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전에 해주셨던 그거2021.03.03.
“칼라인 님. 그거 압니까?”
“…….”
“나와 폐하 사이엔 오가는 별명이 있습니다. 아주 귀여운 별명이죠.”
“…….”
“여기 이 땜통 보입니까? 이거 폐하가 만들어주신 겁니다. 그러면 질문. 폐하가 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을까요? 그건 폐하가 제 머리에 손을 올렸기 때문이죠.”
타시르가 옆에서 종알종알 대며 흐뭇하게 웃었으나, 칼라인은 단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계속 무시하시네요. 주기적으로.”
아무 반응 없는 칼라인이 재미없어 중얼거려보았지만, 그래도 칼라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달아 말을 걸다 무시당했는데도, 타시르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아닌 척해도 충격 좀 받은 모양입니다, 용병왕님. 하긴. 용병왕님은 의뢰받았을 때만 전진하지, 의뢰 없인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몸에 익었으니까요.”
결국 칼라인은 타시르 쪽을 쳐다보고서 그가 그토록 원하던 반응을 해주었다.
“한 마디 더 지껄이면 혀를 뽑을 거다.”
“전엔 눈이더니 이번엔 혀인가요. 아주 절 구석구석 탐하시네요.”
그래도 타시르가 움츠러드는 내색이 없자, 대리석 같던 칼라인의 이마 위로 혈관이 조금 올라왔다. 타시르의 부하는 겁이 나서 칼라인과 타시르를 번갈아 살폈으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말리진 못했다. 대신 부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흑림의 수장과 흑사신단의 대장이 이런 사이니, 당연히 그 아래 있는 암살자들과 용병들이 사이좋을 리가 없었다. 말없이 걸어가고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부딪치는 즉시 무슨 일이 날 듯 오싹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그렇게 걸어가기를 한참.
“여기네요.”
칼라인을 계속해서 도발하던 타시르가 말을 멈추고 허리를 숙이더니 떨어진 나뭇잎을 손으로 들추었다. 그 아래로 여러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이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이쪽으로 간 모양입니다.”
“그렇군.”
칼라인도 그 근처 나무 둥치에 작게 그려진 모형을 보며 동의했다. 미리 아낙차 쪽에 붙여둔 부하가 ‘여기를 지나갔다’고 표시해 둔 그림이었다.
“얼른 가지요. 그래야 우리 폐하께도 빨리 돌아갈 수 있을 테니.”
표식이 가파른 비탈길 쪽으로 향하는 바람에 속도가 잠시 느려지긴 했으나, 일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동했다. 얼마나 그렇게 걸어갔을까. 일행은 마침내 산 중턱에 만들어진 낡은 저택을 발견했다. 이 층짜리 저택인데, 저택 정원에 세워진 정자는 낡은 기둥만 남아 있었고, 저택 울타리는 낡아빠져서 바람이 불 때마다 끽끽거리며 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여긴가 보네요. 하지만 문짝이…… 이러면 오히려 조용히 들어가는 게 더 어렵겠는데요.”
그걸 본 타시르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아니 이 사람이?”
칼라인이 조용히 가고 말고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문을 뻥 걷어차 열어버렸다.
“용병왕!”
타시르가 목소리를 낮추어 항의했지만, 칼라인은 개의치 않고 안으로 맹수처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이고. 저 성격 급한 거 좀 봐라.”
타시르는 한 손으로 자기 이마를 두드렸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싶자 결국 뒤를 총총총 따라갔다. 커다란 소리를 들었을 텐데.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갈 때도 집 안에선 아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반쯤 이미 박살이 난 정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자 서너 사람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복도가 길게 이어지고, 그 복도의 양옆으로 문이 몇 개 달려 있다. 칼라인은 그 문에 시선을 팔지 않고 쭉 앞으로만 걸어갔다. 마침내 복도의 끝에 도착하자 꽉 막혀있던 양옆이 트이면서 넓은 홀이 나타났다. 천장이 2층에 있는 탁 트인 구조의 홀이었다. 그러나 예측만 될 뿐, 정작 홀은 보이지 않았다. 홀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좀비들 때문에.
“오.”
빼곡히 방 안을 둘러싼 좀비들을 보며 타시르가 짧게 감탄사를 외쳤다. 칼라인은 말없이 양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무기를 쥐자 손안에서 날카롭게 휘어진 작은 반월도가 튀어나왔다. 그걸 기점으로 좀비들이 동시에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고, 칼라인은 두 손에 든 무기를 이용해 진짜 맹수라도 된 것처럼 좀비들의 목을 한칼에 하나씩 처리했다.
“아, 난 이런 거 정말 싫은데. 난 책상 앞에 앉아서 주판을 두드리는 상인이지 이렇게 막 몸 움직이고 이러는 거 취향 아닌데.”
타시르는 이 와중에도 혼자 계속 중얼거렸으나, 발과 검을 이용해 적들을 손쉬워 보일 정도로 잘 처리해 나갔다. 용병과 암살자들도 움츠러들지 않고 바로 공격을 퍼붓자, 얼마 지나지 않아 홀 안을 가득 채웠던 좀비들은 모두 다 바닥에 목이 잘려 움직임이 멈추었다. 타시르는 한숨을 내쉬고서 “됐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들이 걸어온 복도 쪽에서 동시에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한번 우르르 좀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 폐하. 쉬울 거라더니.”
2층 쪽에서도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좀비들이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하자, 위험한 것 같으면 도망가라던 라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타시르는 이마를 짚으며 끙 소리를 냈다.
“폐하. 도망갈 길도 없는데요.”
