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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멱살을 잡으려고 (112/367)

112화. 멱살을 잡으려고2021.03.24.

라틸은 자신이 이렇게 세다는 데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16551096155611.png“내가 이렇게 세?”

라틸은 한 번 더 탄성을 뱉었다. 물론 자신이 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발길질 한 번에 성인을 이쪽 길에서 반대쪽 벽으로 뻥 차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을 말랑한 공 차듯 차버리다니.

16551096155618.jpg“이 미친 여자가?”

하지만 주정뱅이들은 라틸의 진심 어린 놀라움을 듣고 더욱 화를 냈다. 라틸이 자기들을 놀리기 위해 깝죽댄다 여기는 눈치였다.

16551096155618.jpg“감히 내 친구를 쳐?”

16551096155618.jpg“똑같이 던져버려!”

여럿인데다 술기운까지 더해지자 주정뱅이들은 방금 전 자기들 눈으로 본 그 믿기지 못할 광경을 다 까먹었다. 그들이 주먹을 쥐고 덤벼들자 라틸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16551096155611.png‘안 그래도 기분 더러웠는데.’

머리 긴 칼라인이 도움을 주는 부분까지는 그냥 좀 신기한 정도였는데. 이후 오두막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이 주먹을 휘두르려 하고 몸주인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했던 때는 정말로 화가 났다. 심지어 애초에 밤거리에 나온 것부터가 서넛의 일로 마음이 복잡해서였지 않던가. 라틸은 방긋 웃고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가장 먼저 달려든 이의 얼굴에 대고 그대로 눌렀다.

16551096155618.jpg“악!”

비명을 지른 주정뱅이가 옆으로 비틀거리자마자 라틸은 위험하게 단도를 휘두르려는 주정뱅이의 머리 쪽으로 상자 더미를 차버렸다. 상자 더미가 주정뱅이의 머리에 맞아 부서지자, 라틸은 그걸 집어서 옆에서 기습하려는 주정뱅이의 옆구리를 가로로 퍽 내려쳐버렸다. 순식간에 주정뱅이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로 날아간 동료와 같은 꼴이 되었다.

16551096155611.png“우정이 깊네. 친구랑 똑같이 날아가고 싶다니.”

그걸 본 라틸이 박수를 치며 빈정거리자 주정뱅이들은 또 술김에 공포를 잊고는 이를 갈면서 욕을 퍼부었다. 라틸은 마구 욕을 날려대는 그들의 입을 찰싹찰싹 때려줄 생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하지만 때마침 경비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16551096155611.png‘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신고 받았나보다.’

라틸은 ‘쯧’ 혀를 차면서도 주정뱅이들의 입을 때리진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자니, 가까이 달려온 경비병들이 상황을 빠르게 살피며 물었다.

16551096155618.jpg“패싸움이 벌어졌단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두 번째로 라틸에게 얻어맞았던 주정뱅이가 벽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손가락으로 라틸을 가리켰다.

16551096155618.jpg“저 여자가 우리를 때렸습니다!”

16551096155618.jpg“우린 저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오더니 때렸어요!”

16551096155618.jpg“여기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 다 저 여자가 때려서 다친 겁니다.”

16551096155618.jpg“감옥에 가둬야 돼요!”

다들 바닥에 엎어진 채로도 말을 참 잘했다. 그리고 주정뱅이들이 말을 잘할수록 경비병들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결국, 경비병 중 하나는 아예 대놓고 물었다.

16551096155618.jpg“저 여자 한 명이서 당신들…… 하나둘셋넷다섯여섯…… 몇 명이야? 하여튼 당신들 전부를 다 때렸다고? 장난해?”

16551096155618.jpg“진짭니다!”

16551096155618.jpg“저기 저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주정뱅이들은 소시지를 판 상인을 가리켰으나 상인은 라틸 쪽을 힐긋 보더니 씩 웃으면서 손에 든 집게를 들어 보였다.

16551096155618.jpg“죄송합니다, 전 이거 굽느라 못 봤어요.”

상황을 지켜보던 라틸도 안타깝단 얼굴로 덧붙였다.

16551096155611.png“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하더라, 경비병아.”

