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내 아들을 쓰레기로 만들었으니2021.03.10.
국무회의 중, 마을 단위로 시체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을 탐색하는 안건이 올라왔을 때였다.
“당연히 대신관 님께 양해를 구하고 성기사들을 보내 조사해야 합니다. 일반 병사들을 보냈다가 어찌 될지 알고요.”
“안 됩니다, 폐하. 성기사들은 일반 병사들보다 그 숫자가 훨씬 적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기사들만 보낸다고요? 그 소수의 인원으로 전국을 다 돌려면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까요?”
“그럼 일반 병사들만 보내자는 거요, 로르드 재상?”
“그럴 리가요. 성기사들과 일반 병사들을 섞어서 보내야 한단 거지요. 그편이 훨씬 효율적이니까요.”
“일반 병사들이 이 일에 도움이 될까요? 흑마법이 연루되어 있는데, 일반 병사들을 보냈다가 죄다 흑마법에 죽거나 저주를 받으면 오히려 훨씬 손해 아닙니까?”
“아트락시 공작은 흑마법에 대해 잘 아나 봅니다? 일반 병사들을 보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잘 아시나 보죠?”
라틸은 눈알을 데굴데굴 움직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원래 로르드 재상과 아트락시 공작은 사이가 나빴고, 자주 의견이 충돌했다. 그러니 이번 일도 그 일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얼핏 보면. 하지만 이 화제 때만 이러는 게 아니니 문제였다. 첫 안건이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내내 저렇게 의견이 부딪쳤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로르드 재상 쪽이 유독 아트락시 공작의 꼬투리를 잡았다. 평소에는 그 반대인데.
‘반대를 위한 반대 같은데. 로르드 재상한테 무슨 일이 있나?’
* * * 이런 생각을 한 건 라틸만이 아니었다.
“자네, 머리가 돌아가긴 하는 건가?”
회의를 마치고 흩어지는 길. 아트락시 공작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재상관저로 가려는 로르드 재상을 붙들었다.
“내가 싫어도 적당히 반대해대야지. 자넨 나에 대한 감정이 나라에 대한 감정보다 더 우위에 있는 건가?”
평소에는 싸워도 적당한 선이 있던 로르드 재상이 오늘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반대 의견을 죽죽 우겨대니 기가 막혀서 결국 따지고 만 것이다. 물론 재상이 왜 이러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지만…….
“몰라서 묻나?”
로르드 재상이 팔짱을 끼고 빈정거리자 아트락시 공작은 찔끔했지만 뻔뻔하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그저 내 눈엔 자네가 너무 불충해 보일 뿐이네.”
“불충?”
로르드 재상은 입꼬리를 한쪽만 삐죽 올리고서 공작의 눈앞에 대고 두 손가락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진짜 불충했으면 내 아들이 가짜 황제가 가짜란 걸 알아보았을 때 나서지도 않았겠지.”
“…….”
“가짜가 가짜란 걸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내 아들이고, 내 아들에게 가짜 옆에 붙어 있으라 한 건 자네야. 알지?”
“큼.”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했나. 교활하게도 공은 라나문에게 돌려 버리고, 의혹과 추문은 내 아들에게 돌렸지. 아주 비열하게도!”
“흠흠.”
아트락시 공작이 말을 못 하고 눈을 피하자 로르드 재상은 이를 악물고서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앞으로 자네와 내가 한배를 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네. 절대!”
“아니, 잠시……!”
아트락시 공작이 붙잡으려 했으나 로르드 재상은 말을 더 듣지 않고 재상관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닫힌 문 앞에 벙히 서 있던 아트락시 공작은 지나가던 궁인이 자신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겸연쩍게 몸을 돌렸다.
* * *
“두 분 싸우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습니다.”
로르드 재상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비서가 책상 옆에 어색스레 서 있다가 얼른 다가와 겉옷을 받아주며 말했다.
“다 들으라지.”
로르드 재상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서 책상으로 가 앉았다. 비서는 로르드 재상의 겉옷을 팔에 두른 채 재상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으신지요?”
