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대신관의 미묘한 무게2021.04.07.
바닥에 한 남자가 쓰러져 “으으.” 하고 신음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들은 아니었으나,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다리를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이봐라! 이봐! 사람이 떨어졌다!”
로르드 재상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남자에게 다가가자 그자가 끙끙 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이봐, 괜찮나?”
“누가 다리를…… 다리를 잡아당겼…….”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몸을 비틀었다. 로르드 재상은 “이봐! 여기!”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가, 그 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게스타가 떠올라서였다.
“무슨 일입니까?”
가장 먼저 달려온 기사가 질문을 던지자, 재상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상황을 설명했다.
“계단 위에서 떨어진 거 같네.”
“보신 겁니까?”
“아니. 난 다른 쪽을 보고 있어서 상황을 정확히 본 건 아니네. 묵직한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떨어져 있었어. 하지만 천장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 계단에서 떨어졌겠지.”
재상은 차마 자신의 아들을 보았단 이야기는 할 수 없어서, 게스타를 보았단 말은 아예 빼버렸다.
’내 아들은 떨어진 사람 근처에 있던 게 아니잖아. 그냥 올려다보던 거지. 게다가 이자가 떨어질 당시엔 아예 없었어. 어디로 간 건진 모르겠지만.‘
재상이 속으로 자신이 본 상황을 정당화하는 사이, 소란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들인 게스타도 있어서 재상은 조금 안심했다.
“무슨 일이냐?”
몰려온 사람들 중엔 라틸 황제도 있었다. 라틸이 묻자, 재상은 한 번 더 아까 기사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라틸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대신관에게 바로 손짓을 했고, 대신관은 지체 없이 앞으로 나서서 떨어진 남자를 치료해주었다. 대신관이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댔다 떼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고통이 싹 사라졌는지 바로 표정을 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는 그 남자를, 라틸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넌 클라인의 시종이군.”
“예. 바닐이라 합니다.”
남자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보였으나, 라틸이 말을 걸자 얼른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고서 자신을 소개했다. 라틸은 클라인에게 ‘네 시종 다쳤다’고 말해주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클라인은 밖에 나가 있어서 이곳에 없었다. 기분이 좋아서 술을 너무 마신 탓에 머리가 몽롱해지자, 술기운을 빼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이냐?”
라틸은 클라인을 찾는 걸 멈추고, 로르드 재상에게 한 것과 같은 질문을 바닐에게도 했다. 클라인의 시종은 왜 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을 굴러다니고, 로르드 재상은 왜 하필 그 자리에 있었는지 이상해서 한 질문이었다. 바닐은 라틸의 질문에 고개를 기우뚱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게…… 클라인 님이 옷을 너무 얇게 입으셨길래 걸칠 망토를 가져다드려야겠다 싶어서 처소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절 잡아 당기는 느낌이 나더니, 결국 계단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로르드 재상은 바닐이 떨어진 직후에도 ‘누가 다리를 잡아당겼다’고 말하려던 걸떠올리고서, 라틸을 불안한 표정으로 보았다. 자신의 아들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겠지만, 혹시 밑에 있었단 이유만으로 의심을 받을까 봐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저…… 폐하.”
하지만 몰려 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 나서면서 그럴 염려는 사라졌다.
“실은 제가 저 시종이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정말이냐?”
“예. 제가 볼 땐 혼자 걸어가다가 그냥 미끄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목격자의 말에 바닐은 억울한 표정이 되었으나,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펴보던 사람들은 이미 작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실수로 넘어져놓고 다른 사람을 탓하려 했나 보네.”
“그러면 아무한테나 덮어씌울 수 있으니까 저러는가 보다.”
바닐은 어이가 없어서 라틸을 보았다. 다행히 라틸은 바닐을 비난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라틸은 ‘흑마법사의 짓이거나 바닐의 실수거나 둘 중 하나겠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 자리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기에, 라틸은 로르드 재상과 시종, 그 외 다른 사람들 쪽을 향해 그만 돌아가란 손짓을 했다.
“바닐이라 했지? 너는 들어가서 쉬어라. 치료를 받아도 놀란 마음까진 어쩌지 뭇할 테니. 클라인에겐 내가 대신 망토를 전해주마.”
“예, 폐하.”
바닐이 시무룩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라틸은 망토를 접어 팔에 걸치는 척 하며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았다.
‘자기가 실수해놓고 저러는 거라면 대단한 연기다. 하지만 정말이라면? 헤움 황자가 연회에 좀비를 보낸 것처럼, 틀라는 연회에 흑마법사라도 보낸 건가?’
이번 일이 클라인을 견제하려는 물밑 싸움과 관련이 있는 건가, 정말 단순히 클라인 시종의 실수일까, 라틸이 고민하는 동안. 사태가 진정되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로르드 재상은 슬며시 인적 없는 테라스로 게스타를 불렀다. 게스타는 평소와 다른 없는 안색으로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당당한 구석이라고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으나. 로르드 재상은 그걸 보고 되려 안심했다.
‘역시 내 아들과는 관련이 없어. 이런 애가 사람을 해치다니. 말도 안 되지.’
“아버지? 부르셨어요?”
* * *
“클라인을 보았느냐? 어디서?”
라틸은 사람들에게 물어 클라인이 있단 곳으로 직접 찾아갔다. 클라인은 사건이 벌어진 곳의 정반대 방향에 있는 발코니에 서서, 난간에 손을 집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라인.”
그러다 라틸이 다가와 가지고 온 망토를 어깨에 걸쳐주자, 환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자. 감기 걸린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클라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안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던데요.”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데 넌 왜 안 왔느냐?”
“제 일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요.”
라틸이 ‘아이고……’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클라인은 망토에 달린 방울끈을 리본 모양으로 묶다가 시선을 눈치 채고 되물었다.
