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함정 VS 함정2021.02.17.
라틸은 놀라는 와중에도 대신관이 사람을 죽였단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물론 첫 만남 때 대신관이 적의 목을 뚝 꺾어 버리거나 내려쳐 기억을 잃게 만들려는 등 난폭한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기엔 어마어마하게 세게 때리는 것 같았지만 다 조절을 한단 거였다. 게다가 남들이 자신을 모욕할 때도 허허 웃으면서 넘기던 녀석이 대놓고 자기 주거지역 안에서 하인을 죽였다고?
“확실해? 누가 보기라도 했어?”
“본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대신관이 의심을 사?”
“하인 다섯 명이 창고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며칠 전 그자들이 대신관을 험담하다가 대신관에게 발각된 일이 있답니다.”
“그래서 대신관이 범인 아니냔 의심을 받는 거야?”
“예.”
라틸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대신관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대신관을 범인이라 생각하고서 무작정 끼워 맞추듯 수사하지 말고, 엄밀하고 공정하게 제대로 수사해 봐.”
“예, 폐하.”
* * * 다음날 오후 3시 무렵. 라틸이 오빠에게 보낼 편지를 쓰다가 찢다가 쓰다가 찢기를 반복하고 있자니, 수사관이 라틸을 찾아왔다.
“들어오라.”
라틸은 또 욕설을 덧붙이고 만 편지를 찢으면서, 딱딱한 판을 덧댄 보고서를 든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어제 부기사단장님을 통해 지시받은 수사 중간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폐하.”
해봐. 라틸이 턱을 까딱하자 수사관은 자신이 들고 온 보고서 앞장을 넘기고서 한 번 침을 꿀꺽 삼켰다.
“대신관님이 연루되었단 소문이 돌았지만, 사망 추정 시각에 대신관님은 성기사들과 함께 있으셨던 게 확인되었습니다. 그 전후로도 계속, 정확히는 밤새 내내요.”
“거봐. 아니라니까.”
“네. 대신관님은 이번 좀비 사건 때문에 자주 성기사들과 이런저런 토론을 하시는 모양이었습니다. 한두 사람이 함께 있던 게 아닌 데다 당직이었던 하인들도 계속 음식을 날랐으므로 확실합니다.”
“범인은?”
“그게…….”
수사관은 라틸의 눈치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한 장 더 뒤로 넘겼다. 라틸은 그가 긴장했단 걸 알아보고서 돌아올 대답을 바로 짐작했다.
“못 잡았나 보군.”
“그게…… 예. 하인들이 창고에 가는 걸 본 사람은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없답니다. 누군가 나오는 걸 본 사람도 없고요. 게다가 족적 검사 결과 실제로 다섯 사람 외엔 들어간 흔적이 없습니다.”
“범인이 자기 발자국을 지웠을 확률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서 자기 발자국만 골라 지우긴 힘들었을 겁니다.”
“기묘하구나.”
혹시 헤움이나 틀라 쪽인가? 좀비는 발자국이 있던가? 라틸은 카리센에서 보았던 좀비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귀족 좀비는…… 연회장 안에 있어서 발자국의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고. 헤움 황자는 연회장 밖 정원에 있었지만, 치열하게 진검승부를 내다보니 발자국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확실한 건 하렘 분위기가 안 좋단 거로군. 이번 가짜 사건 때문인가?”
“아무래도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입니다.”
“그렇겠지.”
* * *
“최근까지는 게스타 님이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으셨는데, 이후엔 갑자기 대신관 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죠.”
저녁 시간. 라틸이 타시르를 불러서 하렘 안의 분위기에 관해 묻자, 타시르는 순순히 상황을 알려주었다.
“요즘은 다들 날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하인 다섯 명이 한꺼번에 죽었으니 앞으론 더 심해지겠네요.”
“얼어 죽었다며? 시체는 봤어?”
“예.”
“어떻든?”
“이미 다 보고 들으셨지 않습니까?”
“네 의견도 듣고 싶어.”
시종들이 웨건을 끌고 들어와 탁자에 저녁 식사를 내려놓고 나가자, 타시르는 한쪽 팔을 테이블에 궤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초여름에 밖도 아니고 안에서 다섯 명이 얼어 죽긴 쉽지 않죠.”
“흑마법이 연루되어 있을까?”
“제가 흑마법에 관해 아는 게 적다 보니 그 부분은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폐하.”
“하긴. 그건 그러네.”
