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목적 있는 총애2021.03.31.
생각해 볼 것도 없는 문제였다.
“둘 다 안 갈 겁니다.”
라틸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다시 접시 속을 떠다니는 버섯을 건졌다.
“역시 그게 낫겠지요?”
시종장 역시 라틸의 선택이 옳다고 여기는지 바로 동의했다. 라나문을 지지하는 입장이면서도. 라틸은 버섯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시종장에게 그만 나가보란 신호를 보냈다. 시종장이 나가자 라틸은 스푼을 도로 내려놓고서 팔짱을 꼈다. 원하는 구도는 후궁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국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서로서로 말려주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싸우는 것도 적당해야지. 저렇게 딱 두 패거리로 나누어졌다간 무슨 정책을 펼치려 해도 한쪽은 무조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 정책이 옳은지 그른지는 관심 없고, 그저 상대에게 반대하기 위해서.
‘대립하되, 지금보다는 덜 싸워야 한다. 딱 이전 수준이 나은데.’
대립할 부분은 대립하면서도 국정에 방해되지 않는 선의……. 생각에 잠긴 채 라틸은 스푼 끄트머리를 잡고서 테이블을 툭 툭 툭 무의식중에 두드렸다.
‘클라인!’
그러다 수프가 거의 다 식어버렸을 즈음. 라틸은 그 두 세력을 견제할 만한 완벽한 인물을 떠올리고서 스푼을 쾅 내려놓았다.
‘클라인은 강대국 황자이니 아트락시 공작이나 재상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세력이 강하지만 여기서 세력을 구축하진 않았으니 다른 귀족들에게도 덜 위협적이야.’
타시르와 칼라인은 이번에 라틸이 황궁에 돌아오는 일에 큰 공을 세웠는데도 평민인 데다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 세력이 없으니 치고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로르드 재상도 아트락시 공작도 그들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으니, 잠깐 밀어준다 해도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되기 어려웠다. 여러모로 클라인이 완벽했다. 왜 이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나 싶을 만큼.
‘하긴. 처음엔 분명 하이신스가 보낸 첩자일 거라 여겼으니. 어쨌든 됐어. 적당한 핑계를 대고서 클라인을 좀 밀어줘야겠다. 삼파전이 되면 아트락시 공작과 재상도 좀 덜 싸워대겠지.’
* * *
“폐하? 어디 가십니까?”
“칼라인에게. 내가 먹을 음식이랑 환자가 먹을 만한 수프를 싸줘.”
“칼라인 님이 좋아하시겠군요. 곧 가져오겠습니다.”
클라인을 로르드 재상과 아트락시 공작을 견제할 인물로 고른 건 완벽한 선택이다. 하지만 어떻게? 뭘 계기로 자연스럽게 그를 끌어올릴까? 이 부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라틸은 혼자 조용히 고민해보기로 하고서 전용 주방장에게 요리를 만들게 한 다음 칼라인의 방으로 찾아갔다. 현재 칼라인은 공식적으로는 몸이 좋지 않아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상태였다. 그곳에 가면 완전히 혼자 지낼 수 있으니, 지금 같은 때 틀어박혀 있기에 딱 적당했다.
“아. 여기서부턴 내가 가져가지.”
라틸은 하인이 웨건을 직접 칼라인의 방으로 끌고 가려는 걸 막고서, 방 안으로는 혼자만 들어왔다.
“제 방을 참 알뜰하게 사용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방문을 닫고 불을 켜자마자 안쪽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얼른 몸을 돌렸다.
“칼라인!”
융단 위에 칼라인이 긴 다리를 쭉 펼치고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언제 왔느냐?”
라틸이 반가워서 다가가자, 칼라인은 책을 덮어 옆에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켜 라틸이 문가에 두고 온 웨건을 직접 탁자로 끌었다.
“언제 왔냐니까?”
“주인께서 방만 사용하고 가시기 전에 왔습니다.”
