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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타시르 머릿속의 연기 (104/367)

104화. 타시르 머릿속의 연기2021.02.24.

16551094139868.png“옷은 거기에 두고 나가주시면 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라틸은 라나문이 분명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저러는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가 그냥 나가 달라 부탁하자 잠시 당황했다. ‘진짜 나가?’라고 물어볼 뻔했다. 실제로 손은 위로 올라가서 엄지로 어깨 너머를 멍청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나가? 물어보듯이. 하지만 라나문은 조각처럼 눈을 감고 욕조에 몸을 기댈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 진짜 나가란 거구나. 진짜로 옷만 가져다 달라 부른 거구나. 라틸은 괜히 좀 서운해서 옷을 내려놓았지만 그러면서도 한 번 더 라나문을 보았다. 하지만 라나문은 계속 눈을 감은 채 이쪽을 보지 않았다.

16551094139876.png“나 나갈게.”

16551094139868.png“…….”

16551094139876.png“진짜 나갈게.”

16551094139868.png“예.”

딱딱하게도 대답하네. 라틸은 옷을 내려놓고서 시무룩 밖으로 나갔다. * * * 그 시각, 라나문의 시종은 양동이로 들이붓듯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한 손에 하나씩 쥔 우산을 앞뒤로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6551094139894.jpg“카르둔 씨!”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폭우 사이로 거뭇거뭇한 무언가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 안에서 들려왔다. 거뭇한 것은 까만 우산이었고 안에서 나온 사람은 라나문의 호위였다.

16551094139894.jpg“어떻게 됐……에취! 어요?”

카르둔은 호위를 보자마자 재채기를 하면서 물었다. 호위는 걸껄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16551094139894.jpg“잘됐어! 폐하와 한 방에 들어갔어!”

그 말에 카르둔은 흘러내리는 콧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울듯이 웃었다.

16551094139894.jpg“정말 다행이네요. 계획대로 되어서 진짜 다행이에요.”

16551094139894.jpg“시종장님 덕이야. 여기로 폐하가 오신다고 바로 알려주셨잖아.”

16551094139894.jpg“네. 시종장님이 우리 편이니 참 든든해요.”

16551094168556.jpg

  * * *

16551094139876.png“빠져나가라, 빠져나가라, 빠져나가라…….”

라틸이 일하다 말고서 머리를 두드리며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자 시종장이 안건에 대해 조언을 하다 말고 눈썹을 치켜떴다.

16551094139894.jpg“폐하?”

사람이 일하다 말고 혼자 중얼거리면 이상해 보이기 마련이라, 라틸 역시 다르지 않았다.

16551094139894.jpg“왜 그러십니까? 머리가 아프십니까?”

걱정스럽게 라틸에게 질문을 한 시종장은 라틸이 퀭한 눈으로 쳐다보자 깜짝 놀랐다.

16551094139894.jpg“폐하, 눈 밑이!”

16551094139876.png“잠을 못 잤습니다.”

16551094139894.jpg“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시종장의 질문에 라틸은 “고민.”하고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저었다.

16551094139876.png“아닙니다. 고민은 아니에요.”

그냥 어제 라나문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고 나니 황제 자리를 안정시키기 전까지는 절대로 후궁들과 잠자리를 하지 않을 거란 각오가 많이 흔들렸을 뿐이다.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칼라인이 알려주려다 멈칫했던 그것을 떠올렸다. 계획 없는 회임을 걱정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백 가지 방법…….

16551094139876.png‘아니야. 칼라인은 아니야.’

그러나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전처럼 진득하게 분위기 잡혔는데, 그가 속으로 또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르면 어쩐단 말인가. 속마음이 아예 안 들리면 모를까, 다른 여자 이름을 들으면서 그와 이것저것 즐기긴 힘들었다. 라틸은 시종장이 흐뭇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모른 채 끙끙대다가, “아.” 하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종장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16551094139894.jpg“왜 그러십니까, 폐하?”

그때 밖에서 비서가 문을 두드리더니 타시르가 찾아왔단 걸 알렸다.

16551094139876.png“들어오라 해라.”

안 그래도 타시르를 부를 생각이었기에 라틸은 얼른 허락하고서 시종장에게 나가보란 눈짓을 했다. 시종장이 살피던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가자, 평소보다 좀 더 편안해 보이는 옷을 입은 타시르가 안으로 들어섰다.

