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옆에 반짝이는 무엇인지2021.02.28.
“폐하, 폐하, 머리카락, 머리카락, 머리카락이요!”
타시르가 허공으로 손을 휘저으며 외치자 라틸은 얼른 머리카락을 놓아주고 사과했다.
“미안. 놀라서.”
타시르는 얼얼한 두피를 누르면서 너무한다는 듯 투덜거렸다.
“제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 보시기에 제게 빠져들고 계시나 했더니.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신 겁니까?”
그야 네 머릿속에서 벌거벗은 대신관이 튀어나와 갑자기 근육 자랑을 했으니까. 라틸은 이걸 설명하지도 못한 채 입술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니 너무 궁금해서 그만 묻고야 말았다.
“뭐 하나만 물어도 될까?”
“당연합니다.”
“방금 무슨 생각했어?”
타시르는 계속 머리를 문지르면서 고개를 기웃하더니 곧 빙그레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기도했지요.”
‘거짓말.’
“무슨 기도?”
“무사히 다녀오게 해 달란 기도요.”
‘거짓말쟁이.’
라틸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타시르가 계속 문지르는 두피 사이에 같이 손을 넣어서 꾹꾹 눌러보았다.
“많이 아프냐?”
타시르는 대답 대신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바닥을 펴 보였다.
“!”
라틸은 그의 머리카락이 우스스 떨어지자, 놀라서 타시르의 머리를 마구 문지르며 입을 대고 호호 불었다.
“빠지면 어쩌지? 이거 땜통 생기면 어쩌지? 응?”
“그러니까요. 잘 좀 불어 보세요.”
“호…… 호…….”
라틸은 타시르의 머리카락에 대고 입김을 연달아 불다가, 타시르가 눈웃음을 띤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자 미간을 찌푸리고서 그를 살짝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놀랐잖느냐!”
타시르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라틸을 끌어안았다.
“그러게 왜 남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십니까.”
“그건 그래.”
라틸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게 왜 속으로 그런 민망한 걸 상상하고 그래. 놀랐단 말이다.’
타시르는 그런 라틸을 웃으면서 내려다보다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피더니 “이런.” 하고 탄식했다.
“더 늦으면 칼라인 님이 또 제 눈알을 노리겠네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폐하.”
“칼라인이 무섭나 봐?”
“그 인간은 폐하한테만 순하게 굴지, 다른 사람들한텐 무자비해요.”
그런 것 치고는 다른 후궁들이랑 알음알음 잘 어울리긴 하던데. 라틸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얼른 가보라고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타시르가 떠나기 말에 올라타자마자, 라틸은 또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만약 네가 다른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다면, 누구 속을 읽고 싶어?”
타시르는 말 등 위에서 고삐를 쥐면서 라틸을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질문을 왜 하시는 거지? 하는 눈으로.
‘그러게. 내가 이런 질문을 왜 했나 모르겠다.’
라틸이 짧게 자책하는 사이. 타시르가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우리 순둥순둥 말랑이죠.”
“순둥? 게스타?”
“네.”
“왜? 너무 무난할 거 같지 않아?”
라틸은 언제나 조용하고 소심한 게스타를 떠올렸다. 걔는 그냥 속마음으로도 늘 달달 떨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라틸의 말에 타시르는 묘한 표정으로 낮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고요.”
‘아니란 건가?’
그 미묘한 말에 라틸은 의구심을 품었다. 혹시 게스타가 나랑 있을 때와 후궁들과 있을 때 행동이 많이 다른가? 하지만 가끔 하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받을 때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라틸이 고개를 기웃하자, 타시르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머리를 쓸면서 웃었다.
