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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미래를 위한 침묵 (99/367)

99화. 미래를 위한 침묵2021.02.07.

타시르가 아깐 왜 그렇게 웃었을까? 이후 타시르는 평소처럼 웃으면서 라틸에게 몸을 기대고 “이러고 가도 되나요?” 하고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순간 보였던 그 애매한 미소가 자꾸 라틸의 머릿속에 남았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더. 질투? 아니, 질투는 아니었다. 질투도 할 사람이 해야지, 타시르의 질투라니. 그러면 혹시…….

16551093038245.png‘다른 곳에 들렀다 가려 했는데 나 때문에 돌아가야 돼서?’

곰곰이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자 결국 라틸은 생각하길 멈추었다. 지금은 게스타에 대한 건부터.

16551093038245.png‘한 번에 하나씩.’

라틸은 자신의 볼을 눌러 표정을 관리한 다음 게스타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라틸이 연락도 없이 나타나자 방문 앞에 서 있던 호위는 깜짝 놀라 “폐하!”하고 외쳤다. 그러고는 라틸이 ‘게스타 있냐’고 묻기도 전에 방문이 발칵 열리면서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라틸이 어쩡쩡하게 손을 올린 채 쳐다보자, 트리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돈뭉치를 본 표정으로 변해 외쳤다.

16551093038256.jpg“폐하! 드디어 오셨군요!”

게스타가 날 많이 기다렸나 보다. 라틸은 트리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충 지금까지 방 안에서 일어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16551093038245.png“게스타는?”

16551093038256.jpg“방 안에 계십니다!”

트리가 방문을 과도할 정도로 활짝 열어주자, 라틸은 트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문 두 개를 지나자 게스타가 문가에 어색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라틸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준비한 듯 커다란 화병을 품에 안고서.

16551093038245.png‘꽃……을 얼굴 아래에 두려 했던 건가.’

하지만 화병을 안고 서다니. 라틸이 황당해서 웃자 게스타는 얼굴과 목덜미, 귀까지 붉어져서는 화병을 얼른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16551093038273.png“갑, 갑자기 오실 줄은 몰라서…… 제가 안고 있으려 한 게 아니라 트리가…….”

16551093038245.png“오늘은 책이 아니라 도자기를 들었네.”

16551093038273.png“폐하…….”

게스타가 울상을 짓자 라틸은 그의 팔을 잡고 소파로 데려갔다. 옆에 앉히자 게스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라틸은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역시 게스타가 스파이는 아닌 거 같아’란 생각. 다른 하나는 ‘내 옆에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굴지만, 엄마 옆에 가서도 저랬겠지?’라는 생각.

16551093038245.png‘물론 살아남기 위해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 한 게 나쁜 일은 아니야. 게스타가 엄마를 잘 따라다녔다지만 날 배신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도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16551093038245.png“고마운 게 하나 있고. 묻고 싶은 것도 하나 있는데.”

16551093038273.png“무엇이든 말씀하세요, 폐하.”

16551093038245.png“로르드 재상이 날 도와준 건 알지? 고마워. 덕분에 수월하게 돌아온 거 같아.”

16551093038273.png“폐하…….”

게스타가 눈을 내리깔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자 긴 속눈썹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연약해 보이는 모습. 무슨 말을 하면 바로 눈물부터 뚝뚝 흘릴 것 같다. 그 탓에 라틸은 두 번째로 하려던 말을 바로 하지 못했다.

16551093038273.png“폐하?”

라틸이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자 게스타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라틸이 황급히 그의 얼굴을 도로 옆으로 돌려두었으므로 게스타는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16551093038273.png“폐하?”

16551093038245.png“넌 옆모습이 예뻐.”

16551093038273.png“네?”

16551093038245.png“이 상태로 있자.”

게스타는 영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일단 라틸이 정해준 방향을 시키는 대로 쳐다보았다. 너무 이상하게 굴었나. 라틸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아니야. 편하게 있어.”라고 정정하고서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16551093038245.png“저기, 네가 새를 한 마리 주웠단 이야기를 들어서 왔다.”

