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반드시 내가2021.03.28.
“괜찮으시겠습니까?”
서넛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라틸이 레안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레안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계속 미룰 수는 없죠.”
라틸은 덤덤한 척 대답했다. 라틸은 여전히 자신이 로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말도 안 되니까. 하지만 자신에게 생겨나는 능력들이 신경 쓰였다. 속마음을 읽게 되었을 때는 그저 좋기만 했는데. 하나하나 그 숫자가 늘어나자 두려웠다. 왜 내 힘이 그렇게 세진 거지? 왜 나는 그런 환상을 보는 거지? 왜 나는 피 냄새를 잘 맡게 된 거지? 오빠를 만나볼 때였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봐야 했습니다.”
* * * 지나가는 마차를 잡아탄 라틸은 레안이 머무는 별궁으로 갔다. 근처에 두고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라틸은 일부러 일이 터진 후에도 오빠를 먼 곳에 쫓아 보내진 않았는데, 그 덕을 지금에야 보고 있었다. 마차가 별궁 앞에 도착하자, 호위를 핑계로 레안을 감시 중이던 병사가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라틸이 말없이 망토를 내리자 병사는 깜짝 놀라더니, 소란을 피우지 않고 옆으로 물러서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마차가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에서 내린 라틸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몇몇 사람을 마주쳤지만, 레안의 방 앞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라틸을 말리지 못했다. 방 앞에 선 라틸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바로 문을 노크했다. ‘쿵쿵’ 화를 담아 문을 내려치자, 오래 지나지 않아 안에서 “누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그래. 너네.”
레안은 문을 반쯤 열고서 착잡한 시선을 보냈으나, 라틸은 안부도 묻지 않고 곧장 응접실만 턱으로 가리켰다.
“나와. 물어볼 거 있어.”
방에서 나온 레안은 부드러운 잠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보송한 털 슬리퍼까지 신고 있어서, 라틸은 괜히 화가 났다.
“커피?”
응접실 소파에 앉은 라틸에게, 레안이 여전히 사이좋은 남매라도 되는 것처럼 묻자 그 화는 더욱 커졌다.
“꺼져.”
“오라며.”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레안은 맞은편 소파에 앉으면서 말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주춤주춤 눈치를 보던 하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라틸과 레안의 앞에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놓고 가자 라틸은 차갑게 물었다.
“뭘 계기로 날 로드라 생각했던 거야?”
“그게 궁금해졌어? 갑자기 이 늦은 밤에?”
“늦은 밤이니까 궁금해진 거야. 자려고 누웠는데 속 터져서. 잠이 안 와서.”
거짓말이지만 라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라틸은 레안을 노려보며, 코코아 담긴 컵은 소파 뒤쪽에 서 있는 서넛에게 건넸다.
“이거 마시면서 호위하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서넛은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컵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서 후후 불었다.
“내가 진짜, 일하다가도 순간순간 열이 뻗쳐. 아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라 그렇다 쳐. 나랑 같이 나고 자랐으면서 왜 그딴 생각을 해?”
“몇 가지 징후가 있어.”
“무슨 징후?”
“소소한 징후들. 그걸 알게 된 시점은 하이신스가 반란이 일어나 자기 나라에 돌아갔던 때였고. 하지만 그 징후가 나타났던 건 너와 그가 함께 붙어 있던 시기였지. 그래서 헷갈렸어. 그 징후가 너한테서 나타난 건지, 그 사람한테서 나타난 건지.”
라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충 저랬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들으니 더 불쾌했다.
“이후에 하이신스는 전혀 관련 없단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 저주받은 존재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 그래서 미루고 미루면서 조사만 한 거야.”
뒤에서 서넛이 계속 후 후 코코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시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데.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라틸. 네가 반대로 내 입장이었더라면 넌 어떻게 했겠어? 내 존재가 나라와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면?”
라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변명을 계속 써먹으려면 엄말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엄마를 배신하면서까지 오빠 안위를 챙기는 순간, 이미 그 변명은 더 못 써.”
라틸이 악담을 해도 레안은 침착하게 웃기만 하다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게 물었다.
“그래, 라틸. 나는 네 말대로 이중적이고 이기적이라 이랬다고 하자.”
“‘하자’가 아니라 그런 거라고.”
“넌? 넌 어떤데?”
레안이 찻잔을 코앞으로 가져갔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그가 지평선 너머를 보듯 라틸을 응시했다.
“넌 네 스스로가 나라에 해가 되는 존재란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하겠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해야 돼?”
“만약 그렇다면.”
“해가 안 될 방법을 찾으면 돼.”