“그러면 그 나름대로 좋지 않겠습니까. 겉도 속도 착한 사람은 곁에 있기만 해도 좋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 * * 타시르를 배웅한 뒤. 라틸은 집무실로 돌아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어서 게스타의 방으로 걸어갔다. 타시르의 말을 듣고 보니 게스타의 속마음도 궁금하긴 해서. 늘 조용히 책만 읽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소심한 성품이지만, 가짜 황제 사건 때 가짜 황제 뒤는 잘 따라다녔다지 않은가. 게다가 다친 새 사건 이야기도 속마음으로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이미 해명을 듣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 타시르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속마음이 지금처럼 잘 들릴까? 찾아갔는데 속마음이 안 들리는 거 아냐? 라틸의 의문은 지나가던 기사와 마주치자 바로 풀렸다. 기사가 단정하게 라틸에게 인사를 하는데, 입과 따로 노는 속마음이 바로 들린 탓이다.
[폐하는 얼굴에 약하시다지. 나도 잘생겼단 소리 좀 듣는데. 혹시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
생각한 건 기사인데, 라틸은 자기가 민망해져서 얼굴이 벌게져 정색했다. 그걸 본 기사가 다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날 보고 얼굴을 붉히셨어!]
그런데도 표정은 덤덤한 기사 그대로이자 라틸은 기사의 얼굴을 보기가 영 껄끄러워졌다.
‘이거…… 뭔가 되게 민망한데. 들으면 안 될 걸 듣는 기분이야.’
결국 라틸이 확 돌아서서 걸어가자 뒤에서 기사가 다음에는 얼굴이 좀 더 잘 보이게 모자를 안 써야겠다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아나듯 하렘 안으로 들어가 게스타를 찾았다.
“폐하!”
[드디어 폐하가 오셨어!]
그곳에 도착해서도 평소와 달리 속마음은 쏙쏙 잘 들려왔다. 게스타의 시종 트리는 이름 모를 이상한 빵을 들고 가다가 라틸을 보자 울 듯이 외쳤다.
“게스타는?”
라틸이 게스타의 위치를 묻자, 트리는 속으로 거의 괴성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시끄러워서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라틸은 돌연 속이 텁텁해졌다.
‘날 많이 기다리는구나. 게스타 쪽만 이러는 것도 아니겠지.’
라틸이 하렘을 만들 때는 하이신스에 대한 분노와 대신들에 대한 오기가 강했다. 어차피 하렘에 지원하는 후궁들 역시 계산을 끝내고 오는 것이기에, 라틸은 그들과 자신이 서로 거래를 한 거나 다름없다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폴짝폴짝 방정맞게 기뻐하는 트리를 보자 이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칼자루를 쥔 쪽이란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고루고루 잘해 주긴 해야겠다.’
그때. 문이 발칵 열리더니 힘 있게 열린 문과 달리 쭈뼛쭈뼛한 움직임으로 게스타가 나왔다.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게스타는 눈치를 보듯 라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이 어쩐지 슬퍼 보여서, 라틸은 지난번 일을 모른 척하고 웃으면서 게스타의 등을 감쌌다.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 왔다. 들어가자. 식사는 했느냐?”
* * * 시간이 많지 않다는 라틸의 명령에 따라 빠른 속도로 간단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이미 만든 빵을 조금 데워오고, 거기에 몇 종류의 잼과 샐러드, 수프 정도가 다였다. 라틸은 수프에서 풍기는 은은한 러비지 향을 맡으며 게스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게스타는 음식을 준비하는 내내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하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라틸의 눈치를 살피면서 금덩이를 몰래 훔치려는 사람처럼 스푼을 쥐었다 떼길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속마음은 들리지 않아서,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그새 효과가 떨어졌나? ……하긴. 원래 이 정도이긴 했지만.’
그럼 아까는 왜 보는 사람마다 속마음이 들렸던 걸까? 라틸은 의아해하면서도 수프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게스타는 여전히 라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쉽네. 게스타의 속마음까지 들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꼭 듣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면서, 라틸은 이렇게 되자 괜히 안타깝단 생각을 하며 스푼을 내려놓고 포크를 쥐려 했다. 그러나 스푼과 포크를 엇갈려 놓으면서 그만 포크가 탁자를 타고 쭉 미끄러져 게스타의 앞에 도착했다. 라틸은 민망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게스타는 아무렇지 않게 라틸의 포크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손가락과 손가락이 살짝 서로를 스치는 순간.
