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타락해보고 싶어집니다.2021.03.07.
“전에 해준 거?”
라틸은 아직 멍한 상태라 반사적으로 따라 묻다가, 대신관의 입술이 엄지에 눌리면서 모양이 뭉그러지자 잠이 확 달아나서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키스?”
라틸의 질문에 대신관은 어떻게 그런 단어를 성직자가 입 밖으로 꺼내겠냐는 듯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것보다 그냥 말로 하는 게 더 안 야할 텐데.’
라틸은 대신관의 손끝에서 말랑말랑 움직여대는 입술을 보며 생각했으나, 이걸 지적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관의 손 아래에서 멋대로 눌린 입술이, 엄지 옆으로 밀려 나와 평소보다 부푼 그 입술이 시선을 완전히 앗아가서.
‘전에 하이신스가 왔을 때 홧김에 대신관한테 입을 맞췄지.’
그때 일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당시의 배덕감이 몰려와 손끝이 짜르르 떨렸다. 라틸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싶어 어색하게 자기 귓등을 매만졌다.
“음. 입맞춤은…….”
당시엔 홧김에 한 거라서 상대가 대신관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해서든 하이신스를 이 자리에서 물 먹여야 한단 생각뿐. 그런데 이렇게 단둘만 있는 곳에서, 이런 분위기에서, 대신관이 키스를 요청하자 심장이 찰흙처럼 오물오물 멋대로 모양을 바꾸었다.
“음. 그러니까 입맞춤은…….”
넌 그래도 대신관이고 지금은 위장해서 후궁이 된 건데 어떻게 그러냐……고 말할까 말까. 라틸은 대신관을 곁눈질했다. 대신관은 생전 처음 맛본 입맞춤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눈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이렇게 키스를 요청받긴 또 처음이라 라틸은 괜히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그러다가 라틸은 대신관의 얼굴을, 신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를 내려보낸 것처럼 금욕적이며 고결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결국, 라틸은 헛기침을 하고서 “그럴까?” 하고 중얼거렸다. 대답이 들려 오자마자 대신관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라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대신관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손가락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입이 맞닿기도 전부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너무 준비 자세를 취하고 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라틸은 머뭇머뭇 얼굴을 내려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아까 엄지로 문지를 때부터 느꼈지만 무척이나 말캉거리는 감촉이었다. 라틸은 그의 턱을 잡았던 손을 위로 올려 그의 뺨을 감싸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과 입술에 닿는 대신관의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올라오며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러다 라틸은 자신의 몸이 점점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균형 감각이 무너지면서 뭔가 기우뚱하는 듯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가만히 얼굴만 내밀고 있던 대신관이 점차 적극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자, 라틸은 그냥 대신관이 밀어서 밀리나보다, 생각하고 그의 입술을 탐하는 데만 집중했다. 등에 푹신한 감각이 닿아서야 라틸은 ‘어?’하고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이렇게 된 거야?’
눈을 뜨니 라틸은 침대에 누워있었고, 침대 아래에 앉은 채 라틸을 향해 얼굴만 내밀던 대신관은 자연스럽게 라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입맞춤 요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던 그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구겨져 있었다.
‘와.’
대신관은 라틸의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바닥에 대고 입술을 문질렀다.
라틸이 그 모습에 순간 넋이 나가 있자니, 대신관이 찡그리느라 감았던 눈을 뜨고서 라틸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보다 좀 더 촉촉한 보라색 눈동자 속에는 라틸이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감정이 가득했다. 저게 뭔가 싶어 손을 들어 그의 한쪽 뺨을 쓸자, 대신관이 평소보다 좀 더 탁해진 눈으로 미간을 찡그리더니, 라틸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폐하.”
“대신관.”
“자이신.”
“자이신…….”
라틸이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자, 대신관이 잘했다는 듯 어지럽게 흩어진 라틸의 머리카락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 넘기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타락해 보고 싶어집니다.”
“자이신.”
“신의 종인 제가 폐하께 취하면…… 신은 절 버리실까요. 두렵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러고 있는 게 좋아서…….”
