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하렘 사람들은 다들 너무해요!2021.02.03.
“사람들도 참 너무해요.”
트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게스타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 일이 있었죠.”
“또?”
“네. 또요.”
트리는 가져온 상자를 책장 앞에 내려 놓으면서 툴툴거렸다.
“정말 너무하고 너무 웃기지 않아요? 폐하가 가짜란 걸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도련님이잖아요! 그런데 도련님이 후궁들 중 제일 욕을 먹고 있다니요!”
게스타는 손에 든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트리는 자기도 모르게 외칠 뻔했다.
“아니, 사람들 진짜 웃겨요! 자기들은 폐하가 가짜란 것도 몰랐으면서, 이제 와서 아주 희대의 충신들인 것처럼 군다니까요? 그러기만 하면 웃기기나 하지! 왜 도련님이 가짜를 속이려고 옆에 붙어 있었던 걸 욕하는데요?”
게스타는 “음.” 하고 우물거리다가 손가락으로 허공의 두 지점을 짚었다.
“이것도 웃기고 저것도 웃기다 했잖아. 말이 좀 안 맞는 거 같아.”
“도련니임!”
트리는 꽥 소리를 지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난 폐하만 그 소문을 안 믿으면 돼.”
이런 말이나 해대는 도련님이 오늘따라 너무 답답했다. 매운 고추를 서너개 넣고 수프를 끓여 드리면 좀 화끈해지시려나?
“폐하께선 칼라인 님한테 다녀가시고 라나문 님한테 다녀가셨어요. 오는 길에 들으니 지금은 타시르 님을 집무실로 부르셨대요. 게스타 님이랑 재상님도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됐는데, 왜 우리한텐 안 오세요? 이게 다 소문 때문이라고요! 그렇게 천년 산 토끼처럼 웃으실 때가 아니에요!”
“너 말이 평소보다 길어졌다.”
“도련니임!”
게스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양말이 들썩이는 걸 보니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것 같았다. 트리는 상자 뚜껑을 벗겨 책을 꺼내 챚꽂이에 아무렇게나 퍽퍽 꽂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드러냈다.
“도련님이 해야 할 건요, 폐하를 찾아가서 다 말씀드리는 거예요. 도련님이 제일 먼저 진실을 알아차렸고, 그렇게 이뻐하는 라나문 님은 그냥 거저 들은 거라고요! 칼라인 님은…… 뭐 큰 도움이 됐으니 이번엔 어쩔 수 없겠지만요!”
말을 하다 보니 트리는 더욱 억울해졌다. 소문을 들어보니 라나문과 타시르, 대신관 이렇게 셋이서 비밀 회동을 해서 황제가 돌아오도록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다들 이 셋이 정말로 대단하다며 진정한 후궁이라고 치켜세웠다.
“전 타시르 님이 게스타 님만 회동에 안 부른 것도 화나요! 게스타 님이 정보를 알아냈는데, 어떻게 게스타 님만 쏙 빼요?”
“…….”
“클라인 님 무식한 거야 다들 알아서 욕도 안 해요. 게다가 외국 황자라서 일부러 뺀 거라고 자기들끼리 이해도 해줘요. 그런데 아무도 도련님 사정은 안 알아줘요! 전 진짜 열불이 나서 5분 단위로 막 혈압이…….”
트리가 얼굴이 벌게지자 게스타는 얼른 달려가서 대신 책을 찾고 책꽂이에 빠르게 딱딱 꼽았다. 열심히 손을 놀리면서 게스타는 트리에게 달래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폐하가 나를 지금 냉대하면 냉대할수록 나중에 돌아오는 죄책감이 커지실 테니까.”
“죄책감도 뭘 알아야 느끼시죠!”
“알게 되실 거야. 언젠가는.”
“언제요?”
“그건 나도 몰라.”
