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비와 거품 그리고 라나문2021.02.21.
“곧 폐하의 생일이군요.”
“응? ‘곧’은 아니지 않습니까?”
“생일 연회는 화려하게 해야 하니까 미리미리 준비해야지요. 이런저런 준비 기간을 생각하면 곧입니다.”
“아. 그런가.”
라틸이 시종장과 자신의 생일 연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다른 시종 하나가 들어와 라틸에게 타시르가 찾아왔단 걸 알렸다.
“폐하. 타시르 님께서 지금 폐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라틸의 복귀를 도운 일로 타시르에게도 꽤 호의적으로 변한 시종장은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며 순순히 물러났다. 시종장이 나가자 타시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틸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옆으로 대충대충 밀어 중간에 공간을 만들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시키신 일을 완수했단 걸 알려드리러 왔지요.”
“시킨 일이 하나둘이어야지.”
“알긴 아시는군요.”
타시르는 의기양양하게 라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기대면서 웃었다.
“이렇게 스며드는 겁니다. 이러다 제가 없어지면 불편하실걸요?”
“네가 없어질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
라틸이 그의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타시르는 몸을 이리저리 꼬아대더니 결국 책상 맞은편으로 이동해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
“너 간지럼 많이 타는구나.”
“제 몸에 대해 지식이 늘어가시는군요!”
“…….”
라틸이 가자미눈을 하고서 쳐다보자, 타시르는 책상 너머로 손을 뻗어 라틸의 눈가를 문지르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대답할 가치가 없다 싶은 말은 무시하시기로 한 겁니까.”
“무시한 건 아니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거지.”
“뭐 어때요. 우리는 부부 사이나 마찬가진데. 타시르학을 공부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폐하 하나뿐이랍니다.”
“공부할 가치가 있을까.”
“그럼요.”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면서 타시르를 보다가 시계가 열세 번을 울리자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 무슨 일로 온 건데? 이제 장난 그만하고 말해봐.”
“틀라 황자의 본거지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알아낸 거면 알아낸 거지 알아낸 것 같단 건 뭐야?”
“바로 본거지로 간 건지, 아니면 아낙차 님을 둘 다른 은신처로 간 건지는 모르니까요.”
“그건 그래.”
라틸은 오늘은 뜯어진 곳 없이 멀쩡하고 꼼꼼한 타시르의 옷 솔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괜찮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은신처를 발견해도 좋고 본거지를 알아내도 좋고. 틀라를 잡아도 좋고, 못 잡아도…… 최소한 정보는 더 생기겠지.”
라틸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보자마자 틀라 개새끼, 한 번 더 죽여주겠어. 이번에는 교수형 시킬 필요도 없으니 직접 죽이면 되겠네.”
“직접 가실 겁니까?”
“당연하지. 틀라 관련해선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라틸은 말을 하다 말고서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다. 타시르. 네가 가. 칼라인이랑. 그게 낫겠다.”
타시르는 어려울 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칼라인 님과 같이 다니기 좀 무섭긴 한데…… 적들한테도 무섭다면야 뭐. 괜찮습니다.”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일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그런데 또 비공개적으로 자리를 비웠다간 혹시 모르니까. 오빠가 미치지 않고서야 연거푸 같은 일을 벌이진 않겠지만 모르잖아? 미쳤는지도.”
타시르는 맞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전에 그 시종은 오늘은 없군요.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지요?”
“계속 지켜보고 있어. 입을 여나 안 여나. 통과하길 바라야지. 수족처럼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싹 다 갈아버리면 나도 번거로우니까.”
* * * 칼라인과 타시르에게 각기 흑사신단 용병들과 흑림을 데려가 아낙차를 도로 잡고 틀라의 은신처도 조사하고 오라 지시한 후. 라틸은 바로 국무회의에 들어갔다. 이번 회의에서는 이웃 국가인 윌랑에 대해 언급되었는데, 그곳에서 좋지 못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했다.