“해가 될지 말지 여부가 네 의지와 상관없는 거라면?”
“글쎄. 내가 아무리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더라도, 사이 좋은 동복동생을 의심만으로 죽이려 한다거나, 친엄마를 공개적으로 배신하는 놈보다 더 나쁜 존재가 될까 싶네.”
라틸이 빈정거렸으나 레안은 역시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 신념이 옳은지 아닌지는 신념을 지키는 데 아무 관계도 없는 모양이었고.
“궁금해서 왔는데 역시. 별 이유도 없는 헛소리였네. 그래도 오길 다행이야. 오빠가 진짜 큰 증거라도 있어서 그랬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레안이 웃었다.
“내 말이 진짜일까 봐 걱정했단 걸 보니, 너도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나 보네.”
“그러길 바라는 거겠지.”
라틸은 서넛이 들고 있는 코코아 컵을 뺏어서 탁자 위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두었다.
“하지만 아냐. 왜냐. 틀라가 살아서 아낙차 후궁을 빼내 간 걸 본 목격자들이 많거든.”
“확신할 수 있어?”
“어.”
방긋 웃은 라틸은 컵을 툭 쳐버렸다. 컵은 옆으로 넘어지면서 탁자 위로 검은 코코아를 끈적하게 퍼트렸다. 테이블을 흘러간 코코아가 값비싼 융단 위로 떨어지는 사이, 라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현관을 나갔다. 하지만 마차로 걸어가는 라틸은 두 손을 꽉 쥐고서 세뇌하듯 스스로에게 읊조렸다.
‘내가 아냐. 반드시 내가 아니어야 한다. 절대 내가 아니어야 해.’
* * * 같은 시각. 어두컴컴한 지하 성안에서 틀라는 방 안을 연신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젠장…… 젠장!”
자꾸만 그 인간 용병에게 꼼짝 못 하고 밀리던 순간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 화 안쪽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있었다.
‘난 뱀파이어 로드인데. 어째서…….’
-인간들은 도마뱀이 탈피한다는 걸 알지만, 도마뱀이 무슨 수로 탈피를 시작하는지는 모르지요. 마찬가집니다. 저는 로드가 각성한다는 걸 알 뿐, 무슨 수로 각성하는지는 모릅니다.
여우 가면이 조언이랍시고 해준 말이 이따위였다. 틀라는 옥좌 위에 앉아 엄지를 씹었다. 자신은 뱀파이어 로드라는데. 로드의 권능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재에 서 본 역대 로드들의 힘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닌데도. 오히려 그는 식시귀가 되어 부활한 헤움과 비슷했다. 틀라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나다. 반드시 내가 로드여야 한다. 반드시 내가 로드여야 해.’
* * * 쾅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몸 위로 나무상자가 우르르 떨어졌다. 상자에 어중간하게 튀어나온 못이 얼굴을 긋자 찌릿한 통증이 나며 피가 흘러나왔다.
‘진짜 욕 나오네.’
라틸은 이를 악물었다. 오빠와 대화를 하고 나니 속이 더 터질 것 같아서, 별궁에서 돌아오자마자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모르겠다. 이건 그 주정뱅이들과 싸우기 전에 소시지 먹으면서 본 환상 아닌가? 그런데 그 환상을 왜 지금 이어서 보는 거지? 오두막 안에 있던 남자가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까지 보고 환상이 끊어졌는데. 그 후 ‘몸주인’은 결국 그 주먹에 맞아 상자 더미에 쓰러진 모양이다.
‘내 방에서 이어서 꾸는 걸 보면 역시 주정뱅이들 기억은 아니야.’
라틸은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해보려 하지만, ‘몸주인’이 흐느끼는 소리 때문에 잘되지 않았다.
“아빠. 왜, 왜 그래요. 왜 나한테 그래요.”
“네 아빠가 아니랬지!”
버럭 소리를 지른 남자가 옆에 놓인 도끼를 집어 들자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미친 새끼!’
남의 환상이라 해도 이런 장면을 굳이 보고 싶진 않았다.
“그만해!”
다행히 남자가 도끼를 휘두르기 전 오두막 안에 있던 여자가 달려 나오더니 남자를 밀쳤다. 그 바람에 남자가 발을 헛디디면서, 들고 있던 도끼가 여자의 등 위로 떨어졌다.
“엄, 엄마!”
몸주인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남자 역시 여자를 공격할 마음은 없었던지 황급히 여자를 살피며 물었다.
“여보? 괜찮아? 여보! 여보!”
도끼가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은 듯 피는 거의 흐르지 않았다. 피는 자기 얼굴에서 나고 있는데, 그래도 몸주인은 얼른 일어나 여자에게 달려가며 횡설수설했다.