목소리만 들으면 대신관이 아니라 이쪽이야말로 사람을 유혹해 타락시키는 악마에 가깝다. 라틸은 고막 솜털을 파고드는 숨결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단단한 등을 끌어안았다. 아름다운 얼굴이나 듣기 좋은 목소리 등도 유혹적이지만, 누구보다 금욕적인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이러고 있으니 그 괴리감에서 오는 아찔함에 덩달아 심장이 덜컹거렸다.
“자이신. 자이신아.”
그 순간. 누군가 쾅쾅쾅쾅 문을 두드려서 라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구냐.” 하고 물었다. 라틸의 딱딱한 목소리에 대신관은 한숨을 내쉬고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폐하. 신 사블레입니다.”
그런데 라틸을 찾는 목소리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시종장?”
라틸은 대신관에게 옆으로 가보라고 툭툭치고서 그가 비켜나자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폐하. 서넛 경이 돌아왔습니다!”
“서넛!”
서넛의 이름에 라틸은 황급히 일어나 한달음에 방문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시종장이 기쁜 얼굴로 서 있다가 깜짝 놀라 방 안의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다른 후궁이라면 놀랄 일이 없겠으나 상대가 대신관이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서넛이 어디 있는데요?”
하지만 라틸은 서넛이 돌아왔단 생각에 푹 빠져서, 시종장이 놀라거나 말거나 일단 어깨를 흔들었다.
“폐하.”
대답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라틸은 소리가 들려 온 쪽을 돌아보았다. 기둥 옆쪽에 서넛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서넛 경!”
평소처럼 단정한 제복 차림을 한 그는 어제 퇴근했다가 오늘 입궁한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라틸이 황급히 달려가자 서넛은 뿌듯하게 웃더니, 평소처럼 기고만장하고 거만한 투로 라틸을 놀려댔다.
“간만에 절 보니 속마음이 나오고 그러십니다. 제가 그리 반갑습니까?”
“안 반갑겠습니까?”
라틸은 그에게만 사용하는 기사 말투를 덩달아 쓰면서 두 팔을 벌려 그를 꽉 끌어안았다. 서넛은 능글맞게 웃고 서 있다가 라틸이 품 안에 폭 들어오자 얼결에 같이 라틸을 끌어안았다.
“…….”
시종장은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지만, 소식이 뚝 끊어졌다 나타난 상황이기에 오늘은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어디 있던 겁니까? 왜 이제 왔습니까? 응?”
“너무 외진 데 숨어 있어서 소식을 늦게 들었습니다.”
“외진 데 숨어 있지 말았어야지!”
“너무 억지십니다.”
라틸이 고개를 들어 째려보자 서넛은 충족감에 가득 차 라틸을 꽉 끌어안았다.
“가장 필요할 때 옆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돌아왔으니 됐습니다.”
서넛의 제복에서는 막 빨래한 새 옷 냄새가 풍겨왔다. 라틸은 그가 돌아온 걸 기뻐하느라, 방 안에 놔두고 온 대신관을 깜빡 잊고 말았다. * * *
“대신관님…….”
자이신이 흔들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자, 수행사제 겸 시종인 구벨이 걱정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괜찮으세요?”
헝클어진 이불이나 부푼 자이신의 입술 등을 통해 구벨은 황제가 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파악했다. 하지만 이전에 황제와 입을 맞추었다며 기뻐하던 때와 달리 이번엔 자이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해도 별 설명 없이 그저 흔들의자에 앉아 하늘만 우두커니 쳐다보는데, 그 표정이 너무 울적해 보였다.
“서넛 경은 어린 시절부터 폐하 곁에 있던 사람이래요.”
“그래. 그렇다더라.”
“황제 폐하께선 선황후폐하와 친오빠, 이복오빠에게 모두 배신당했잖아요.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중에 신의를 지킨 건 사블레 후작과 아이기네스 백작부인, 서넛 경 정도인데. 시종장과 유모는 무사한 걸 처음부터 알았지만 서넛 경은 쫓기다가 실종되었으니까, 제일 먼저 서넛 경을 챙기실 수밖에 없을 거예요.”
평소보다 배로 긴 구벨의 위로에 대신관은 마지못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나도 아니 그만 설명해도 좋아.”