‘멍청하기는. 두 개 제국에서 좀비 관련된 일이 터졌는데 자기들은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회의가 끝나고 나니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라틸은 자신의 침실이 있는 쪽과 하렘이 있는 쪽을 쳐다보다가 대신관과 함께 식사하기로 결정하고서 그쪽 회랑으로 걸어갔다. 대신관이 이상한 소문에 시달린 게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그를 찾아가서 ‘난 그 소문을 믿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선물을 보냈긴 하지만 직접 가서 사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효과가 더 좋을 테니까.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한두 방울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쏟아졌다. 시원하게 내리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비였다.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폐하? 아니면 우산을 가져올까요?”
“우산을 가져와라.”
하인이 빠르게 우산을 챙겨 오자 라틸은 우산을 받으면서, 뒤를 졸졸 따라오는 호위들에게 지시했다.
“혼자 갈 테니 다들 물러나라.”
호위들이 물러나자 라틸은 회랑을 지나 하렘 입구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꽃들이 휘어져 산책로를 지나가기가 어려웠으나 라틸은 그래도 꾸역꾸역 걸어갔다. 그런데 호수 근처를 지나가면서 보니, 호수 가장자리에 만들어 놓은 벽 없는 정자에 라나문이 우두커니 서서 난처한 듯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비가 많이 쏟아지기 때문인지 라나문은 라틸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하늘과 땅만 번갈아 살피다가, 라틸이 거의 근처까지 다가가자 그제야 라틸을 발견하고서 인사를 올렸다.
“폐하.”
라틸은 라나문의 머리카락이며 어깨 쪽이 흠뻑 젖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근처에 있다가 비가 갑자기 내리자 이쪽으로 뛰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시종은?”
“우산을 가지러 뛰어갔습니다.”
라틸은 정자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씌워주마. 같이 가자. 이미 상의가 다 젖었는데 감기 걸리겠다.”
라나문은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순순히 우산 안으로 들어와 우산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가 들겠습니다.”
어차피 라나문이 키가 더 컸기에 라틸은 그에게 우산을 맡겼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어갔을까. 갑자기 라나문이 슬며시 손을 내밀더니 라틸의 어깨를 감싸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너무 떨어져 걸으면 비를 맞으실 것 같아서…….”
얼결에 라나문의 가슴팍에 딱 달라붙게 된 라틸은 그에게서 희미하면서도 시원한 향을 맡았다. 이전에 라나문의 방에서도 맡았던 향이었다. 라틸은 얼음 같은 라나문과 잘 어울리는 이 향수가 무슨 향수인지 물으려다가, 괜히 머쓱해서 그 질문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곧 내 생일인 거 아느냐?”
“압니다.”
“우리 생일이 같은 건 아느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라나문이 웃었나 보다. 라틸은 자신의 얼굴과 거의 밀착한 라나문의 가슴에서 진동을 느끼고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생일에 가지고 싶은 건 있어?”
“폐하께선 있으십니까?”
“글쎄. 생각해보고 알려주마.”
“그럼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어느새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라틸은 조금 아쉬운 기분으로 라나문이 지붕 아래로 들어가 우산을 어정쩡하게 기울이고 자신을 쳐다보는 걸 마주 보았다. 라나문은 그 상태로 라틸은 잠시 빤히 바라보았는데, 라틸에게 우산을 돌려주고 가던 길 잘 가시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고마우니 들렀다 가시라 청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라틸도 우산을 달라고 해야 하는 건지 어째야 하는지 다음 행동이 바로 나오지 않아 덩달아 어중간하게 서 있자니, 라나문이 먼저 물었다.
“누구를 찾아오신 겁니까?”
“음…….”
대신관. 하지만 이 와중에 대신관에게 갈 테니 우산을 달라고 하기도 뭐한지라, 라틸은 그냥 라나문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면서 둘러댔다.
“사실 너한테 온 거였어.”
