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사랑했던? 사랑하는?2021.02.14.
사랑하는 사람?
“어…… 그렇구나. 사랑했던 아니고 사랑하는. 아. 음. 그러네.”
현재진행형인가. 라틸은 역시 괜히 질문했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차라리 닥치고 있는 게 낫겠어. 이런 말을 왜 하는 거야? 라틸은 스스로를 타박하다가 발딱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계속 칼라인을 보았다. 그가 혹시 변명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봐. 칼라인은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란 표정이었다. 동공이 평소보다 커다랗고 입술이 연신 달싹였다. 그래, 뭐든 말해봐. 라틸은 일부러 주저하는 척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칼라인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실망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실망할 게 없는데도.
‘날 사랑해서 후궁이 된 사람이 없단 건 알잖아.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그래. 서로서로 이득 맞춰서 만나는 건데.’
라틸은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실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계속에서 되뇌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어서 애써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어쩐지. 계속 이름을 부르더라.”
“주인. 나는…….”
“아니, 나는 정말로 신경 안 써. 어차피 나도 널 사랑하지 않는데 뭐.”
“!”
“우린 그 뭐야. 주군과 신하 이런 거잖아. 믿고 믿는 사이.”
자기가 먼저 사랑하는 여자가, 그것도 지금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했으면서 왜 저렇게 상처받은 표정이야? 라틸은 칼라인이 도리어 자신을 충격받은 눈으로 바라보자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자기는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나는 자기를 사랑해주었으면 한단 건가? 아니. 그런 거라면 솔직하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단 말도 안 했겠지. 라틸은 이 자리에 서 있자니 자꾸 자신이 치졸해진단 느낌을 받고서 계속 조리 없이 중얼거리다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나가버렸다. 라틸이 나간 후. 칼라인은 닫히는 문을 보다가 침대로 돌아가 괴로워하며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도미스는 주인, 그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대입니다.’
자신이 도미스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황제가 기분 나빠할 거란 건 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칼라인은 도미스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으니까.
* * * 가짜 황제와 친하게 지냈단 소문이 퍼지면서 하렘 안에서 가장 평판이 좋았던 게스타는 빠르게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이전에는 게스타가 지나갈 때면 모르는 궁인들도 달려와 인사를 했지만, 지금은 다들 먼발치에서 수군거렸다. 가까이 지나가면 웃으면서 바로 인사를 올렸지만 좀 멀어지자마자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리는 분노했지만, 게스타가 괜찮단 말만 거듭했으므로 뭘 어떻게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대신관이 게스타를 찾아왔다.
“대신관님이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지…….”
게스타는 방 안에서 책을 읽다가 대신관이 들어오자 얼굴을 책으로 반쯤 가리고서 물었다. 대신관은 반듯하게 인사하면서 활짝 웃었다.
“날씨가 좋아서요. 햇살이 따스한 걸 보니 게스타 님이 생각났습니다.”
“제가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꼭 햇살 같은 분이라 생각했거든요.”
사실 대신관이 게스타를 찾아온 건 그가 하렘 안에서 많이 눌리고 있단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그는 누구든 궁지로 몰아넣는 일은 절대로 안 된다 생각했기에 자신이라도 나서서 게스타를 챙기려는 것이었다. 게스타는 대신관의 말에 쑥스러워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창밖을 가리켰다.
“그러면…… 같이 산책할까요? 햇살이 따스하다고 하시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게스타는 책을 내려놓고서 얼른 문으로 걸어갔다. 이후 두 사람은 하렘 안에 잘 꾸며진 정원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얼마나 그렇게 걸어갔을까. 주위에서 수군수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스타는 대신관에게 화단을 가꿔보고 싶은데 조경엔 아는 게 없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단 이야기를 하다가, 멈춰서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았다. 그러더니 겁먹은 얼굴로 시무룩 고개를 숙였다. 마치 ‘또 내 얘기를 하나 봐요’ 하는 얼굴로. 그걸 본 대신관은 좀 화가 나서 일부러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자이신 님.”
게스타가 그러지 말라고 말리려 들었지만 대신관은 성큼성큼 계속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럼 지금 사태가 전부 대신관 님 때문이란 거야?”
“그런 거 같지 않아? 대신관이잖아. 그런데 대신관이 카지노에도 있고 후궁도 하고 그러니까.”
“카지노에선 도박을 한 게 아니라 딜러를 한 거라잖아.”
“성직자라면 카지노엔 들어가지도 말아야지.”
“내 생각에도 대신관 님이 대신관답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 같아.”
그러나 사람들은 게스타가 아니라 대신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신관은 저벅저벅 걸어가다가 궁인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알자 멈추어 서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냥 돌아가자고 게스타에게 말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게스타가 그쪽으로 걸어가더니 웬일로 단호하게 화를 냈다.
“지금 무슨 말들을 하는 거지?”
게스타가 나타나자 하인들은 놀라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지금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다 자이신 님 때문이라니!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도 생각도 하지 마라. 이 일은 흉악한 흑마법사들이 벌인 짓인데, 흑마법사들과 정반대 힘을 가진 대신관 님을 모욕하다니!”
게스타가 화를 내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여들었다. 대신관은 게스타를 달래느라 쩔쩔매며 그의 등과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그냥 헛소리라 들으면 되지요.”