“아니.”
단호하게 말한 재상은 책상을 자근자근 두드리다가 이를 갈았다.
“아트락시 공작이 내 아들을 쓰레기로 만들었으니 나도 라나문을 가만두지 않을 거네.”
비서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요. 그럴 수 있지요.”
“게스타가 국서가 못 되더라도 라나문이 국서 되는 꼴은 못 봐!”
“달리 생각한 방도가 있으십니까?”
재상은 손을 옮겨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다 목소리를 낮추어 명령했다.
“밤 아홉 시쯤에 ‘첼러’를 내 집으로 불러라.”
* * * 첼러는 재상의 비밀 심부름꾼으로, 돈을 받기만 하면 웬만한 일은 단숨에 해치우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재주가 비상한 데다 입도 무겁고 재빠르기까지 했지만, 연좌제에 연루된 외국인이라 가진 능력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던 걸 로르드 재상이 눈여겨보았다가 데려온 것이었다. 로르드 재상은 첼러의 자식들을 자신의 먼 친척들이 입양토록 해 연좌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덕분에 자신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유능한 심부름꾼을 얻게 되었다.
“아트락시 공작 장남의 장점이라곤 얼굴 밖에 없지. 그럼 그 얼굴이 망가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일마저 시킬 수 있는.
“보여드리겠습니다, 재상님.”
첼러는 로르드 재상이 가볍게 언질을 준 것만으로도 그의 속내를 완전히 파악하고서 재빨리 저택을 벗어나 황궁 수관 정비담당자를 찾아갔다. 수관 정비담당자는 쓰레기를 버리러 집 밖으로 나왔다가, 누군가 그를 골목으로 확 끌어당기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커다란 손에 가로막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그는 부들부들 떨며 복면을 쓴 인물을 쳐다보았다. 수관 정비담당자가 조용해지자 첼러는 그에게 ‘쉿’ 하고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한 다음 입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네가 하렘 쪽 수관을 정비하는 담당자냐.”
수관 정비담당자는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런데 왜, 왜 저를. 전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없어요.”
“라나문 방으로 가는 수관 물을 오염 시켜라.”
덜덜 떨면서 복면인을 쳐다보던 수관 정비담당자는, 첼러가 품 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밀자 기겁해 펄쩍 뛰었다.
“안, 안 됩니다! 이런 짓을 했다간 처형당할 겁니다.”
“아니면 지금 죽겠지.”
첼러가 서늘하게 속삭이자 수관 정비담당자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그의 눈동자가 첼러의 손바닥 위에 놓인 병으로 내려갔다. 병 안에는 회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게 무엇인데요? 혹시 독 같은 거라면…….”
“목숨에는 하등 영향이 없다. 건강을 해치지도 않는 거지.”
그런 거라면 이렇게 은밀히 시킬 리가 있나. 수관 정비담당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대꾸하지 못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만 연신 팔로 닦아댔다. 절대로 안 된다고 우겨야 하는 건지, 받는 척하고서 나중에 경비대에 보고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후궁이자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인 라나문이 혹시 자신 때문에 죽기라도 한다면 뒷일이 어떻게 될지는 눈에 선했다. 그때, 복면인이 그에게 두둑한 자루를 하나 더 내밀었다.
“이건 또 뭔, 뭔가요?”
수관 정비담당자는 울먹이면서 자루를 받았다. 그런데 이 자루는 제법 무게가 있었다. 게다가 안에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것들이 수북했다. 이상한 느낌에 그가 자루 안쪽을 살피자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번쩍번쩍 광이 나는 금덩어리들이 보였다.
“이건!”
“팔면 삼천만 바르트는 나올 거다.”
수관 정비담당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복면인을 쳐다보았다. 삼천만 바르트라고? 게다가 돈이 아니라 전부 금덩어리였다. 금 시세가 바뀌길 기다렸다가 팔면 배를 받을지도 몰랐다. 수관 정비담당자가 마른침을 삼키고 조용해지자 복면인은 다시 한번 가루가 든 작은 병을 내밀었다.