16551094139876.png“안 그래도 부르려 하던 참인데.”

라틸이 일어서자 타시르가 ‘왜 일어서세요?’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라틸은 타시르의 옆으로 가 팔짱을 끼면서 히죽 웃었다.

16551094139876.png“오늘 떠날 거지? 떠나기 전에 식사나 같이하자고.”

타시르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곧 눈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팔에 걸린 라틸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도 같이 잡았다.

1655109419557.png“갑자기 이렇게 대해주시니 겁나는데요. 알고 보면 무척 위험한 상황이고, 이런 거 아닙니까?”

16551094139876.png“위험하겠지. 하지만 못 상대할 정도는 아닐 거야.”

라틸은 칼라인이 기사 좀비들을 상대할 때와 자신이 헤움 황자를 상대할 때를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들은 강한 데다 전염성이 치명적이긴 했지만 잘 대처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16551094139876.png“제일 골치 아픈 건 차라리 전염성 같아. 상처가 나면 순식간에 번지더라고. 그…… 뭐야. 다른 사유로 난 상처 말고, 좀비한테 공격당한 상처.”

1655109419557.png“틀라 황자님이 좀비가 되었을까요?”

16551094139876.png“그건 아닐 것 같긴 한데. 되었다 하더라도 뭐. 까다롭진 않아.”

1655109419557.png“꼭 상대를 해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예리한 놈. 라틸은 대답 대신 웃고서 집무실 안쪽에 딸린 작은 방으로 타시르를 데려갔다. 그곳엔 이미 몇 종류의 간단한 간식 상이 차려져 있었다.

16551094139876.png“언제쯤 출발할 거야?”

1655109419557.png“곧 출발할 거라고 말씀드리러 온 거였지만…….”

라틸의 질문에, 타시르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라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1655109419557.png“조금 있다 가도 되겠죠.”

16551094139876.png“칼라인은?”

1655109419557.png“용병단 데리고 뭐 하는 거 같던데요. 흑림과 흑사신단을 동시에 데리고 출발하면 은밀하게 움직이기 어려워서 일단 수도를 빠져나가는 데까진 각자 행동하기로 했습니다.”

칼라인도 불러서 잘 다녀오라고 말을 할 걸 그랬나. 괜히 찝찝해지려는 마음을 옆으로 치우고서 라틸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물론 칼라인에게는 편지와 선물을 따로 보내긴 했지만, 막상 얼굴을 안 보고 보내려니 신경이 쓰였다.

16551094139876.png‘그렇지만 당장 얼굴을 보면 그 도미스란 사람 생각만 날 거 같아.’

라틸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포크를 쥐었다. 그러고서 물을 마시려 유리잔을 손에 쥐는 순간.

16551094139876.png“!”

라틸은 바늘로 머리를 관통하는 느낌에 몸을 흠칫 떨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켜져 있던 촛불을 누군가 훅 불어서 꺼버린 듯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점열되면서 몸이 한 단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1655109419557.png“폐하?”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라틸은 코앞에 수프와 완두콩이 있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말 그대로 접싯물에 코를 박을 뻔한 상황이었다.

1655109419557.png“왜 그러십니까?”

기절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지 타시르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타시르가 보기엔 라틸이 수프에 둥둥 떠다니는 무언가를 살피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숙이는 것처럼 보인 듯했다.

16551094139876.png“아. 아니.”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미간을 찡그리고 조금 전 그 느낌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1655109419557.png[수프에 벌레라도 있나? 내가 봐 드려야 하나?]

맞은편에서 타시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094139876.png“어?”

라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타시르는 라틸의 수프 그릇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으면서 물었다.

1655109419557.png“왜 그러십니까?”

16551094139876.png“어…….”

라틸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는 것으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타시르의 속마음이다! 방금 타시르의 속마음을 읽어낸 거였다.

16551094139876.png‘어째서?’

라틸은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일단 무조건 스푼으로 수프를 ‘퍽퍽퍽퍽’ 퍼먹었다.

1655109419557.png[좋아하는 음식이신가? 잘 드시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갑자기 왜 속마음이 이렇게 잘 들리는 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타시르가 좀비를 만나러 간단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나? 겉으론 내색을 안 하지만 그래서 타시르 마음에 방어벽이 약해져서…….

16551094139876.png“타시르?”