16551093038273.png“새요?”

16551093038245.png“어. 나도 새를 기를까 하거든. 혹시 먼저 기르고 있다면 어떻게 기르는지 배우고 싶어서. 고맙단 얘기도 할 겸.”

16551093038273.png“전 새를 기르지 않는데요?”

하지만 게스타는 라틸의 이야기에 전혀 수상한 구석이 없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16551093038245.png“그럼 주웠다는 새는…….”

16551093038273.png“간단한 처치를 했지만 이후에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라서, 트리를 시켜서 전서구를 취급하는 부서에 가져다주라 했습니다.”

16551093038245.png“아. 그래?”

16551093038273.png“네.”

게스타는 ‘근데 그게 언제 일인데 이제야 물으시지?’라는 표정이었다. 말이 끊기자 어색해져서 라틸은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참 어색하고도 어색한 시간이었다. 게스타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자, 라틸은 타시르와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편하게 있는지 새삼 까달았다. 그럴 수밖에. 타시르는 라틸이 입을 다물어도 혼자서 조잘조잘 잘 얘기해대니 말이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머리를 휙휙 굴리면서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뿐이었다.

16551093038245.png‘라나문하고 있을 때도 다른 의미로 편하긴 하지.’

걔는 누구랑 있어도 조용하고 냉정한 사람이란 걸 아니까.

16551093038245.png“음…… 그러니까…….”

결국 라틸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아까 물으려다 게스타가 너무 여려 보여서 멈추었던 말을 도로 내뱉고 말았다.

16551093038245.png“사람들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네가 가짜랑 친하게 지냈다고 하던데.”

말을 하자마자 라틸은 ‘안 묻기로 했잖아!’라고 자신에게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미 질문은 나간 뒤였다. 지금 와서 ‘아니, 대답하지 마.’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결국, 라틸은 ‘이왕 이렇게 됐으니 대답이나 듣자!’ 싶어 손을 깍지끼고 게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게스타의 낯빛을 보자마자 라틸은 이 질문을 한 걸 후회했다. 게스타는 당장에라도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가서 옆 나라에서 발견될 것처럼 보였다.

16551093038245.png“널 의심해서 한 말은 아니고.”

라틸은 얼른 덧붙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16551093038245.png“이상한 말이지. 이상한 말인데, 그냥. 네가 이 부분에 대해서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라틸은 괜히 소파에 등을 더 기대고는 게스타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 일에 대해 무엇이든 말해주길 기다렸다. 그럴듯한 변명. 자신을 변호할 상황 설명. 그런 것들.

16551093038273.png“…….”

그러나 게스타는 라틸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슬픈 표정으로. 하지만 라틸이 원하는 건 표정이 아니라 정확한 설명이었다. 혹시 겁먹어서 저러는가 싶어서, 라틸은 입가 양옆을 크게 벌려서 웃는 표정을 고수했다. 그러나 게스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또 내리깔고서 가만히 자기 손만 꼭 쥐고 있을 뿐.

16551093038245.png“네가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도는 소문이 꼭 진짜 같잖아.”

라틸이 뼈 섞인 농담을 던져도 마찬가지였다.

16551093038245.png“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래도 게스타가 입을 다물자 결국 라틸은 “그래.”하고 중얼거리고서 일어났다. 게스타가 스파이라거나 엄마에게 자신을 팔았을 거란 생각은 여전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입을 다물고만 있으니,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생각나 기분이 불쾌해졌다.

16551093038245.png“나는 음. 다른 바쁜 일을 하다가 와서. 나중에 다시 오마.”

그렇다고 게스타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결국 라틸은 그렇게 둘러대고서 복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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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황제가 가버리자 트리는 게스타에게 다가가 울먹이며 물었다.

16551093038256.jpg“솔직하게 말씀하셨어야죠, 도련님! 도련님이 제일 먼저 가짜란 걸 알아차렸고, 아트락시 공작이 재상님을 시켜서 도련님한테 가짜랑 어울리라 지시했다고요!”

16551093038273.png“안 믿으실 거야.”

