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깨끗한 감정은 사랑이 아닌데2021.03.14.
“아니, 그러면 더 궁의를 불러서 상태를 봐야지!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씀드리긴 했는데…… 궁의를 부르면 도련님 상태를 궁의가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거라고 하셔서요.”
그럴 리가 없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라틸은 입을 다물었다. 아주 불가능한 말은 아니어서. 라틸이 아픈 거라면 황명으로 함구하게 할 수 있겠지만, 라틸의 명령 없이 라나문을 먼저 진찰한 다음에는 궁의가 누구에게 이 일을 떠들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상태가 심각해?”
“우선 도련님을 어린 시절부터 담당해준 주치의에게 약을 받아 발랐습니다. 낫기를 바라야지요.”
“갑자기 얼굴이 왜 뒤집어진 건진 모르겠어?”
“모르겠습니다. 평소처럼 생활하셨거든요.”
* * *
“어라? 왜 이렇게 허겁지겁 오십니까?”
무사히 원래의 은신처로 돌아온 틀라는 여우 가면을 보자마자 멱살을 잡아채고서 이를 내밀었다.
“어떻게 된 거냐.”
여우 가면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러시는지. 제가 뭘 어쨌다고요.”
“그걸 몰라서 물어?”
“아는데 부러 묻진 않지요.”
여우 가면이 굳이 어깨까지 몇 번 떨면서 웃고 있단 표시를 해 보이자, 틀라는 화가 나서 밀치듯 그의 멱살을 놓고 옥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드인 내가 한낱 인간 용병왕에게 졌다. 인간, 용병왕에게.”
“용병왕이면 많이 강할 텐데요? 한낱은 아니지요.”
“인간이잖아! 그자는…… 그자는 인간 같지 않았어. 너무 강했다. 힘, 속도, 기술. 위압감까지 전부 다.”
틀라가 주먹으로 옥좌 손잡이를 퍽 치자 돌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틀라는 입을 약간의 틈도 없게 꽉 다물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다 내뱉길 반복했다. 여우 가면은 두 손으로 자기 가면을 감싸고는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방정맞게 물었다.
“왜 그렇지? 왜 그럴까요?”
“장난하지 마!”
틀라가 다시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여우 가면은 제 가면에서 손을 내리고서는, 연극을 하듯 크게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이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약하지 않으니까요. 용사가 마왕을 죽이는 이야기가 왜 있고…….”
“이야기잖아!”
“역대 로드들은 그렇게 강했는데도 왜 다 죽었겠습니까.”
“!”
역대 로드 이야기에 그제야 틀라도 꽉 틀어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뺐다.
“그렇군. 네 말이 일리가 있다. 이렇게 강한 힘이 있는데, 역대 로드들 역시 다 죽었지.”
틀라가 제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여우 가면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그럼요. 그러니 질 수도 있는 거지요. 게다가 로드께선 아직 각성도 못 하셨으니까요.”
“각성?”
“죽었다 깨어난 후 더 강한 신체를 가지게 된 건 맞지만, 그게 가장 강한 자리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닙니다, 로드.”
당황한 틀라는 옥좌에서 일어나 낮은 단 위를 서성이다가 물었다.
“각성은 어떻게 하는 거지? 여기서 더 뭘 해야 하는 건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전 로드가 아니니까요.”
“!”
“로드께서 스스로 알아내셔야지요.”
* * * 라나문은 화장대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자기 방에 자기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로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라나문에겐 이번 일은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주치의에게 부탁해 받아온 피부약 역시 전혀 효과가 보이지 않자, 라나문은 아예 거울을 검은 망토로 다 덮어 가려버렸다. 카르둔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가라앉을 거라고 했지만, 라나문이 볼 때는 피부가 진정되어도 이전처럼 돌아오진 않을 것 같았다.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조리실을 살펴봤지만, 음식 재료는 다들 똑같이 나갔다 하던데요.”
“비누나 향을 바꾸진 않았고?”
“네. 다 쓰던 그대로라서 대체 뭐가 문제일지…….”
