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분노4 의심12021.04.04.
“이번엔 황제 폐하가 너무하셨어요.”
게스타가 긴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트리는 옆에서 씩씩거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난 한동안 여기에 있을 테니 너는 볼일 있으면 보고 와.”
“같이…….”
“혼자 있고 싶어.”
도서관 안에 들어가기 직전에야 게스타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트리가 떠나자, 게스타는 홀로 서가에 들어가 전에 읽다가 만 책을 꺼내 구석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하얀 종이에 번져나갔다. 한 사서는 게스타가 왔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무거운 책을 들고 그 곁을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흠칫했다.
‘게스타 님?’
당황한 사서는 얼른 책을 꽂아두고 게스타 쪽으로 갔다. 게스타는 여전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다 사서의 인기척을 듣자 고개를 돌리더니, 민망한지 자기 얼굴을 가리려 했다. 그 애처로운 모양새를 본 사서는 머뭇거리다가 손수건을 꺼내서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이, 이거요.”
게스타는 처량하게 웃고서 손수건을 받았다.
“고마워요.”
자신이 근처에 있으면 게스타가 불편해할까 봐 사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서, 일부러 가장 먼 곳, 게스타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사서들만 들어갈 수 있는 휴게실로 아예 들어가 버렸다. 그 안에 들어간 사서가 문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자, 먼저 들어와 과자를 먹던 동료 사서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게스타 님이 울고 있어.”
“아 그래?”
동료 사서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계속 과자만 집어 먹었다.
“너도 먹을래?”
사서는 문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았다.
“네가 울렸냐. 왜 그래?”
동료 사서가 그걸 보고 다시 묻자 사서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게스타 님은 몇 년 전부터 여길 드나든 분이니 신경이 쓰이잖아.”
“난 안 쓰이는데.”
“분명 폐하 때문에 우시는 거겠지.”
“너 때문은 아니겠지.”
“……게스타 님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맑고 깨끗한 분인데. 남자 밝히는 황제 밑에 들어가는 바람에 고생하고 있단 게 너무 화가 나.”
“별게 다.”
이게 자꾸? 사서가 씩씩거리면서 쳐다보자, 동료 사서는 반쯤 다 먹은 과자 봉투를 돌돌 말아서 탁자에 두고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뭘 화내고 그래? 게스타 님은 하렘에 안 들어갔어도 신분상 너랑 맺어질 수 없는 사람인데. 몰입하지 마.”
“나랑 맺어지진 않더라도 게스타 님만 바라봐 줄 귀족 영애들이 한가득이잖아. 그중 한 사람과 맺어졌으면 지금처럼 울 일은 없겠지!”
“그 귀족 영애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을 텐데?”
“그래도 지금보단 낫겠지! 나쁜 여자를 만나더라도 로르드 가에서 애지중지하는 자식이니, 재상 부부가 나서서 이혼시켰을 테니까.”
“…….”
“하지만 황제를 상대론 그럴 수도 없잖아. 이혼도 못 하고 저렇게 우시는 게 너무 속상해.”
동료 사서는 쯧쯧 혀를 차고서 다시 아까 앉아 있던 자리로 가더니, 탁자에 다리를 올려두면서 시큰둥하게 경고했다.
“동정심을 가지는 건 네 선택인데.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쏟아봤자 너만 손해란 건 알아둬. 그만 열 내.”
* * * 연회 날. 라틸은 아예 등장할 때부터 클라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저걸 좀 봐요.”
“꼭 붙어 계시네.”
“그래도 보기 좋네요.”
“가짜 폐하 사건 때 가짜가 가짜인 건 몰라본 건 클라인 님뿐이라던데. 그런데도 저렇게 챙기시는 걸 보니 정말 총애하시는가 보죠?”
“카리센 황제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챙기는 건지도 모릅니다. 카리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건지도…….”