라틸의 말이 차라리 더 신빙성이 있었으나, 신고자는 확실히 주정뱅이 일행 중 한 명이었다. 경비병들은 결국 라틸과 주정뱅이들을 모두 다 데리고 치안소로 데려갔다. * * * 다른 주정뱅이들과 달리 라틸은 따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주정뱅이들이 라틸을 신고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경비병들의 눈에는 라틸이 저 덩치 좋은 이들을 혼자 때려눕힌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같은 장소에서 수사를 하면 라틸이 저 주정뱅이들에게 위협을 느껴 제대로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경비병들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결과였다. 하지만 라틸에게 이름과 주소를 물어본 경비병은 얼마 가지 않아 주정뱅이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이유로 답답해졌다.

16551096155611.png“이름 라틸. 사는 곳은 황궁?”

경비병은 커다란 책상에 라틸과 마주 보고 앉아서 조서를 쓰다가, 라틸이 히죽 웃으면서 대답하자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16551096155618.jpg“장난치지 말고. 이름.”

16551096155611.png“이름 라틸. 사는 곳은 황궁. 맞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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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틸이 또박또박 재차 말해주었지만, 경비병은 여전히 라틸이 장난을 한다고 생각해 화를 냈다.

16551096155618.jpg“이봐. 머릿수가 너무 차이 나서 그쪽이 범인이 아닐 거라 생각하긴 하는데, 완전히 혐의를 벗은 게 아니야. 지금 이런 데서 장난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라고.”

16551096155611.png“진짜인데.”

그래도 라틸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주소를 황궁이라고만 하자, 경비가 매섭게 윽박질렀다.

16551096155618.jpg“이런 거로 거짓말했다가 나중에 진짜 큰일 생길지도 몰라. 알아들어?”

16551096155611.png“알아들었는데, 라틸, 황궁 맞다니까.”

경비병은 징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아래 직급의 경비병을 불러다 지시했다.

16551096155618.jpg“여기 이 아가씨가 자기는 황궁에 산단다. 그쪽에 가서 라틸이란 여자를 아는지 묻고 와.”

16551096155618.jpg“미쳤네요.”

부하 경비병이 낄낄거리면서 웃고 나가자, 라틸은 덩달아 웃으면서 경비병 앞에 돈을 한 뭉텅이 내려놓았다. 경비병이 ‘이게 뭐야?’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라틸이 밝게 제안했다.

16551096155611.png“내기할까? 내가 황궁에 살고 있다 아니다로?”

진짜로 뭐가 있어서 저러나……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경비병은 그제야 조금 움찔했다. 귀족? 아니, 귀족이 황궁에 살진 않고. 하녀? 하녀도 황궁에 산다고 표현하진 않지. 하지만 여기서 뒤로 무르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경비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화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밖에서 동시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는 듯한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이윽고 그 모든 소리는 한 번에 사라지자, 무슨 일이지, 하는 얼굴로 경비병도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문이 덜컥 열리더니 서넛이 들어왔다. 빠르게 조사실을 살핀 서넛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이 말썽쟁이야’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라틸이 슬며시 손을 흔들어도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16551096155618.jpg“뭐야?”

경비병은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16551096155618.jpg“근위기사단 단장 서넛 경이시네.”

하지만 서넛을 바로 뒤따라 들어온 경비대장이 문을 닫으면서 설명하자, 경비병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16551096155618.jpg“단장님을 뵙습니다.”

서넛은 경비병의 인사를 받는 대신 바로 라틸에게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51096249275.png“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폐하?”

‘폐하’ 소리를 듣는 순간 경비병은 모든 행동을 멈추더니 드르륵 눈동자만 돌려 라틸을 보았다. 경비대장도 라틸이 황제란 건 몰랐던 모양이다. 역시나 움직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그 역시 경악해서 라틸만 쳐다보았다. 다들 평범한 치안소에 황제가 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잠시. 경비병과 경비대장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의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16551096155618.jpg“송구합니다, 폐하.”

16551096155618.jpg“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라틸의 말을 내내 무시한 경비병은 ‘이제 죽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라틸은 손을 저었다.

16551096155611.png“그건 됐으니 주정뱅이들 중에 혹시 피가 나도록 다친 사람은 없는지, 예전에 초록 사과를 바구니에 넣고 다니던 사람은 없는지를 확인해라. 내가 여기 있단 소리는 하지 말고.”