* * *
‘타시르랑 칼라인은 잘 해내고 있으려나.’
라틸은 일어나자마자 창문부터 열고 새벽 공기를 한껏 흡입하며 생각했다. 잘 해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미지의 적에게 보내서인지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적도 적이지만…….
‘타시르는 대체 떠나기 전에 대신관의 누드는 왜 생각한 거야?’
이 부분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아니 뭐 밑도 끝도 맥락도 없이 갑자기 대신관의 누드라니.
‘게스타한테 갔다가 대신관한테도 갔어야 했는데!’
며칠 전. 대체 무슨 일인지 갑자기 상대방의 마음이 쏙쏙 잘 들려왔던 그 날. 라틸은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하루를 끝으로 다시 라틸의 능력은 퇴보해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왜 하필 그날만 능력이 높아졌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이렇게 되고 보니, 게스타에게 들른 다음 이때다 싶어 국무회의를 열어버린 게 아쉬울 뿐.
‘서넛도 아직 연락이 없고…….’
왜 이렇게 몸이 축축 늘어지는 걸까. 라틸은 창틀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있다가 유모가 들어와 “아이구머니나! 폐하, 열 살 때 하던 행동을 왜 또 하세요!” 하고 끄집어내자 마지못해 창틀에서 떨어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왜 우리 폐하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창문에 달라붙을까.”
“대신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자이신 님이요? 그러면 찾아가시면 되잖아요. 부르거나요.”
“내가 궁금한 대신관은 현실의 대신관이 아니라 누구 머릿속의 대신관이여서.”
“네?”
“아니야…….”
유모는 라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으나, 이건 설명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라틸은 손만 휘젓다가 침대에서 발딱 일어섰다.
“그래. 가봐야겠다. 일단 물어보긴 해봐야겠어.”
“대신관 님께 가시려고요?”
“어. 내 옷 좀.”
* * * 라틸은 그 길로 망설이지 않고 하렘을 찾아갔다. 대신관은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가, 라틸이 찾아오자 상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달려와 활짝 웃었다.
“폐하!”
라틸은 그에게서 후광이 반짝거리는 착시 현상에 놀라 잠시 눈가를 가렸다가, 대신관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자 흠흠 소리를 내며 손을 내렸다.
“같이 식사나 할까 싶어 왔는데. 바쁘냐?”
“그럴 리가요!”
대신관이 얼른 씻고 나오겠다며 들어간 사이, 라틸은 그의 방에 들어가 탁자 앞에 앉아 무어라고 질문을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대신관이 나오고 식사가 차려지자 그냥 대놓고 묻고 말았다.
“혹시 타시르가 네 알몸을 본 적이 있어?”
“예?”
“이상한 뜻에서 물은 건 아니고. 얼핏 그냥…….”
그런데 의외로 대신관은 순순하게 동의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적이 있습니다.”
“있다고?”
“네. 제가 옷을 벗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타시르 님이 지나가다가 보셨거든요.”
라틸은 이번엔 다른 데 놀라서 또 질문했다.
“기도하는데 옷은 왜 벗었는데? 아니, 그보다 지나가다가 볼 정도면 어디서 기도를 한 거야?”
“제 정원에서요. 저만 사용하는 곳이라 당연히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수풀 사이에서 나타나시더라고요.”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아무래도 타시르가 암살자 수장답게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바람에 벌어진 일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 역시 대신관이 알몸으로 정원에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겠지만.
“아니, 근데 진짜로 왜 옷을 벗고 기도한 거야? 의미가…… 있어?”
“신께서 내려 주신 몸을 이렇게 건강하게 잘 가지고 있다고 보여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 효과가 더 좋거든요.”
그럴 리가 있냐고 묻고 싶지만, 상대가 대신관인지라 라틸은 차마 그 질문을 하지 못했다. 자신보다는 대신관이 더 잘 알 테니까. 어쨌든 타시르에 대한 오해는 풀렸다.
‘그래서 타시르가 기도한다면서 그 광경을 떠올렸나 보네.’
“한데 그건 왜…… 혹시 타시르 님이 고자질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타시르 님 외엔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데요.”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해야 하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온 거라,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야. 그리고 난 이제 가볼게. 다 먹었다.”
넌 천천히 먹어, 라틸은 대신관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나가려는 라틸을 대신관이 황급히 붙들었다.
“폐하. 잠시만요.”
“왜?”
라틸이 돌아보자 대신관이 흑심 없는 얼굴로 웃더니 자기 침대를 가리켰다.
“많이 피로해 보이셔서요. 저기 엎드리시면 제가 뭉친 근육을 좀 풀어드리겠습니다.”
어깨가 아픈 건 사실이었기에, 라틸은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서 대신관의 침대로 가 엎드렸다. ‘혹시 얘가 은근슬쩍 날 유혹하는 건가?’ 이런 생각도 했지만, 대신관은 약간의 흑심도 없는 손길로 라틸의 어깨를 정말 시원하게 꾹꾹 눌러주기만 했다. 그는 의외로 꽤 손이 시원했다. 게다가 이상하게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숲의 공기를 피부에 넣은 양 상쾌해져서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결국 깜빡 졸았던 라틸은 ‘몇 시지?’ 하는 생각을 하며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침대맡에 앉은 대신관이었다. 그가 침대맡 바닥에 궁상맞게 앉은 채 라틸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것이다.
“뭐 해?”
그걸 본 라틸이 아직도 나른한 기분에 잠겨 묻자, 대신관이 주저하는 것 같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엄지로 매만지다 물었다.
“폐하. 전에 해주신 거. 한 번 더 해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