그런데 두 사람이 피부가 갑자기 뒤집어진 원인을 찾기 위해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뜬금없이 대신관이 그를 찾아왔다. 라나문은 처음엔 대신관도 만나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카르둔을 통해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 병이나 외부적 요인으로 문제가 생긴 거라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마지못해 출입을 허가해주었다. 라나문은 대신관이 자기 얼굴을 보고 놀랄 거라 각오했지만, 대신관은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다친 부위가 얼굴이라 다행입니다, 라나문 님.”
이런 이야기 정도만 했을 뿐.
“바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병이나 외부 요인 때문에 얼굴이 뒤집어진 게 아니라면 효과가 없을 겁니다. 신성력은 피부를 곱게 하는 힘은 아니니까요.”
대신관이 바로 치료를 하러 다가왔고, 라나문은 일전에 그 앞에서 바지를 내린 것보다는 이게 낫다 싶어서 눈을 감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카르둔은 얼른 의자를 침대 가에 놓고서 대신관이 앉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저, 좀 사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그런데 의자에 앉은 대신관이 손을 라나문의 얼굴 근처에 가져다 대면서 평소보다 좀 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늘 거침없이 말하는 대신관답지 않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라나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는 두 번이나 날 도와주었으니 몇 개든 해도 좋다.”
“라나문 님은 폐하를 사랑하나요?”
그러나 대신관이 꺼낸 사적인 질문은 라나문의 예상보다 더욱 사적인 질문이었다. 라나문이 감았던 눈을 반쯤 뜨고 보자, 대신관의 얼굴이 평소보다 좀 불그스름한 게 보였다.
“무슨 뜻이지?”
“그냥 궁금해서요.”
“다른 질문으로 해.”
“안 사랑하신단 건가요?”
“다른 질문.”
“몇 개든 질문하라 하시더니…….”
대신관이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라나문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대신관은 치료를 끝내고 손을 내리면서 질문을 바꿨다.
“저는 제가 폐하를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만을 특별하게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대신관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란 말이야 어릴 때부터 주야장천 들어왔지요. 하지만 폐하를 뵈면 기분이 좀 다릅니다.”
카르둔이 손거울을 가져다주자, 라나문은 그걸 받고서 자기 얼굴을 비춰보며 물었다.
“어떻게 다른데?”
“폐하 옆에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더 같이 머무르고 싶고, 많은 걸 나누고 싶고, 입도 맞추고 싶고, 폐하가 평소엔 뭘 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폐하가 나 때문에 웃으면 참 좋겠다 싶고…….”
자신의 피부가 이전처럼 돌아온 걸 확인한 라나문은 손거울을 도로 카르둔에게 건네면서 대신관을 보았다. 대신관은 커다란 덩치로 뭐 그리 부끄러운 말을 했다고, 발가락을 꼬물락거리고 있었다.
“제가 폐하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건 확실하게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이런 감정은 사랑에 좀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
“이게 혹시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일까요?”
대신관이 눈을 반짝이며 라나문을 쳐다보았다. 라나문이 무슨 말을 하듯 다 믿어버릴 준비가 된 표정이었다. 카르둔은 손거울로 입가를 가린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려 라나문과 대신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라나문은 입에서 나온 말은 평이하고 차가웠다.
“그런 깨끗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지.”
“아니라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텐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는데요?”
“호기심의 시작이 아닐까 싶은데.”
“호기심?”
대신관이 ‘그런가?’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나가자, 내내 곁에 서서 상황을 지켜본 카르둔이 좀 찔리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볼 땐 대신관님이 폐하께 이성적으로 끌리시는 거 같던데. 그렇게 대놓고 사랑이 아니라 해도 괜찮을까요?”
대신관은 연적이기도 하지만 대신관이었고, 무엇보다 라나문을 두 번이나 도와준 상대였다. 그렇다 보니 대신관에게 거짓말을 한 게 좀 찔리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라나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얼음처럼 대답했다.