라틸이 장난스럽게 쏘아보자, 칼라인은 웨건에 놓인 접시를 탁자에 하나하나 옮기면서 물었다.
“이거 수프는 제 거지요?”
“맞아.”
“계속 제 방에 다녀가셨습니까?”
“몇 번 정도.”
“제가 있을 땐 몇 번 오지도 않으시더니. 제 방이 저보다 폐하와 더 친해지겠네요.”
“말이 좀 많아졌다?”
“그동안 못 뵈었으니까요.”
“아낙차는?”
“도망쳤습니다.”
“틀라 황자는?”
“같이 도망쳤죠.”
“만나 봤어?”
“네. 저보다 약하더군요. 싸우다가 달아났습니다.”
음식 세팅을 마친 칼라인이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 앉자, 라틸은 “오오.” 하고 장난스럽게 추켜세우는 소리를 냈다.
“자신감 넘치는데?”
“타시르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정말이니까요.”
“안 물어봐도 믿어. 카리센에서도 너는 좀비를 쉽게 쉽게 제압했잖아.”
“신경을 써 주셨군요.”
“하지만 헤움 황자도 그렇고 틀라도 그렇고, 어둠의 힘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별로 강해지는 건 아닌가 봐.”
칼라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조용히 라틸의 앞쪽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대신 썰어 주었다.
“하긴. 그러니까 부활할 때마다 죽은 거겠지. 뭔가 약하니까.”
하지만 라틸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손을 움찔하더니 갑자기 잘 사용하던 나이프를 도로 내려놓았다. 왜 그러나 싶어 보자, 칼라인은 서운하단 투로 중얼거렸다.
“제가 강하단 소리는 절대로 안 해주시는군요.”
“너 강한 건 전 국민이 알걸? 전 국민이 뭐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알 거다.”
라틸이 너스레를 떨자 칼라인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펴고서 수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 라틸은 그에게 자신이 본 환상에 관해 묻고 싶어졌다. 환상 속에서 칼라인은 머리가 길었다. 칼라인의 기억 속에서 칼라인도 머리가 길었다. 그러니 자신의 환상 속에서 칼라인은 지금보다 나이가 어린 게 분명했다. 외관상은 아무 차이가 없지만. 어쨌든, 그때 일에 대해 슬쩍 떠보고 싶었다. 뭘 묻고 싶은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뭐든 과거에 관해 묻고 싶다. 자신이 모르던 시기의 칼라인이 궁금해서. 그렇지만 꽤 아픈 과거 같아서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고, 결국 라틸은 칼라인의 머리카락을 괜히 가리켰다.
“넌 좀 더 장발이 어울릴 것 같아.”
칼라인은 수프를 마시다가 자기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손으로 쥐었다 폈다. 뭐라 대답을 할 느낌이라, 라틸은 그가 뭐라 할지 기다렸다. 하지만 칼라인이 한 말은 별 얘기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길면 거추장스러워서 용병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너무 무난할 뿐.
“넌 지금 용병이 아니잖아.”
이에 라틸이 좀 더 떠보았지만 칼라인은 넘어오지 않았다.
“주인께서 원하신다면 머리를 좀 더 기르겠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고, 라틸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이 반반이었다. 과거 속 밝은 칼라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반. 다른 여자를 따라 죽겠다며 울던 시절의 그를 보기 싫은 마음 반.
‘하긴. 밝았다곤 해도 그냥 지금에 비하면 밝단 거지만.’
결국, 라틸은 후자를 선택했다.
“생각해보니 안 기르는 게 낫겠어. 넌 용병은 아니지만, 지금도 가끔 내 부탁으로 싸우러 나가잖아. 너한테 편한 게 최고지. 안 그래?”
칼라인은 희미하게 웃고서 물병을 잡더니 물을 마셨다.
‘아니, 쟤는 물을 마셔도 뭐 저렇게…….’
그 순간. 퍼뜩 라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되겠다!’