‘어쨌든 대신관에게 선물을 보내야겠다.’
그걸 보면 범인도 깨닫겠지. 함부로 대신관에게 누명을 씌우려 해봤자 역효과만 난다는 걸. 설령 누군가 고의로 대신관을 몰아넣은 게 아니었더라도 상관은 없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은 대신관에게 위로차 선물을 전한 거로 알아서들 해석할 테니. 라틸은 동글동글하게 말려 있는 계란을 포크 끝으로 풀어 헤치면서 이런 일이 벌어져도 그냥 웃고 말 자이신을 떠올렸다.
“아, 타시르.”
“방금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얼굴이셨습니다.”
“맞아, 그보다 물어볼 게 있는데.”
“너무 순순히 인정하시네요. 아니라고 빈말을 해주셨어도 알아서 받아먹었을 텐데요.”
“…….”
어쩌란 거야? 라틸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타시르는 농담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라틸의 입을 슬쩍 닫아주었다.
“뭘 물으려 하신 겁니까? 예뻐서 그냥 불러본 건 아니실 테고.”
“아낙차는 잘 쫓고 있어?”
라틸의 질문에 테이블 근처에서 멀리 놓인 음식을 가져오고 따뜻한 차가 식을 때마다 새로 물을 붓는 등 식사를 돕던 시종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라틸을 쳐다보았다. 시종도 탑에 가두어 둔 아낙차 후궁이 어젯밤 달아난 건 이미 들어서 알았다. 모든 사람이 그 이야기를 떠들어내는데, 시종만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다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라트라실 황제가 몹시 화가 났을 거라고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황제가 분노하면 아랫사람은 자기가 연루된 일이 아니어도 불안해할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 라틸이 태연하게 아낙차 후궁을 잘 쫓고 있는지 질문하자 시종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틸의 표현이 마치 아낙차 후궁의 위치를 알고 있단 것처럼 들려서.
“그럼요. 설마 아낙차 님에 대한 감시를 늦추어 탈출을 유도한 게 폐하란 건 아무도 모르겠죠.”
타시르가 빙그레 웃으면서 라틸의 말을 수긍하자 시종은 더욱 깜짝 놀랐다. 황제가 일부러 아낙차 후궁을 탈출시킨 거였다고? 듣기로 아낙차 후궁 탈출 소식을 들은 황제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던데. 다 연기였나? 이어서 그는 자신이 이 말을 들어도 되나 싶어 괜스레 불안해졌다. 혹시 저 두 사람은 그가 여기에 있단 걸 까먹고서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닐까? 감당할 수 없는 정보는 때론 독이 되는 법이기에 주전자를 든 시종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라틸은 물을 마시는 척 시종의 손을 흘긋 곁눈질하며 타시르에게 지시했다.
“절대로 놓치지 말고 어디로 데려가는지 잘 봐둬.”
“쫓아가는 건 제 특기랍니다, 폐하. 염려 마시고 사랑만 주시지요.”
* * * 그 시각.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달아난 아낙차는 자신을 도와주는 복면인들에게 얼마큼 더 가야 하느냐고 재촉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궁전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복오빠를 죽인 라트라실이 이제는 제 친오빠와 어머니까지 가두었다. 명령으로 가둔 건 아니지만 눈치를 보느라 다들 갇혀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기회가 왔을 때 달아나지 않으면 그 잔인한 것은 무슨 핑계를 대서 언제건 자신을 죽이려 들 터였다. 그때.
“어머니!”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아낙차는 자신의 허리께까지 밖에 오지 않은 동굴 안을 막 빠져나와 휘청이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들의 목소리였다.
“틀라? 틀라니?”
꿈속에서도 내내 그리워한 목소리라 아낙차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아낙차와 함께 탈출한 그녀의 하녀는 죽은 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워서 덜덜 떨었지만, 아낙차는 그런 마음도 없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죽은 아이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법이다. 아낙차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틀라. 틀라니? 틀라야!”
“자, 잘못 들은 거 같아요. 그만하세요 아낙차 님.”
하녀가 덜덜 떨면서 말렸지만, 아낙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금 분명히 틀라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들었고 너도 들었는데 잘못 들었다니.”
그 순간. 수풀을 헤치며 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낙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틀라를 보자마자 눈이 커다래졌다. 하녀는 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으나 아낙차는 황급히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덥석 안았다.
“틀라야! 세상에 내 새끼! 틀라야!”
