’
“왜 그러십니까, 폐하?”
“인기척 못 느꼈느냐.”
“저는 잘…….”
‘클라인도 남의 기척을 잘 느끼는 편인데. 못 느꼈다니, 내가 착각한 건가?’
“인기척이 어디서 났습니까?”
클라인이 영 모르겠단 얼굴이라, 라틸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아니다.” 하고 중얼거리고서 안으로 다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라틸이 이상하게 굴자 클라인도 괜히 엉거주춤해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클라인이 라틸의 옆에 앉으려다 말고 갑자기 “아!” 하고 탄식했다.
“찾았어?”
라틸은 그가 인기척이 난 곳을 알아냈다 싶어 벌떡 일어나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
“아니요. 습격자요.”
“난 또. 계속 그 얘기 중이었잖아. 뭘 그렇게 새롭게 외쳐.”
“첫 번째 습격자 말입니다.”
“도망갔다며.”
“제가 나뭇가지로 얼굴을 내리쳤습니다. 엄청 세게요. 대신관이 치료해주지 않는 한 얼굴에 그 자국이 남았을 겁니다. 잔가지가 많은 나무였으니까요.”
말을 듣자마자 라틸은 황급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네 말이 맞아.”
라틸은 옆에서 속도를 맞추어 따라오는 클라인에게 잘 떠올렸다고 칭찬을 한 다음,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서넛 경은 저기 있습니다.”
그 방향이 영 엉뚱해 보여서 클라인이 서넛이 있는 방향은 다른 쪽이라고 지적해 주었으나, 라틸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니, 대신관부터.”
“네?”
왜 대신관을? 클라인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이. 대신관은 덩치 좋은 귀족들과 이번 일에 관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라틸이 다가오자 먹구름에 잠시 가려졌던 태양처럼 활짝 웃었다.
“폐하.”
그 반가워하는 미소에 눈치 좋은 몇몇 귀족들은 불길한 촉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얼굴을 볼 때가 아니기에, 라틸은 다짜고짜 대신관을 불렀다.
“이쪽으로. 얘기 좀 하자.”
대신관이 얼른 따라오자, 라틸은 인적 드문 곳까지 간 다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샅샅이 살폈다.
“무슨 일이신지요?”
그 모습만 보아도 보통 일이 아닌 듯해서 대신관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라틸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리공사가 죽은 건 알지?”
“예. 마침 그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얼굴을 다친 사람을 보면 절대로 치료해주지 마라.”
“네?”
“그자가 범인이다.”
라틸이 대신관에게 클라인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자, 대신관은 라틸처럼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바로 믿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라틸은 대신관의 어깨를 잘했단 뜻으로 툭툭 친 다음 돌아갔다. 대신관은 자기도 모르게 라틸을 따라 가려다가, 클라인이 라틸의 곁으로 붙자 멈추어섰다. 라틸이 다음으로 찾아간 건 한창 수사 중인 서넛이었다. 라틸은 그를 부른 다음 이번에도 목소리를 낮추어 지시했다.
“얼굴에 나뭇가지로 맞은 상처가 있는 사람을 찾아요. 오래되지 않은 상처일 겁니다.”
“네.”
서넛은 클라인 쪽을 힐긋 보았으나 말을 걸진 않고 돌아서 나갔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찾아도 괜찮을까요?”
클라인은 내내 말없이 따라다니다가, 서넛까지 자리를 비키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범인이 황제가 자신을 잡는단 이야기를 전해 듣고 더 멀리 도망갈까 봐 염려가 되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네 나라 대리공사가 죽었어. 아예 우리나라 일이면 처리하기가 쉬울 텐데, 너희 나라 외교관이 죽은 문제잖아. 카리센에 보일 만한 범인이 필요해.”
“……죄송합니다. 제가 철저하게 처리했어야 하는데.”
기가 죽어 시무룩해진 클라인의 등과 어깨를 툭툭 두드린 라틸은, 네가 의기소침 해질 일이 아니라 달래고서 이번에는 다시 시종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클라인은 심장이 술렁이는 느낌에 이번에는 라틸을 따라가지 못했다. 클라인은 방금 전 라틸이 짚었던 자신의 어깨 위 같은 자리에 슬며시 제 손을 올려보았다. * * * 연회가 파하고 시간이 흘렀지만, 라틸은 귀족들을 돌려 보낸 다음에도 연회장에 남아서 계속 일을 지휘했다. 사실 명령만 내리고 가도 서넛과 시종장이 잘 처리하겠지만, 라틸은 클라인을 처음 습격했던 습격자. 아마도 대리공사와 연관이 있으리라던 그 습격자를 자기가 직접 나서서 추궁한 다음, 범인으로 지목해 감옥에 가둘 생각이었다. 남의 나라 외교관을 죽인 범인이라면 바로 카리센에 보내야 하지만, 하이신스에게 먼저 말을 전한 다음 범인을 보낼 생각이다 보니, 수사를 계속 자신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클라인과 다가 공작이 얽혀 있으니 하이신스도 이 정도 양해는 해주겠지.’
“폐하. 피곤하시겠습니다. 들어가서 좀 쉬고 계시지요.”
시종장은 그런 라틸이 걱정스러워서 몇 번이나 말렸으나, 라틸은 무거워지는 눈두덩이를 누르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벽 두 시 쯤. 경비단장이 들어오는데, 그 뒤로 경비병들이 두 팔을 뒤로 묶고 얼굴을 가린 누군가를 거칠게 끌고 왔다. 소란을 들은 라틸이 그쪽을 쳐다보자, 경비단장이 라틸 쪽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폐하. 뺨에 상처가 있는 자를 잡았습니다.”
“잘했다.”
라틸이 범인 쪽으로 갔을 때는, 범인은 이미 경비병들에 의해 강제로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다 라틸이 눈짓을 하자, 경비단장은 얼른 범인의 얼굴을 가린 천을 확 벗겨냈다. 그런데 드러난 얼굴은 뜻밖에도 낯이 익었다. * * * 낯이 익은 얼굴이다. 틀라는 여우 가면의 예비용 가면 사이에서 발견한 초상화를 손에 든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초상화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틀라 본인도 이 초상화의 주인공을 잘 알진 못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공작가 출신인데다 사교계에서 인기는 많지만, 본인이 사교계에 거의 드나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틀라 역시 이 초상화 주인공의 동생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지 않았다면 얼굴을 몰랐을지도 모를 정도로.
‘라나문.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