“독이 아니니 정말로 걱정할 게 없다. 가루를 푼 다음 수관에 문제가 생겼단 식으로 둘러대도 상관없을 정도지. 하지만 아마 그럴 필요도 없을 거다. 아주 소량이라, 하루만 지나도 모든 흔적이 사라질 테니.”
한참을 망설인 끝에 수관 정비담당자는 병을 받아들고 말았다. * * *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는 걸 속으로 확인한 그 날. 라틸은 이제부터는 후궁들에게 잘 대해 줄 거라고 맹세했다. 점심 식사를 굳이 후궁과 함께하기 위해 하렘에 찾아온 것도, 어색하지만 라나문을 찾아온 것도 그런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라나문은?”
“이 안에 계십니다. 라나문 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라나문을 찾아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
문 앞에 선 호위가 쩔쩔매면서 라틸의 눈치를 볼 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에 없나?”
라틸이 호위에게 묻자, 호위는 라나문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진실을 말해야 할지 혼란스럽단 얼굴로 방문을 연신 곁눈질했다. 속마음이 안 들려도 알 수 있었다. 라나문이 안에 있긴 분명 있었다.
“자나?”
라틸은 의아하게 여기면서 직접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드디어 방 안에서 희미하게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곧……. -철컥.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잠갔어?’
라틸이 놀라 문고리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좋지 않으니 오늘은 이만 가 주십시오, 폐하.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굴고 있단 건 아는구나.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문을 노크했다.
“몸이 많이 안 좋으냐? 궁의를 불러줄까?”
“괜찮습니다. 카르둔이 약을 구하러 나갔으니 그걸 바르면 됩니다.”
카르둔이 약을 ‘구하러’ 나가? 궁의가 가까운 데 있는데? 게다가 바른다고? 먹는 게 아니라? 몸에 상처가 난 건가? 라틸은 라나문이 하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이상한 점들을 수두룩하게 발견하고는 걱정이 되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어디가 안 좋길래 그러느냐. 궁의를 부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디 다친 건 아니고?”
잠시 방 안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아까보다 좀 더 또렷한 거절이 들려왔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폐하. 카르둔이 가져온 약이 아니면 바르고 싶지 않습니다.”
지병이 있는데 숨기고 들어왔나? 그런데 약이 다 떨어져서 이러나? 라틸은 라나문이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기웃하다가 대신관을 떠올리고서 제안했다.
“그러면 대신관을 불러 치료해달라 할까?”
이번에는 좀 흔들리는지 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뒤. 라나문은 역시 같은 거절을 했다.
“카르둔을 기다리겠습니다.”
단호한 태도에 결국 라틸은 칼라인의 방으로 가서 혼자 식사를 한 다음 본궁으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했다. 하지만 집무실에 돌아와 업무를 보면서도 라나문의 이상한 행동이 자꾸 떠올라 신경 쓰였다. 라나문이 차갑긴 하지만 예의는 깍듯하게 지키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호기심과 걱정을 누르지 못한 라틸은 그날 저녁, 하렘에 사람을 보내 카르둔을 불러오게 한 다음 대놓고 물었다.
“낮에 라나문을 찾아가니 죄송하다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아픈 것 같은데 궁의도 만나려 들지 않았다. 네가 약을 가지러 갔다지. 무슨 약을 가지러 간 거였느냐?”
라틸의 질문에 카르둔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쩔쩔맸다. 하지만 라나문에게서 그의 병세를 함구하란 명령을 듣진 않은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오전 열한 시 경쯤에 라나문 님의 얼굴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얼굴이 뒤집어져?”
“네. 뭐가 벌겋게 많이 올라와서요.”
라틸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던 라나문의 피부를 떠올렸다. 그 피부가 뒤집어졌다고?
“한창 성장하실 때도 피부에 뭐가 난 적이 없으셔서…… 충격을 많이 받으셨는지 아예 밖으로 나오려 하질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