“뭘 모르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아니, 진짜로 괜찮은데…….”
대신관이 연신 괜찮다고 말을 했으나 게스타는 계속 화를 냈고, 결국 대신관은 안 되겠다 싶어서 게스타를 번쩍 안고 그 자리를 떠버렸다. 대신관이 한참 떨어진 곳에 게스타를 내려놓자, 게스타는 얼이 빠져 있다가 가까스로 몸을 삐걱삐걱 움직였다. 잠깐 고장 났던 몸이 제대로 수리되었나 살피려는 것처럼.
“미안합니다, 게스타 님. 거기서 더 소동을 부려봤자 좋은 게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게스타는 좀 놀란 표정이긴 했으나 곧 시원하게 웃었다.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전 그보다 대신관 님이 걱정되어서…….”
“전 사람들이 뭐라 떠들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거짓 이야기를 떠들어도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
“결국, 죽은 후에라도 그 벌은 받게 될 테고요.”
긍정적이면서도 대신관다운 대답에 게스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따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 * * 하인 다섯 명은 덜덜 떨면서 주위를 연신 살폈다. 밖은 더웠으나 그들은 몹시 추웠다. ‘그 후궁’이 준 음식을 먹고 난 후부터 내내 이랬다. 게다가 그 추위는 단순히 소름이 돋을 정도가 아니라 살을 에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견디기 몹시 힘들었다. 그때 창고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발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인들은 얼른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들에게 이상한 음식을 준 그 후궁. 게스타였다.
“게스타 님.”
“게스타 님.”
하인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으나 게스타는 대답 대신 문을 도로 닫았다. 문이 닫히자 하인들은 앞다투어 게스타에게 용서를 청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게스타 님. 이젠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시키신 대로 대신관 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했으니 제발 약을 주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게스타 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할게요!”
그들은 덜덜 떨면서도 연달아 용서를 빌었다. 여기 모인 다섯 명은 오늘은 뒤에서 대신관을 흉본 이들이었고, 그전까지는 게스타를 흉본 이들이었다. 그러다 이틀 전. 게스타를 욕하면서 선대 황후와 뭔가 있는 게 아니냐고 낄낄 웃다가 현장에서 딱 잡힌 것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잡혔지만, 게스타가 평소 소심하고 선한 성품이기에 싹싹 빌면 용서받을 거라 여겼다. 예상대로 게스타는 용서를 해주었다, 이상한 음식을 주면서. 하지만 그 음식을 먹자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오한이 들었는데, 게스타는 그게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해약을 먹지 않으면 평생 그렇게 추위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이 때문에 이번에 그들은 해약을 대가로 자신들이 했던 일을 방향을 바꾸어 또 해야 했다. 대신관에 대해 뒤에서 험담하는 것. 게스타에 대해선 욕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그들도 대신관을 험담하는 건 본능적으로 꺼려졌지만, 몸 안을 들쑤시는 냉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결국 게스타가 시킨 일을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지.”
게스타는 그들이 싹싹 빌자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굳이 이런 일을 시킨 건 헛소문을 퍼트리는 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인걸.”
말을 마친 게스타가 품 안을 뒤지자 하인들은 안도해서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닦았다. 게스타는 품 안에서 꺼낸 약병을 가장 앞에 놓인 하인에게 건넸다.
“자. 한 방울씩만 먹으면 된다. 양이 많지 않으니 많이 먹진 말고.”
하인들은 꾸벅꾸벅 인사하면서 약병을 손가락에 대고 기울여 한 방울씩만 덜어서 혓바닥에 찍어 먹었다. 하인들이 약을 다 먹고 돌려주자 게스타는 약병을 받아 손 위에 올려놓고는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이신 님이 그러더라. 나쁜 짓을 하면 죽은 후에라도 벌은 받게 된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하인들은 게스타를 쳐다보았다. 게스타는 병을 품 안에 도로 넣으면서 빙긋 웃더니 하인들을 둘러보다 한 손을 들어 인사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짠가 확인해 봐. 안녕.”
말이 끝나자마자 하인들은 피부 속을 돌아다니던 냉기가 심장을 덮쳐오는 걸 느끼고 그대로 쓰러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창고 안에서 오들오들 떨던 하인 다섯 명은 순식간에 동사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게스타는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구로 걸어갔다. 하지만 한 명이 쓰러지면서 문을 가로막은 터라 거추장스럽자, 그는 발을 뻗어 그자를 툭툭 걷어찼다. 굳은 몸이 옆으로 지익 지익 밀려나자 게스타는 문을 열고 가벼운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 * * 늦은 밤이지만 라틸은 집무실에 남아 계속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밖에서 급히 라틸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폐하, 폐하!”
“들어오라.”
라틸은 눈가를 누르면서 명령했다. 즉시 문이 열리면서 부기사단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라틸은 하품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묻다가 부기사단장의 얼굴이 창백한 걸 발견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군. 뭔데?”
“아낙차 후궁이 달아났습니다, 폐하!”
그 말에 라틸은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하지만 손을 치울 때 라틸의 표정은 완전히 화난 것처럼 보였다.
“뭐야? 정말이냐?”
“예! 그리고…… 대신관 님께서 하인 다섯 명을 죽이셨다 합니다!”
라틸은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뭐?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