트리는 결국 자신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 대책 없고 긍정적이기만 한 도련님이 어떻게 해야 현실을 바라보실까! 하지만 게스타는 아무 계획 없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게스타는 이미 여기에 대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두었고, 그동안의 일은 각오를 한 상태였다. 높게 뛰기 위해서는 무릎을 굽혀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별개로…….
‘입을 너무 심하게 놀리는 것들은 좀 정리를 해야겠네.’
* * * 트리가 게스타에게 말했던 대로 라틸은 자신의 집무실에 타시르를 불러 함께 식사하는 중이었다. 식사라고는 하지만 일할 게 너무 많은 터라 음식은 최소한으로만 차려져 있었다. 타시르를 굳이 집무실로 부른 것도 하렘까지 갈 시간이 나지 않아서였다. 이게 다 오늘 아침,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레안이 인사에까지 손을 댄 탓이다.
“그거 아십니까, 폐하? 요즘 저와 라나문 님, 칼라인 님 이렇게 셋이 폐하께 가장 총애 받는 세 명이라 불리는걸요.”
“뭐야. 정말? 그중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잖아?”
“물론 정답은 저 하나뿐이지요. 압니다.”
“…….”
“이 침묵은 긍정?”
석 달 전쯤이라면 타시르에게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 했겠지만, 라틸은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어쨌든 타시르가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대신 라틸은 타시르의 손에 포크를 쥐여주었다.
“먹어. 얼른 먹어.”
“예, 그럼.”
하지만 타시르가 포크를 쥐여주는 라틸의 손을 가져다가 손등 위에 쪽 입을 맞추고 먹으려는 시늉을 하자, 라틸은 결국 하던 대로 굴고 말았다.
“엉뚱한 짓 좀 그만하고.”
“우리 폐하께선 분위기를 못 타시는군요.”
“네가 헛박자를 타는 건 아니고?”
“그래도 폐하는 제가 좋으시지요?”
“…….”
라틸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타시르는 그 안에 과일을 쏙 넣어주었다. 어찌나 그 동작이 빠른지 라틸은 인상을 구기다가 과일을 씹어버렸다. 화를 내기 전에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화도 쑥 가라앉아서,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면서 그냥 입을 오물오물 움직였다.
“넌 정말 이상한 성격이야.”
“호기심은 사랑의 시작이지요.”
“우리 사랑이 아직 시작도 안 했단 걸 알긴 하구나. 모르는 줄.”
“시작이 반이라니 폐하와 저는 이미 반을 온 겁니다.”
“……말은 잘하지.”
“잘하는 게 과연 말뿐일까요?”
이번에는 라틸이 과일을 가져다 타시르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차이가 있다면 라틸은 타시르의 턱을 손으로 벌린 다음 넣어주었단 것이다.
“그거 다 먹을 동안 입 열지 마.”
“전 먹으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라틸은 손을 뻗어 타시르의 입을 막았다. 타시르는 그래도 좋다고 웃으면서 과일을 잘만 먹었다. 오히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입술의 움직임에 라틸은 자기가 더 어색해져서 정색했다. 이걸 노린 게 아닌데! 얘는 진짜 커다란 여우 같아. 사람으로 변한 여우. 여우 가면은 여우를 써서 여우 같은데, 왜 얘는 가면이 없는데도 여우 같을까. 라틸은 문득 여우 가면과 타시르가 마주 선 모습을 떠올렸다. 서로를 보고 ‘어라?’ ‘너는?’ 하면서 놀라워하는 모습을.
“웃길지도…….”
“뭐가 말입니까?”
“아니. 그런 게 있어.”
라틸은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아직도 자신이 타시르의 입을 막고 있단 걸 떠올리고서 얼른 손을 뗐다. 그러고서 고개를 숙이자 접시에 놓인 음식이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언제 다 먹은 거지?’