“의사를 불러올게요. 엄마 내가 의사를…….”
하지만 말을 마치기 전. 남자가 휘두른 주먹에 몸주인이 다시 상자로 날아갔다. 어디에 뭘 잘못 부딪친 건지 이번에는 시야에 불그스름한 게 가득 차올랐다. 이마 부근이 찢어지면서 눈에 피가 들어간 듯했다.
“아빠. 왜 그래.”
몸주인이 겁먹은 목소리로 흐느꼈으나, 남자는 몸주인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쳐다보다 삿대질을 했다.
“왜 그러냐고? 넌 내 딸이 아니니까! 넌 아내가 주워온 애라고!”
“아빠…….”
“미친 짓이었지. 이런 저주받은 것이란 걸 알았다면 도로 가져다 버렸어야 하는데.”
“아빠, 나는…….”
“네년 때문에 네 엄마가 흑마법사 소리를 듣고 있다. 너 때문에! 네년이 끌고 다니는 그 불길한 징조들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몸주인이 우는 것 같았다.
“이젠 이 짓도 질렸다. 넌 내 딸도 아니잖아! 저주받은 년 하나 때문에 우리 식구가 왜 이 고생이야!”
오두막 안에서 아이가 ‘으앵으앵’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오두막 안, 요람 안에 있는 아이를 본 몸주인이 시선을 돌려 이번엔 여자 쪽을 보았다. 여자는 아직 바닥에 누운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여자도 여기까지가 한계인지, 남자를 더 말리진 않았다.
“엄마…… 아니지? 아빠가 화나서 저러는 거지?”
몸주인이 흐느끼면서 여자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여자는 얼굴을 가린 채 울먹였다.
“미안해 도미스.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엄마도 힘들어. 너랑 있고 싶지 않아. 널 지키다간 내 진짜 딸 안야까지 죽게 될 거야.”
* * *
‘도미스!’
라틸은 눈을 번쩍 떴다. 상체를 일으키자 등에 식은땀이 축축했다. 창밖은 이미 환한 아침 햇살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밝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여기만 이상하게 음침한 느낌. 아까 꾼 그 빌어먹을 꿈 때문이다. 라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자신이 들은 이름을 떠올렸다.
‘도미스. 칼라인의…… 애인.’
라틸은 당황했다.
‘죽은 사람 아니었어?’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라틸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얼른 욕실로 달려가 찬물로 세수했다. 하지만 머리를 감고 옷을 입고 하루를 보낼 채비를 하면서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서도 라틸은 마음이 무거워 입맛이 없었다. 갑자기 그 사람의 과거를 연달아 보는 것도 이상한데, 하필 또 그 내용이 너무 어둡고 눅눅해서 더욱 꺼림칙했다. 결국 라틸은 건성으로 수프만 몇 번 떠먹다가 시종장에게 지시했다.
“사블레 후작. 불안정한 시기이니 귀족들 관리도 좀 해야겠습니다. 나한테 들어온 초대장 중에 아무거나 하나 가져다줘요. 파티에 갈 테니까.”
수도 안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파티가 열리면 황족들에게도 자연적으로 초대장이 온다. 물론 대부분의 초대장은 시종들 선에서 전해지지 않지만, 파티를 열면서 초대장을 보내는 건 귀족들의 의무였다. 라틸은 황제가 된 후 한 번도 귀족들의 초대에 응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기분이 좋지 않으니, 최대한 밝고 활발한 분위기에 끼기 위해 그중 한 곳에 응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종장은 바로 초대장을 골라오지 않고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왜요?”
좀 염려하는 시선이라 라틸이 묻자,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저…… 실은 로르드 공작가와 아트락시 공작가에서 초대장이 하나씩 왔습니다. 둘 다 오늘 저녁 일곱 시에 시작되는 파티지요.”
라틸은 수프에서 버섯만 건져 먹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둘 다?”
“예.”
“아니, 왜 같은 날 같은 시간…… 세상에. 둘 사이가 더 나빠졌어요?”
라틸은 황당해서 혀를 찼다. 라틸이야 초대를 받아도 안 가면 그만이고, 초대를 보내는 쪽도 의무이니 보낼 뿐 정말로 올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반면 다른 귀족들은 두 대단한 귀족 가문에서 보내는 초대장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두 가문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파티를 연다는 건 사실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요? 전에 회의장에서도 좀 이상하다 싶더니.”
“사소하게는 미술품을 사들이는 일부터 크게는 안건에 관해서까지, 계속 싸워대고 있답니다.”
라틸이 혀를 차자 시종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