“제 일입니까?”
심각한 상황인데, 클라인의 손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방울 단추가 귀엽다. 라틸은 겨울 눈송이 같은 보송보송한 방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래. 네 시종이 계단에서 떨어져서 다쳤다.”
“예?”
클라인은 깜짝 놀라는가 싶더니 대번에 도끼눈을 뜨고 험악한 소리를 뱉었다.
“또 그 나무 새끼가!”
클라인이 말하는 나무가 누구인지 알기에, 라틸은 바로 오해를 지적해주었다.
“걔 아냐.”
“걔가 아니면 바닐이 계단에서 넘어질 일이 없습니다!”
“목격자 말론 혼자 미끄러졌대.”
“목격자 눈알이 잘못된 겁니다!”
씩씩거린 클라인이 끈 묶던 것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라틸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아 막았다.
“뭐 하려고?”
“제가 게스타 그 자식을 아주……!”
“왜 또 화살이 그쪽으로 가?”
“그놈이 영악하고 미우니까요!”
얘는 빈말조차 안 하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클라인의 옷을 더욱 힘주어 잡아당겼다. 상대가 황제이기 때문인지, 클라인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영 표정이 좋지 않자, 라틸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앞으로 얘를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에게 대항할 정도로 띄워줘야 하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욱해대면 효과가 있긴 할까.
“좀 차분하게 굴어.”
“제 시종이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어떻게 차분합니까!”
“안 죽었어. 왜 멀쩡한 애를 함부로 죽이고 그래?”
“아. 안 죽었습니까?”
“어. 다리가 부러졌는데 대신관이 치료해줬다.”
“대신관이…….”
* * * 덩치가 우람한 귀족들 사이에서 대신관은 자신의 완벽한 근육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귀족들이 대단하다면서 박수를 치는데, 그 사이에 이질적인 인물 하나가 반짝거리면서 홀로 걸어왔다. 운동을 좋아하는 귀족들이 떠들던 걸 멈추고서 쳐다보니, 빛을 요란하게 반사시키는 옷을 입은 클라인이었다. 귀족들은 떨떠름해 했으나, 대신관은 마냥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클라인 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시지요?”
하지만 클라인이 손을 들어 말을 막자, 대신관은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도 얼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막상 대신관의 입을 막아 놓은 클라인은, 바로 볼일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난 같은 말은 두 번 하지 않으니 잘 들어라.”
“네?”
대신관을 둘러싼 귀족들은 오히려 처음엔 아무 관심이 없다가, 클라인이 계속 머뭇거리고 있자 오히려 그에게 집중했다. 그 시선에 오히려 클라인은 더욱 말을 하기 어려워졌으나, 다행히 대신관이 먼저 클라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눈치채고서 웃었다.
“알아들었습니다.”
“정말이냐?”
“고맙단 거 아닙니까?”
대신관이 귀에 대고 속삭이자 클라인은 “눈치는 좋네.” 하고 중얼거리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대신관은 그 모습을 보자, 클라인이 다짜고짜 자신을 경계하던 걸 떠올리고는 흐뭇해져서 겸양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대신관, 사람들을 돕는 건 제 기쁨이니까요.”
“그게 네 기쁨인 건 네 사정이고. 그게 고마운 건 내 사정이고.”
“그야 그렇지요.”
“누가 너더러 근육 밖에 없다고 무시하면 나한테 말해라. 내가 처리해 줄 테니.”
클라인이 평소보다 거의 다섯 배는 빠른 속도로 말을 뱉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자, 귀족들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서 대신관을 향해 감탄했다.
“황자님께서 대신관 님을 마음에 들어하시나 봅니다.”
“폐하께선 클라인 황자를 가장 총애하지 않습니까?”
“든든하시겠군요.”
귀족들은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웃으면서 화답을 하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아졌다. 그러다 아까 클라인이 지나간 쪽을 힐긋 곁눈질해 보니, 어느새 라틸의 곁으로 간 클라인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라틸은 콧잔등을 찡그린 채 클라인에게 무어라 말했고,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두 사람의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떨어질 때마다 대신관의 심장도 오그라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모습은 참으로 잘 어울렸다. 잘 어울리지만…….
‘이상해.’
대신관은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져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 * * 클라인은 대신관이 자기를 어떻게 쳐다보는 줄도 모른 채 라틸의 옆에서 소곤소곤 떠들다가, 시종장이 라틸에게 말을 거는 사이 슬쩍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바닐이 걱정이 되어서였다. 대신관이 치료했다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괜찮은 걸 확인하고, 누가 밀었는지도 물어야 하니까. 음악과 사람들 이야기 소리가 가득하던 곳에서 빠져나오자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와서, 클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반쯤 눈을 감고 분위기에 취해 걸어갔다. 그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좋지 않은 기운에 그는 확 몸을 돌리면서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꺾어 상대를 후려쳤다. 습격자는 클라인의 반격에 놀라서 뒤로 물러났으나, 클라인은 나뭇가지를 놓고 상대의 팔목을 움켜잡는 동시에 우득 소리가 나게 꺾어 내동댕이쳤다. 무기를 놓치고 쓰러진 습격자의 목에 발을 올린 클라인은 상대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꽉 주면서 서늘하게 물었다.
“누구냐.”
습격자가 버둥거렸으나 클라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클라인의 실력에 습격자는 끙끙거리면서 클라인의 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경비병!”
그래도 클라인은 멀쩡하게 경비병을 불렀으나, 경비병보다 먼저 화살이 나타났다. 몸을 뒤로 뺀 클라인이 화살을 낚아채는 순간. 습격자는 그 틈을 타 달아났다. 클라인은 그 뒤를 쫓으려 했으나 누군가의 느릿한 박수소리가 그를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