라틸은 반대쪽 손에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쨌든 식사도 대충 끝났으니 이제 타시르를 부른 볼일을 꺼내야겠다. 이것도 라틸이 타시르에게 큰 도움을 받은 뒤 생긴 변화였다. 무조건 불러놓고 볼일만 말하지 않는 것.
“엄마랑 오빠 쪽은? 별 움직임 없어?”
“네. 선황후 폐하께선 순순히 신전에 돌아가셨고, 레안 황자님은 별궁에서 얌전히 지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많이 오고 가?”
“선황후 폐하가 계신 신전 쪽이라면, 원래 방문자를 거의 받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별궁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편입니다. 이전보다 적지만요.”
“새는?”
“네?”
“새도 많이 오가나?”
라틸의 질문에 타시르가 고개를 기웃했다. 라틸은 타시르에게 카리센에 있을 때 자신이 알아차린 정보를 알려주었다. 원래 궁궐에는 새가 많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새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서 지금은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고. 적들이 정보를 쏙쏙 잘 빼가는 정황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새를 이용해서 그런 것 같다고. 날아다니는 새가 많다면 그사이에 전서조들을 섞어도 눈치채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렇군요. 그쪽으로도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해. 항상 네게 일을 맡기네.”
그런데 이쯤에서 또 헛소리를 하나 해주어야 할 타시르가 웬일인지 턱을 괸 채 티스푼으로 빈 잔 안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이마가 구겨졌고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왜?”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어서 라틸이 묻자, 타시르는 그제야 티스푼을 놓고 팔을 내렸다.
“게스타 님 일이 생각나서요.”
“게스타?”
“예전에 입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인데요.”
“어. 왜?”
“게스타 님이 날개가 부러진 새를 안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게스타가? 새를?”
“네.”
말을 한 타시르는 곧 빙그레 웃으면서 덧붙였다.
“물론 아무 관련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게스타 님이 스파이 같다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 성격은 사실 스파이가 되기도 어렵지요.”
“그러네. 게스타는 착하니까.”
“뭐,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라틸이 아는 게스타는 착하고 순했다. 다친 새를 발견하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구해줄 사람. 그러니 다친 새를 발견해서 구한 일은 전혀 이상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라틸은 ‘역시 게스타는 착하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게스타는 황제가 가짜란 걸 알면서도 가깝게 지냈다. 단순히 찾아오는 가짜 황제를 뿌리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놀러 가면서까지. 게다가 믿었던 오빠와 엄마에게 연달아 배신을 당했고, 오빠가 심지어 엄마까지도 즉석에서 배신해 버리는 걸 목격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겹쳐지고 나서인가. 게스타가 다친 새를 안고 있었단 것만으로도 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로르드 재상이 날 도운 걸 보면 게스타가 적은 아닐 것 같긴 한데…….”
“그렇지요, 물론. 저도 그냥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새 이야기를 하시니 생각나서요.”
“…….”
“설령 그 새가 문제가 있는 새라 하더라도, 게스타 님은 그저 우연히 다친 걸 보고 구해주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라틸은 손가락으로 톡톡 탁자를 연거푸 두드리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타시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라틸을 올려다보았다.
“응? 어디 가십니까?”
“네 배웅.”
“네? 갑자기요? 저 나가요? 많이 바쁘십니까?”
“응. 게스타한테 가보려고.”
타시르의 표정이 애매모호하게 변했다.
“다른 남자한테 가시려고 절 내쫓으시는 건가요? 섭섭해라.”
“놀러 가는 게 아니란 거 알잖아.”
그래도 서운한 티를 과장될 정도로 드러내는 타시르를 보다가, 라틸은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팔짱을 끼면서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럼 이렇게 하자. 게스타한테 가는 게 아니라 널 네 방까지 바래다주는 거로. 이러면 될까?”
장난스럽게 말하고서 라틸은 타시르 쪽을 놀리듯 올려다보았다. 분명 또 히죽히죽 웃으면서 헛소리로 말대꾸하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의외로 타시르는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