라틸은 사람들이 작게 소곤대는 소리를 모른 척하며, 일부러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평소 입고 다니는 요란한 복장 대신, 오늘 클라인은 진짜 황자처럼 입고 있었다. 그 덕에 다른 때보다 더욱 화려해 보였는데, 워낙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보니 그 화려함까지도 클라인이 얼굴로 누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클라인은 얼핏 봐도 아름답지만. 뜯어보면 더욱 아름다워서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라틸이 갑자기 클라인을 챙기고 있어도, 다들 이상하게 여기기보다는 ‘저 정도라면’ 하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자, 클라인. 이거 먹거라. 화월국에서 먹는 연두부 요리라는데 무척 맛있어.”
“화월국 요리요?”
“화월국에서 요리 유학을 하고 온 궁정 요리사가 있거든. 맛있다.”
클라인이 라틸이 먹여준 음식을 먹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귀족들은 안 보는 척 곁눈질하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했다. 특히 아트락시 공작과도 로르드 재상과도 가깝지 않은 귀족들은 더욱 머리를 굴려댔다.
“클라인 황자가 국서가 되면 나라와 나라의 결합에 도움이 될 겁니다. 카리센은 손을 잡아서 나쁜 나라는 아니지요.”
“클라인 황자는 국서가 되기엔 너무 멍청하지 않습니까?”
“멍청하니까 좋은 거 아닙니까? 클라인 황자 뒤엔 권력을 다 차지하려 드는 세력은 없으니까요.”
“아트락시 공작이나 로르드 재상이 힘을 틀어쥐는 것보단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라틸은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듯하자 만족해서 클라인을 더욱 챙겨주었다. 클라인은 영문도 모르고서 라틸의 옆에 붙어 있다가, 음악이 시작되자 춤도 같이 추러 나갔다. 춤이 끝나자 클라인은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라틸과 손깍지를 껴고 마주 서서 물어보았다.
“폐하께서 절 가장 좋아하는 걸 압니다.”
아니,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찬 말이었다. 사람들의 귀가 더욱 이쪽으로 쏠리자, 라틸은 부정하지 않고 말만 돌렸다.
“하도 빙글빙글 돌았더니 머리가 어지럽다. 둘만 있는데 가서 좀 쉬자.”
‘둘만 있는데 가신다고!’
‘노골적으로 챙기시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우시단 건가?’
* * * 한편, 라틸이 ‘나는 로드일까?’에 대한 고민을 잠시 뒤로 미루고서 두 개로 나누어진 힘의 균형을 세 조각으로 쪼개려 애쓰는 사이. 아직 틀라는 ’내가 로드일까?‘에 대한 불안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부리던 부하들에게 ’내가 가짜 같아? ‘란 말을 할 수 없다 보니, 그 역시 라틸 이상으로 갑갑했다. 아낙차는 틀라의 옆에 앉아 지하 성 서가에서 가져온 흑마법 책을 살피다가, 아들의 그런 어두운 낯빛을 눈치채고서 물었다.
“고민이 있니?”
틀라는 차마 ‘내가 뱀파이어 로드가 아닐까 봐 걱정이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네. 좀 막막하네요. ……이럴 땐 형제자매가 있었으면 해요.”
틀라는 무릎 위에 올려둔 노트를 옆으로 치우고서 침대에 엎어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그러나 아낙차는 동의하지 않았다.
“형제자매도 사이가 좋아야 좋은 거지. 아니면 옆에서 뒤통수나 맞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은 상대도 더 어렵지. 레안과 라틸을 봐라.”
동의할 수 없는 예시에 틀라가 의아해서 물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잖아요?”
한때 틀라는 자신도 라틸 같은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레안의 뒤를 짧은 다리로 오리처럼 쫓아다니는 라틸이 좀 부러웠다. 얼마 가지 않아 그 다리 짧은 아기는 오리가 아니라 악어란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틀라는 여전히, 새끼 악어라도 자기 악어는 귀여울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아낙차는 코웃음을 쳤다.
“내내 자기 동생을 의심하면서 제 아버지에게 동생을 조사해보란 이야기만 해대던 레안이 과연 라틸을 좋아했을까?”
“무슨 소리세요?”
“레안이 라틸을 의심하고, 그걸로 선황제께서 고민하던 걸 보았지.”
“정말이에요?”
“사람들은 선황후가 라틸을 배신했다고들 하는데, 내가 볼 때 주범은 레안 황자다. 그러고도 남지.”