“난 대신관을 좋아하지만, 따로 챙겨주면 챙겨줬지 폐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질 생각은 없다.”
카르둔은 라나문의 냉정한 대답에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대신관이 라나문에게 ‘혹시 폐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라나문은 대답하지 않았던 걸 기억해서이기도 했다. 그래도 카르둔은 라나문은 시종이기에, 모순된 부분을 굳이 지적하는 대신 그저 ‘그럼요, 그럼요’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르둔은 라나문이 콩을 팥이라고 말하면 언제든 팥이라고 함께 외칠 준비가 된 유형제니까. 그러나 표정 관리를 나름대로 잘했는데도, 라나문은 대번에 카르둔의 기색을 눈치채고서 차갑게 덧붙였다.
“이건 내가 폐하를 사랑하느냐 않느냐와 관계없는 문제다.”
“예. 그럼요. 그럼요.”
“…….”
“아, 그런데 도련님. 또 ‘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또?”
“네.”
“버려.”
단호하게 말한 라나문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가더니, 깨끗해진 피부를 큰 거울로 한 번 더 확인하고서 서랍을 열어 가장 크고 화려한 보석들을 한가득 꺼냈다.
“그리고 이것들은 잘 포장하고, 사이즈가 다른 것들은 대신관에게 잘 어울리도록 새로 세공해 선물로 보내라.”
“네, 저, 그런데 도련님, 그 편지요.”
“버리라니까.”
“내용이 좀 달라졌어요. 로드가 곧 깨어날 거고 시간이 많지 않다고…… 얼른 수련을 시작해야 로드를 상대할 수 있다던가, 막 그런 식으로 써 놨던데요.”
라나문이 힐긋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카르둔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저, 아니, 요즘엔 정말로 식시귀니 좀비니 하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좀 꺼림칙하기도 해서…….”
* * * 그날 밤. 대신관이 라나문을 치료했단 보고를 받은 라틸도 대신관에게 따로 선물을 보내라 지시하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찬물이 나오도록 수조를 조절하고서 그 아래에 서자, 머리끝에서부터 오싹한 느낌이 발끝으로 주룩 타고 내려왔다. 라틸은 눈을 감은 채 찬물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타리움의 뛰어난 수도시설에 감사했다. 옛날에 물을 하나하나 퍼서 사용해야 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런데 막 세수를 끝내고 샤워 꼭지를 잠그려는 순간.
“!”
눈을 뜬 라틸은 놀라서 샤워 부스 안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착각……인가?’
라틸은 습기로 흐릿해진 거울을 보다가 손을 뻗어 거울을 문질러보았다. 거울의 뿌연 기운이 가시며 라틸의 손이 닿은 부분이 맑게 변하자, 그 안에서 굳은 표정을 한 라틸의 얼굴이 드러났다. 라틸이 눈살을 찌푸리고서 샤워 부스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얼른 커다란 목욕수건을 가져와 라틸의 몸을 덮고 물기를 닦아주었다. 라틸은 두 팔을 벌린 채 서서 아까 거울에서 본 이상한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 사이에도 시녀들은 라틸이 보송한 잠옷을 걸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라틸은 익숙하게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소매에 팔을 꿰고 옷이 몸에 편안하게 떨어지도록 어깨선을 조절했다. 그런데 막 잠옷을 입고서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코끝으로 짙은 피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라틸은 욕실 앞에 멈춰선 채 문을 빤히 쳐다보다가, 저벅저벅 걸어가 응접실로 나갔다.
“폐하, 필요한 게 있으세요?”
라틸이 나오자 체스를 두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시녀들이 얼른 일어서며 물어왔다. 라틸은 체스판 위에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말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혹시 누가 다쳤어? 피 냄새가 나는데.”
“피요?”
시녀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전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아니요.”
“왜 그러세요? 어디서 피 냄새가 나세요?”
“어디서 나는 거지?”
시녀들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방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걸 보다가, 라틸은 자신의 목욕 시중을 들어준 시녀들에게 물었다.
“피 냄새 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