아낙차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얼른 달아나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틀라를 꼭 끌어안았다.
틀라의 몸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나 아낙차는 이조차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낙차 님. 얼른 달아나야 합니다. 한시도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탈출을 도운 병사는 지금 나타난 사람이 틀라가 아니라 틀라를 닮은 누군가라 생각하면서 아낙차를 재촉했다. 그러나 아낙차는 들은 척도 않고서 두 손으로 틀라의 뺨을 매만졌다. 선황제가 호수 같다며 감탄한 그녀의 커다란 눈이 폭우를 만난 것처럼 그렁그렁해졌다.
“세상에. 틀라니? 우리 아들 맞지? 응?”
“맞아요 어머니.”
“아아. 이럴 수가 있을까.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아낙차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서 끙끙거리다가 아들을 다시 품 안에 끌어안으며 물었다.
“라트라실 그것이 네가 죽었다 말하기에 정말이라 여겼다. 알고 보니 날 속였구나. 널 죽이진 않았어. 그렇지? 쥐꼬리만한 양심이라도 있긴 했던 거야. 그렇지?”
덜덜 떨던 하녀도 아낙차의 말을 듣고서야 틀라가 사실은 죽지 않았던 거라 생각하고서야 안심했다.
“라틸은 절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라틸이 살려준 게 아니에요.”
“그것은 어릴 때부터 잔혹하고 영악했지!”
“그랬지요.”
“그 애는 전부 다 되돌려 받게 될 거다. 그렇게 잔인한 것이 황제라니!”
“우선 가면서 이야기해요, 어머니.”
“네가 날 구해준 거니?”
“네. 어머니를 구하고 싶어도 경계에 틈이 안 나 늘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번에 구할 길이 있어 보여 시도한 겁니다.”
아낙차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틀라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급히 달아나느라 여기저기 찢어진 그녀의 옷 위에 덮어주었다.
“이젠 고생하시지 않게 제가 지켜드릴게요.”
“라트라실 그것이 제 오빠와 싸운 것 때문에 지금 궁전 안에서 영향력이 약해진 모양이더라. 그 덕에 내 감시도 늦춘 것 같아. 인력이 모자라니까.”
틀라는 아낙차가 이동하기 어려울까 봐 어머니에게 등을 보이고서 업히라 말했다. 아낙차가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결국 업히자, 틀라는 어머니를 번쩍 업고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낙차는 죽은 줄 알았던 자식에게 몸을 기댄 채 자신이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세세히 들려주었다. 그러던 중. 빠른 속도로 나아가던 틀라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왜 그러니? 어디가 아프니? 날 업고 가서 그렇구나. 이제 내려다오. 내 발로 걸을 수 있어.”
아낙차는 발바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아들이 자기 때문에 무리하고 있을까 봐 황급히 상체를 들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전 이전보다 훨씬 세져서, 어머니를 업는 건 솜털 베개를 업기보다 쉬워요.”
“솜털이라니……. 그러면 왜 멈춘 거니?”
“어머니 탈출이요.”
“?”
“어쩌면 라틸이 계획한 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준비한 게 아니었어?”
“준비하고 틈을 엿보고 있었죠. 그런데 안 보이던 틈이 갑자기 생겼단 건……”
아낙차는 틀라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라틸 그것이 함정을 파고 널 끌어들였을 수도 있단 거구나!”
아낙차는 짧은 지명을 지르고서 황급히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 내려다오. 내가 돌아가겠다.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넌 다시 달아나라. 빨리!”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지킬 겁니다. 반드시. 절대로 혼자 달아나지 않아요.”
“나야말로 이번엔 널 지킬 거다! 네가 죽었단 소리를 듣고 이 심장이,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어!”
“라틸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해야겠습니다.”
“역으로 이용하다니?”
“라틸이 판 함정을 제 함정으로 만들어야겠어요.”
아낙차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아들의 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영리한 그녀는 틀라의 말을 곧 깨달았다.
“라틸이 네가 숨은 곳을 알아내려 판 함정이니, 넌 거기에 역으로 네 함정을 파고서 라틸을 잡아내려는 거구나!”
아낙차는 소리 높여 웃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감옥 너머에서 그녀를 쳐다보며 빈정거리던 그 빌어먹을 황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그 애를 잡아 짐승 우리에 넣자. 하루에 한 끼씩 흙을 섞은 밥을 던져주고 주워 먹는 걸 보아도 이 원한은 풀리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