초록 사과와 바구니라니? 경비대장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황제가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더욱이 이 와중에 황제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도 없어서 얼른 부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대장은 다시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16551096155618.jpg“피가 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16551096155611.png‘역시. 내가 피 냄새를 맡은 거구나.’

16551096155618.jpg“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과수원을 했단 사람도 하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옛날 일인 데다, 사과나무는 없었던 거 같다 합니다.”

16551096155611.png“알았다.”

라틸은 벗어두었던 망토 모자를 다시 눌러 썼다.

16551096155611.png‘그럼 내가 본 게 주정뱅이 중 한 사람의 속마음은 아닌 건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이번 속마음은 그토록 생생하게 자신이 경험하는 것처럼 느낀 것일까?

16551096155611.png‘나한테 또 새로운 능력이 생기는 건가?’

칼라인이 나오던 환상만큼 놀랍진 않지만, 피 냄새를 남들보다 유달리 잘 맡게 된 것도 좀 이상했다.

16551096155611.png‘서넛한테만 뭐라고 할 때가 아니네. 나도 좀 이상해.’

치안소에서 나갈 준비를 하면서 라틸은 엄마가 이야기해준 오빠의 말을 떠올렸다. 라틸을 로드라 의심했다던 말을. 당연히 아니라고 부정만 하던 전제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라틸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겼다.

16551096155611.png‘대체 뭐지?’

  * * * 밤거리를 걸어가는 내내 서넛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뒤를 조용히 따라올 뿐이었다. 평소라면 이미 쓸모없지만 기분 좋은 잡담을 했을 텐데.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침묵하자, 결국 서넛은 먼저 입을 열었다.

16551096249275.png“이렇게 폐하와 나란히 걸어가니-.”

16551096155611.png“아직 화 안 풀렸습니다. 과거 회상하지 맙시다.”

16551096249275.png“……화가 오래 가시네요.”

16551096155611.png“아직 하루도 안 갔습니다.”

16551096249275.png“하긴, 폐하께선 어릴 때부터…….”

16551096155611.png“과거 회상 안 한다니까.”

16551096249275.png“폐하께선 나이가 드신 후에도 계속 속이 좁으실까요?”

16551096155611.png“아, 이 사람이?”

라틸이 확 째려보자 서넛이 어깨를 으쓱했다.

16551096249275.png“과거 이야기는 하지 말라 하시니.”

16551096155611.png“현재 이야기만 해요. 현재 이야기만!”

16551096249275.png“폐하께선 나이가 드신 후에도 계속 속이 좁으시네요.”

16551096155611.png“서넛 경!”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서넛을 보고 웃을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미소를 참았다. 지금은 같이 농담 따먹기 하면서 놀 때가 아니었다. 라틸이 팩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자 서넛은 얼른 나란히 붙으면서 중얼거렸다.

16551096249275.png“폐하께서 치안소에 잡혀가신 일은 함구하겠습니다.”

16551096155611.png“화 안 풀면 얘기 퍼뜨릴 거란 협박처럼 들립니다.”

16551096249275.png“속내를 잘 읽으십니다.”

속내 이야기에 라틸은 괜히 찔려서 움찔했다.

16551096155611.png“아주 잘 읽는 편이긴 하죠.”

서넛이 흐릿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만으로도 라틸은 기분이 풀어지려고 해서 괜히 더 속이 상했다. 이렇게 자신이 그를 철석같이 믿는데, 그가 자신을 배신한다면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16551096155611.png“서넛 경은 나 배신하면 안 됩니다.”

16551096249275.png“안 합니다.”

16551096155611.png“의심스러운데.”

16551096249275.png“괜찮습니다. 계속 의심해도.”

16551096155611.png“!”

16551096249275.png“그동안엔 제게 집중하시겠지요.”

16551096155611.png“무슨 뜻입니까?”

16551096249275.png“제가 관심받는 걸 좋아한단 뜻입니다.”

라틸이 기가 막혀서 쳐다보자, 서넛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라틸에게 건넸다.

16551096249275.png“입에 기름기 묻었습니다. 뭘 맛있게 드셨길래.”

소시지! 이 와중에 입가에 기름이 묻다니!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손수건을 빼앗듯 받아 들고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서넛은 웃으려다가 라틸이 가자미눈을 뜨고 보자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화제를 돌렸다.

16551096249275.png“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16551096155611.png“오빠한테요. 멱살 좀 잡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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