아는 표정이 아니시니 그렇죠…… 덩달아 초조해진 구벨이 한숨을 내쉬는데, 귓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난 한 번도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는데, 구벨. 이번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말았다.”
“네?”
구벨이 고개를 들자, 대신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안 미워할 자신이 없어. 당분간은 계속 미워할 거 같은데. 난 이제 미안해서 서넛 경 얼굴을 못 보겠다. 어쩌지?”
* * * 그 시각. 좀비떼를 반쯤 물리치자, 이번에는 그 앞에 좀비가 아닌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트라탈라 황자님이시로구만.”
타시르는 그 얼굴을 대번에 알아보고는, 커다란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좀비를 걷어차면서 노래하듯 외쳤다.
“이 좀비는 황자님이 부리는 건가?”
타시르는 틀라 황자도 좀비인가, 생각했지만 누가 보아도 틀라 황자는 다른 좀비들과 달랐다. 그는 창백하기는 해도 피부가 깨끗했고 몸에 썩어가는 부분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성을 잃고 무작정 달려드는 좀비들과 달리 아주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틀라 황자가 천천히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자, 타시르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2층에서 머리 위로 뛰어내린 좀비를 칼로 내리쳐 황자에게 달려갈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타시르가 틀라 쪽을 보았을 때. 이미 그는 칼라인이 맡고 있었다. 심지어 일방적으로 승기를 쥔 채.
“오.”
도와야 하는 건가, 아주 잠시 생각했던 타시르는, 그럴 필요가 없단 걸 알아차리고 작게 감탄했다. ‘용병왕 용병왕’ 말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소문 이상으로 대단했다. 저렇게 난폭하고 거칠게 적을 제압해 나가는 태도라니. 그는 사람 형태를 갖춘 야수처럼 보였다.
“이야, 멋있다!”
그러나 휘파람을 불면서 칼라인을 응원하던 타시르는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응원을 거두었다. 멋들어지게 최종 보스처럼 나타났던 틀라 황자가 칼라인을 상대하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던 것이다.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 허리로 달려드는 좀비를 베어내면서 타시르는 왜 틀라 황자가 저런 얼굴인가, 생각했다. 죽었다가 깨어났으니 자기가 무척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나? 용병왕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나? 막 그 생각을 하던 찰나. 틀라 황자가 들고 있던 검을 커다랗게 휘둘러 칼라인을 뒤로 보내고는 황급히 구석에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 입구에는 달아났던 틀라의 생모 아낙차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아들이 오자 몸을 돌려 함께 달아나기 시작했다. 타시르는 부하가 잘못 처리했는지 쓰러진 채로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좀비의 머리에 마지막 일격을 박아 넣으면서 고개를 기웃했다.
‘방금 우리 용병왕이 저 황자를 그냥 놓아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좀비들을 다 처리한 후에도 타시르는 굳이 칼라인에게 그 점을 지적하면서 추궁하진 않았다.
“이렇게 많은 좀비를 처리하다니! 폐하께선 앞으로 우리만 사랑해주시겠습니다. 안 그럽니까?”
평소처럼 칼라인에게 능글맞게 농담을 걸다가 무시당하고 시무룩 멀어지기만 했다.
“흩어져서 저택 안을 수색하지. 도망친 황자와 선황의 후궁을 찾아내고, 그 외에 수상한 흔적 역시 모두 찾아내라.”
대신 칼라인의 명령을 받은 흑사신단 용병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타시르는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 따로 명령을 내렸다.
“수색은 용병들이 하게 두고. 너희는 같이 수색하는 척하면서 저 용병들이 혹시 뭘 감추진 않는지, 따로 숨기는 게 없는지 살펴라.”
“흑사신단을요?”
“그래. 그리고…… 너. 너. 너.”
“네, 타시르 님.”
“저택에 지하 통로가 있고 적들이 거기로 빠져나갔단 전제하에, 그들이 어디쯤에서 다시 나타날지 파악해라. 안이 아니라 밖을 살펴.”
“예.”
마지막으로 타시르는 가장 정보를 잘 취급하는 부하를 불러 은밀하게 지시했다.
“너는 용병왕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