틀라는 전부 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놀란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낙차는 대번에 알아차리고 되물었다.
“처음 듣니?”
“네.”
“……선황제 얘기야 내가 함구했으니 몰랐겠지만. 선황후와 레안 황자가 라틸을 배신한 이야기도 모르니?”
“몰랐어요.”
틀라는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목 부근을 얼결에 만지작거렸다. 손에 희미한 금이 느껴졌다. 아낙차는 고개를 기웃했으나, 틀라가 워낙 외진 지하 성에 고립되어 살아가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책에 열중했다. 하지만 틀라는 계속 목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의 대화로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란 걸 알게 되어서. 게다가 그걸 깨닫자 새삼 의심스러웠다.
“여우 가면은 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안 해 주었을까요.”
“관련 없는 일이라 안 한 게 아닐까?”
“종종 황궁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커다란 사건만 말을 안 한다고요? 좀 이상해요.”
한참 고민하던 틀라는 우선 여우 가면에게 이 문제를 먼저 물어볼 생각을 하고서 방을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여우 가면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방 안에도 없었다. 나가는 걸 못 보았는데도. 나중에 찾아봐야지, 생각한 틀라는 어쩔 수 없이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을 2/3쯤 닫았을 때 그의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작은 초상화 끄트머리.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만 보이는 어떤 것이 여우 가면의 예비용 가면 아래로 삐져나와 있었다.
‘저건?’
틀라는 다시 문을 열고 그쪽으로 다가가, 삐져나온 작은 초상화 끄트머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이윽고 초상화를 본 틀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우 가면이 왜 이걸……?’
* * * 그 시각. 권력에 관심이 많은 중립 귀족들은 라틸이 클라인 황자를 가장 총애하는 일을 두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나, 권력에 관심이 없는 중립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서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을 비웃는 데 바빴다.
“폐하의 총애를 두고 그렇게 다퉈대더니. 실익은 클라인 황자가 가져갔구만.”
“최근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모릅니다. 똑같은 날짜에 똑같은 시각에 계속 초대장을 보내대니.”
“그러니까요. 어느 쪽에도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한쪽에 붙으라고 닦달을 해댔잖습니까.”
이런 분위기를 예민한 아트락시 공작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트락시 공작은 타시르와 대화를 나누기만 할 뿐 황제 곁에도 가지 못하는 아들을 보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로르드 재상을 찾아가 제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외국인 황자를 국서로 둘 수는 없지. 폐하께서 클라인 황자에게서 관심을 거둘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두 사람이 그만 싸우고 힘을 합치는 게 어떤가?”
하지만 로르드 재상은 아트락시 공작이 내민 손을 대번에 찰싹 쳐버렸다.
“네 아들내미가 국서 되는 걸 보느니 외국 황자가 국서 되는 게 백배는 낫네.”
로르드 재상은 그 말을 하자마자 아트락시 공작을 흘겨보고 자리를 피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다 같이 후궁일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불면 날아갈세라 키운 아들이 나중에 누군가의 아래에서 기죽어 살 생각을 하면 그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안 되겠다. 게스타가 마음이 많이 여리지만 그래도 같이 머리를 모아 봐야겠어.‘
로르드 재상은 게스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게스타를 찾아서 머리를 맞대고 클라인에게서 총애를 뺏어올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물론, 이건 절대로 나쁜 게 아니라고 착한 아들을 좀 설득하긴 해야겠지만.
“게스타는 어디에 있지? 게스타를 보았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게스타가 보이질 않았다. 여기저기 곳곳을 다 돌아다닌 후에야, 로르드 재상은 연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계단 부근에서 아들을 발견했다. 아들은 계단 옆 바닥에서 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르드 재상은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커다란 기둥 하나를 지나가느라 잠깐 그쪽을 못 보는 사이. 어느새 아들이 사라져 있지 않은가.
’아니, 얘가 어딜 갔지?‘
의아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뒤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 커다란 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혹시 아들이 상처받아서 뛰어내린 건 아닌가, 로르드 재상은 기겁해서 돌아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