* * * 라틸이 떠올린 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자신이 클라인을 총애하고 있단 걸 알릴 방법이었다.
‘클라인 생일이 6월 1일이었지.’
지금은 7월이었으니 사실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서너 달이 지난 것도 아니니, 이 정도쯤은 적당히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집무실로 돌아간 라틸은 시종장을 부른 다음 들뜬 목소리를 누르며 지시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클라인 생일이 지나갔더라고요.”
“예. 그랬지요.”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가면 미안하잖아요. 황자면 자기 나라에서 엄청나게 챙겨줬을 텐데.”
시종장은 클라인을 싫어하기에 침묵을 선택했으나 라틸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시기가 시기이니 너무 성대하게는 아니더라도, 체면이 설 정도로라도 연회를 열어줘야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셔야지요.”
* * * 라틸이 굳이 이 일을 비밀에 부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클라인 본인에게 직접 시종을 보내 ‘뭘 가지고 싶냐’고 물은 덕에 하렘 사람들도 곧 이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소문이 가장 빠르게 번져나간 원인은 라틸이 보낸 시종이 아니라, 클라인 본인이었다.
“폐하께서 보낸 시종이 전하더라고. 폐하께서 무엇이든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하라 하십니다, 이렇게.”
클라인이 후궁들에게 커피를 마시자 해놓고서, 그들이 찾아오자 두 시간 내내 자랑만 늘어놓은 것이다. 칼라인은 관심 없단 얼굴로 흘려들었고, 라나문은 애초에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게스타는 클라인을 어려워하느라 거의 말을 하지 않아서, 사실상 제대로 대응해 주는 건 타시르와 대신관 뿐이었는데도 클라인은 개의치 않았다.
“저라면 폐하께 개인용 연무장을 달라고 할 겁니다. 클라인 님도 운동을 많이 해야 하니, 그런 걸 달라 하세요.”
“아니요, 대신관 님. 하렘 안에 따로 여유 공간이 없으니 개인용 연무장을 받더라도 이 안에 있진 않을 건데. 그러면 왔다 갔다 시간만 흘러가죠. 클라인 님, 카리센에 한달이나 두 달 정도 있다 오겠다고 하시지요.”
클라인은 턱이 천장을 볼 정도로 높게 들고서 으쓱거렸다. 사실 라틸이 황궁에 복귀한 후 그를 잘 찾지 않아서 서운했는데. 지나간 생일을 챙겨주겠다고 하자 마음이 많이 풀렸다. 다 풀린 건 아니었지만. 그러다 클라인의 시선이 영혼이 빨려나간 표정으로 다 식은 커피를 보고만 있는 게스타에게 닿았다. 그 모습을 보자 클라인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게스타에게 당한 일들이 떠올라서. 게스타의 시종이 자신에게 물벼락을 끼얹은 일, 라틸이 자신에게 들렀다가 5분도 안 되어 일하러 가게 되었을 때, 게스타가 위로하는 척 속을 긁은 일 등등. 그 생각을 하자 묵혀 놨던 원한이 다시 솟아서, 클라인은 일부러 게스타에게 동정하는 척 말했다.
“어쩌냐, 무말랭이. 생일이 지났기는 너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폐하께서 나만 챙기셔서?”
“…….”
“하긴, 넌 존재감이 없으니까.”
게스타가 상처 받은 표정이 되자 클라인은 그제야 만족해서 타시르 쪽을 보고 웃었다.
“그래, 타시르. 아까 무슨 얘기 했더라?”
타시르는 아까 한 얘기에 대해 들려주면서도 연신 게스타를 힐긋거렸다. 게스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풍기는 분위기가 섬뜩했다. 아무도 게스타를 눈여겨 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뿐. 게스타의 성격이 좋지 않단 걸 아는 타시르만이 미래에 대한 호기심에 즐거워졌다.
‘저 매운맛 두부 도련님, 또 한 판 뒤집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