1655109419557.png“네, 폐하.”

16551094139876.png“좀비 무서워?”

1655109419557.png“무서운 건 모르겠고 호기심은 듭니다.”

1655109419557.png[하나 잡아 와서 연구해도 괜찮을까?]

겉과 속이 일치하는 속마음이 들려오자 라틸은 포크를 입에 물고서 고개를 기웃했다. 아닌데. 좀비가 무서워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1655109419557.png[오. 지금 폐하가 취하는 저 자세.]

16551094139876.png‘내 자세? 이게 마음에 드나?’

1655109419557.png[나도 해봐야겠다. 괜찮은데?]

16551094139876.png“…….”

라틸은 포크를 입에서 떼고서 타시르를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 늘 저 속내가 궁금했는데. 실제로 속내를 들어보니 약간 짜증 나는 구석이 있었다.

16551094139876.png‘일단 겉하고 속이 확실하게 일치하는 놈이긴 한데.’

1655109419557.png[오. 지금 폐하 홍가자미.]

16551094139876.png‘속마음까지 같이 들으니까 어째 더 짜증 나는 거 같네.’

1655109419557.png[굉장해. 찰가자미로 진화하셨다.]

16551094139876.png“야.”

1655109419557.png“예?”

16551094139876.png“그만 보고 먹거라.”

타시르가 웃으면서 포크를 들자, 라틸도 음식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든 라틸은 뜯던 빵을 내려놓고서 그에게 항의했다.

16551094139876.png“가자미가 어때서! 가자미가 왜!”

1655109419557.png[용가자미……!]

16551094139876.png“아 하지 말라고!”

  * * * 가끔 타시르의 헛소리를 듣느라 계속 울화가 치밀긴 했지만, 그래도 라틸은 그가 겉으로 보는 것만큼 속내가 어두컴컴하진 않단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아주 가끔 그의 머릿속 한 부분에 안개가 낀 듯한 부분이 있긴 했다. 머릿속에 안개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내는 건진 모르겠지만, 라틸이 속마음을 들으려 해도 알 수 없는…… 진짜 안개는 아니지만 안개라도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이. 그 외엔 대체로 음험한 구석은 없었다. 이후 라틸은 타시르를 배웅하기 위해 궁전 후문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돌아올 때까지 타시르는 상단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걸로 할 테고, 칼라인은 몸이 좋지 않아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걸로 통할 것이다.

16551094139876.png“잘 다녀와.”

문 앞까지 함께 걸어간 라틸은 아까 식사를 하면서 팅팅 불었던 마음에서 붓기를 좀 뺀 다음, 나가려는 타시르에게 슬며시 인사를 건넸다. 눈이 마주치자 타시르는 바로 웃으면서 속삭였다.

1655109419557.png“언제 절 보아주실 건가 계속 기다렸습니다. 앞만 보고 걸으시기에.”

16551094139876.png“위험할 거 같으면 그냥 와.”

1655109419557.png“주군으로서 하실 말씀은 아닌데.”

16551094139876.png“배우자로서 하는 말이야.”

라틸의 말에 타시르는 눈썹을 치켜뜨더니 곧 눈이 가늘어져서 활짝 웃었다.

1655109419557.png“어쩌면 이리 제 심장을 잘 자극해주시는지.”

16551094139876.png‘거짓말.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그 순간. 타시르가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눈이 마주치자, 라틸도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서 같이 가만히 있었다. 자세가 부담스럽긴 한데. 이러고 있으려니,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뿌옇고 탁한 안개로 가득해 보이지 않던 타시르의 마음속 한구석에 얼핏 실루엣 같은 게 들여다 보이는 듯해서였다. 무언가…… 사람의 형태 같은 게.

16551094139876.png‘뭐지?’

그게 무엇인가 유심히 집중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타시르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라틸은 얼결에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넘겨주었다. 바람이 머릿속까지 번져가는 건 아닐 텐데도 이래야 안이 잘 보일 것 같아서. 하지만 정말로 현실이 머릿속에도 영향을 주는 걸까? 라틸이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넘기는 바로 그 순간. 안개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던 그 실루엣이 바람결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대신관의 누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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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094139876.png“풉!”

라틸은 놀라서 타시르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어버렸다. 사레에 들려 콜록거리고 있자니, 타시르가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면서 손을 휘저었다.

16551094139876.png‘여기서 대신관이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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