[손가락 귀여워.]
까끌하고 그윽한 음성에 라틸은 놀라서 포크를 확 잡아뺐다.
“폐하?”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게스타를 보며 깜빡거렸다. 방금 뭐가 지나갔지? 무언가……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가 지나간 것 같았다. 착각인가? 지나가던 사람이 참새 발 같은 걸 보고 생각한 건가? 라틸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야.” 하고 둘러댔다. 하지만 게스타가 한 생각이라 여기기엔 속마음이 너무 그윽했다. 눈앞의 게스타는 하얀 토끼처럼 보송보송하고 귀여운데.
“왜 그러세요 폐하? 안색이 나쁘십니다.”
“아, 그게…….”
[안구까지 귀엽네.]
또 그 목소리다. 게다가 눈동자도 아니고 안구라니. 라틸은 ‘으헉’ 소리를 내면서 뒤로 의자째 쿵 넘어갔다. 몸이 기우뚱하면서도 드는 생각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뭐지? 내 순둥이 토끼 안에 웬 영감 너구리가 들어 있지?
“페하!”
게스타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더니 얼른 다가왔다. 라틸은 멍하게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물론 속마음으로 들은 그 낮은 목소리도 아주 듣기 좋긴 했다. 어딘가 살짝 야한 느낌도 났고. 문제는 게스타였다. 게스타는 앞에 두고 흑심을 품으면 죄책감까지 들 만큼 순진하고 청초한 외양이었다. 그런 얼굴로 그런 그윽한 목소리는…….
“게스타?”
“네, 폐하…….”
‘아. 잘 들으니 평소에도 그 목소리인 것 같긴 하네. 너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게스타, 목소리가 엄청 낮구나.’
게스타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난 라틸은 뜻밖에 알게 된 게스타의 목소리에 새로운 기분으로 게스타를 빤히 보았다. 게스타는 그 시선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부끄럽단 듯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그 순간. 게스타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라틸의 눈앞에도 같이 펼쳐졌다. 그건 라틸의 미화된 모습이었다. 아까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가 누운 건지 앉은 건지 애매한 그 상태일 때 모습. 카펫이어야 할 곳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고 라틸의 주위로는 반짝이는 빛이 마구 날아다닌다.
‘저 반짝이랑 꽃은 뭐야? 언제 저런 게 있었어?’
그 속에서 라틸은 별처럼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은 라틸이 보기에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설마. 쟤 눈에는 내가 저렇게 보이나?’
황당해하기도 잠시. 환상 속 라틸이 천사처럼 한 손을 뻗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틸 실수해쪄.
“으아아아!”
라틸은 소름이 돋아서 허공을 휘저었다.
“하지 마!”
“폐하?”
“하지 마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라틸이 기겁해서 손을 계속 휘젓자 게스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틸을 보다가 꽃망울이 툭 터지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게스타의 머릿속에서 또다른 이미지가 전해졌다. 그건 어린 라틸의 모습이었다. 두 개짜리 작은 계단 위에 선 라틸. 계단 아래에서는 틀라가 엎어진 채 울고 있다. 어린 라틸은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사과했다.
“라틸 실수해쪄.”
‘어?’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과거의 장면에 라틸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때 발음을 짧게 한 건 아마 일부러였을 것이다. 어릴 때도 라틸은 완벽한 발음을 구사했지만, 틀라와 싸운 뒤에는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내어서 ‘난 애기라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걸 어필하곤 했으니까.
‘아. 이때 날 봐서 아까 게스타가 그런 장면을 떠올린 거구나. 놀래라. 어릴 때 기억이랑 현재 모습을 합쳐서 떠올린 건가?’
그럼 속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완전히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네. 현재와 과거를 합쳐서 보다니. 라틸은 처음 안 깨달음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어라? 근데 이때 게스타가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