“그러십니까.”
좋아할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라나문은 정말로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돌아서더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우산을 접어 물기가 튀지 않도록 몇 번 털었다. 그러고는 혼자 걸어간다. 그냥 대신관한테 갈 걸 그랬나. 라틸은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라나문의 걸음이 평소보다 아주 느릿느릿하단 걸 깨닫자 그런 마음이 쏙 사라졌다. 게다가 몇 걸음을 느리게 걷다가 그 뒤로는 더더욱 걸음이 느려져서 주춤주춤하는 걸 보니, 라나문은 라틸이 정말 자기에게 오는지 아닌지 계속 확인하며 걸어가는 게 분명했다.
‘아닌가? 좋아하는 건가?’
쟤는 뭐 감정을 잘 안 드러내니 알 수가 있나. 라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뒷짐을 진 채 라나문을 슬금슬금 따라갔다. 라나문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선 호위에게 우산을 건네고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라틸은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라나문의 방에 처음 오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천장이며 벽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네 시종은 이미 너 찾으러 갔나 보네. 엇갈려서 어쩌지?”
“제가 없으면 이쪽으로 다시 올 겁니다.”
“그래.”
라틸이 멋쩍게 서 있자니 라나문이 서랍에서 보송보송한 수건을 가져와 내밀었다.
“고마워.”
라틸은 비가 옆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젖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수건으로 툭툭 쳐서 닦았다. 그런데 웬걸. 라틸에게 수건을 건넨 라나문이 갑자기 상의를 한 번에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 라틸은 깜짝 놀라 손동작을 멈추었다. 게다가 라나문은 벗은 상의를 아예 바닥에 툭 그대로 두더니, 자기는 비를 많이 맞아 좀 씻어야겠다면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작게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라나문의 곧은 등이 보이지 않게 되자 라틸은 심장 위에 손을 대고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깜짝이야.”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네. 놀라라.’
라틸은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났다 사라진, 물기에 촉촉하던 라나문의 상체를 떠올리고서 머리를 빠르게 털었다. 하지만 심장과 뇌는 그 이미지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해서, 심장 박동은 계속 빨랐고 머릿속에는 라나문의 상체가 자꾸만 반복해 떠올랐다. 라틸은 얼른 근처 의자에 앉아서 수건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혼자 있는데도 더 어색해져서, 라틸은 큼큼 헛기침을 하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아직도 비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서넛은 괜찮으려나.’
그때 욕실 안에서 “폐하.”하고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나 여기 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라틸은 저도 모르게 얼른 수건을 쥐고 욕실 앞으로 달려갔다.
“왜?”
라틸이 묻자, 라나문이 다시 욕실 안에서 부탁했다.
“실수로 옷을 놔두고 들어왔습니다.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옷? 아무 옷이면 돼?”
“예.”
라틸은 라나문의 옷장 앞으로 가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안에 ‘이걸 가져가세요’라는 듯 편안한 의상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걸 가지고서 라틸은 욕실 앞으로 다가가 어색하게 물었다.
“이 앞에 둘까?”
“안으로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안, 안에?”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는 민망해서 자기 입을 툭툭 내려쳤다. 그래도 일단 가져와 달라니 라틸은 옷을 챙겨서 슬쩍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하나를 연 것뿐인데 밖과 달리 전체적으로 새하얀 톤의 욕실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하얀 욕조 안. 라나문은 하얗고 풍성한 거품에 둘러싸여 누워 있었다. 라틸은 생각 없이 그쪽을 보았다가 거품 사이사이로 보이는 그의 몸을 보고 손가락에 힘이 빠져 들고 있던 옷을 떨어트릴 뻔했다.
흠뻑 젖어 있는 라나문은 몹시 선정적으로 보여서, 라틸은 그가 지금 당장 앞으로 ‘뇌쇄적’이란 단어는 자신만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 요구한다면, 독점권을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라틸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라나문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