16551093038256.jpg“안 믿어도 하셨어야죠! 이대로 억울하게 당하실 거예요?”

트리가 풀쩍풀쩍 뛰지만, 게스타는 쓸쓸하게 웃기만 했다.

16551093038273.png“괜찮아. 나중에 다 아실 테니까.”

그리고 지금 화를 낸 만큼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지겠지. 게스타는 뒷말은 감추었다. 그는 비밀스럽게 진행한 일을 여기저기 떠벌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러니 라틸이 자신이 설치해놓은 후회의 덫을 밟기 전까지는 억울하고 갑갑하고 화가 나도 그냥 이렇게 있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많았는데도 꾹 참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를 모르는 트리는 그저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16551093038256.jpg“도련님은 화도 안 나세요?”

16551093038273.png“난 그것보다…… 폐하께서 내 약속을 잊은 거. 그냥 그게 섭섭해.”

16551093038256.jpg“!”

게스타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말에 트리는 그제야 펄쩍 뛰던 걸 멈추었다. 이건 그도 까먹고 있던 거여서. 트리도 게스타가 라틸과 한 생일 약속을 떠올렸다. 둘이서만 놀러 가기로 한 약속. 황제가 가짜로 오인받아 궁을 나가는 바람에 지켜지지 못한 약속을. 트리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울적해진 게스타를 달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16551093038256.jpg“생일 당시에 너무 위급하셨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레안 황자님과 선황후폐하가 저지른 일 뒷수습을 하느라 바쁘시고, 흑마법사 관련한 일도 처리하셔야 하고…….”

16551093038273.png“그렇겠지?”

그래도 게스타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트리는 라틸을 향해 항의하길 멈추고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

16551093038256.jpg“그럼요! 억울하게 쫓겨 갈 위기를 넘기신 탓에 잠시 다른 일은 다 잊으신 게 분명해요. 생각나면 다시 챙겨주실 거예요, 도련님.”

  * * * 아니, 그냥 헛소문이 돌고 있다,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 소문만큼 자주 가진 않았다, 뭐 이런 말로 둘러대면 되는 거잖아? 왜 안 해? 그거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방으로 돌아온 라틸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진짜로 게스타가 가짜 쪽을 더 좋아해서 저러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16551093038245.png‘만약 게스타가 엄마 성격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하면 어쩌지?’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에게 보내주어야 하나? 하지만 그건 너무…… 이상했다.

16551093038245.png‘말이 무진장 이상하게 나올걸.’

라틸은 책상 앞에 앉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게스타를 보고 왔는데 웬일로 더욱 갑갑해졌다. 이럴 땐 서넛과 농담 따먹기라도 해야 하는데. 서넛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라틸이 다시 집권했단 이야기를 들었으면 얼른 돌아와야 할 텐데.

16551093038245.png‘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라틸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다가 책상 서류를 한쪽으로 몰아두고 빈자리를 만든 다음 팔을 괴고 엎드렸다. 서넛은 강하지만 적이 레안 뿐만이 아니다 보니 걱정되었다. 게다가 레안 외 다른 적들은 무시무시한 괴물들 아니던가. 서넛이 그자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무위를 떨칠 수 있을까? 이곳 기사들 중에서도 서넛은 월등하게 강했지만, 레안이 수많은 기사를 몰고 가서 인원수로 누르자 결국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괴물들이 머릿수로 덤벼들면?

16551093038245.png‘끔찍해.’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틸은 헤움 황자가 만든 귀족 좀비가 도끼를 들고 연회장에 들어오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곳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틀라는 헤움만큼 적극적인 공격은 하지 않고 있지만, 헤움이 틀라와 손을 잡고 이쪽에 좀비를 보낼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헤움이 얽히지 않더라도 틀라 역시 자기 어머니를 구할 거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꿈에서 한 말인지 아닌지 구분은 안 가지만. 하여튼 그런 식으로 틀라가 좀비를 풀어서 아낙차 후궁을 구하려…….

16551093038245.png‘아! 맞아!’

  * * * 그 시각. 서넛은 심장이 꿰뚫린 채 늪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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