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하나는 눈치가 너무 좋고 하나는 눈치가 너무 없고2021.01.31.
“게스타 님은 계속 가짜 폐하와 어울려 다녔잖아.”
“재상님은 가짜 폐하가 가짜란 걸 알고 있었다던데? 그럼 게스타 님도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 가짜한테 사실을 알고 있단 걸 안 들키려고.”
“아니, 그래도 좀 이상해.”
“맞아. 어쩔 수 없이 어울린 사람치곤 너무 만남이 잦았어.”
“먼저 찾아가기도 하고 그랬잖아?”
“가짜 폐하도 수시로 게스타만 찾고.”
라틸은 점심 식사를 후궁 중 하나와 하기 위해 하렘으로 들어왔다가, 하인들이 구석진 곳에 모여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라틸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기척을 죽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짜 폐하가 생판 남이어도 좀 이상해 보이는데. 선황후폐하시라니 더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혹시 선황후폐하와 게스타 님이…….”
“쉿. 말조심해.”
“수상하잖아.”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엄마와 자신의 후궁을 두고서 저런 식으로 수군거리는데,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트락시 공작도 저렇게 말했지.’
말을 들은 당시에는 아트락시 공작이 라나문을 치켜세우고 게스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멋대로 그런 말을 한다고 여겼는데.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틸은 슬픈 인상을 가진 온순한 게스타를 떠올렸다. 말도 조심조심하고 행동도 조용조용한 게스타. 청순한 게스타. 가장 착하고 순한 게스타.
‘온순하긴 하지만 적응력은 좋은가 보네. 소리 없이 묻혀가는 스타일인가?’
어디서든 잘 적응해서 살아남겠어.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로르드 재상이 자신을 도왔으니 이 일을 굳이 들쑤시진 않겠지만, 게스타가 먼저 엄마를 찾아가면서까지 친하게 지냈단 부분은 확실히 편하게 들리지 않았다.
‘나한텐 안 그러지 않았나? 게스타는 엄마 성격이 더 좋게 여겨졌나? 아니면 내가 못 돌아왔을 때를 위한 보험?’
어쨌든 게스타에 대해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걸 듣고 나자 굳이 지금 게스타를 찾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원래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을 염두에 두고서 하렘에 찾아온 것이었다. 라나문이나 게스타 둘 중 하나와 식사하던가, 시간이 맞으면 셋이서 식사하기 위해서. 하지만 저런 수군거림을 듣고 나자 저울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라나문에게 가야지.’
* * * 테이블 가득 커다랗고 통통한 구이요리와 다양한 과일을 얹어 장식한 파이, 아이싱슈가를 뿌린 커다란 빵, 중간중간 버섯이 모습을 드러낸 수프 등이 차려졌다.
“많이 먹거라, 라나문.”
라틸은 라나문이 완벽하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깨작깨작 식사하자, 새 포크와 나이프를 꺼낸 다음 그의 빈 접시 위에 뼈를 바른 커다란 살코기를 얹어 주면서 권했다. 라나문은 접시 위에 얹어진 바베큐를 보다가 라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쌀쌀맞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는 가끔씩 라틸을 곁눈질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라틸이 자신을 찾아온 게 퍽 기쁜 듯이. 가만히 있어도 아름다운 라나문은 아주 조금만 웃어도 천재 화가의 붓 터치처럼 감미로웠다.
“많이 먹어. 넌 좀 많이 먹어야 돼.”
라틸은 자꾸만 깨작거리는 그의 접시 위에 푸딩이며 말린 과일 등을 계속 얹으며 권했다.
“양이 너무 많습니다.”
“쥐꼬리만큼 먹었잖아.”
“전 원래 조금 먹습니다.”
말이 많이 오가는 건 아니지만 좋은 분위기였다. 라틸은 간만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게 기뻤기에 내내 웃고 있었고, 라나문 역시 오랜만에 라틸과 마주 앉아 식사하자 싫지 않은 듯했다.
“아트락시 공작에겐 정말 고마워. 늘 여러 가지 일로 날 도와주는군.”
“…….”
하지만 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듯, 이번에는 좀 사이가 좋아지는가 싶던 라틸과 라나문은 또 별거 아닌 일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발단은 라틸이 던진 고마움의 표시였다. 라틸은 정말로 악의 없는 말이었다. 아트락시 공작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게 고맙다는 말. 그런데 푸딩을 잘라 입에 넣고서 고개를 드니, 안 그래도 차갑던 라나문의 표정이 더 차가워져 있지 않은가. 뺨에 체온계를 대어보고 싶을 정도로. 입안에선 사과 맛이 확 퍼지는데 눈앞은 얼음덩어리다. 단맛이 싹 사라졌다. 라틸은 떨떠름하게 그를 불렀다.
“라나문?”
왜 갑자기 표정이 그래? 막상 라틸이 이름을 부르자, 라나문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빙그레 웃고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제 아버지를 좋아하신다니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네 아버지를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네가 ‘좋아한다’라고 표현하니까 좀 이상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저는 눈치가 빠르지 못해 잘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눈치가 안 빠른 건 모르겠고 눈치 주는 건 엄청 빠른 거 같은데. 라틸은 우물우물 먹던 푸딩을 꿀꺽 넘기고서 얼결에 같이 숟가락을 내렸다.
‘화난 거 같은데. 왜 화난 거지?’
* * * 식사를 마친 후. 라틸은 업무를 마저 보기 위해 하렘 밖으로 나가면서, 자신과 라나문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들을 열심히 분석했다.
‘걔는 대체 어디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화내는 버튼이 남들이랑 다른 데 있나?’
그런데 출입구 부근에 가 보니, 클라인이 서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클라인? 뭐 하느냐?”
가까이 가서 묻자, 고개를 한껏 빼고서 어딘가를 보던 클라인은 화들짝 놀라 휙 몸을 돌렸다.
“폐하.”
라틸은 클라인이 쳐다보던 방향을 같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길이다.
“저길 왜 봐?”
라틸이 질문하며 고개를 돌리자 클라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라틸은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혹시 내가 오나 안 오나 보고 있었어?”
신기하게도 클라인은 속마음을 안 읽어도 속내가 보였다.
“아닙니다!”
클라인이 대번에 정색하며 반박했지만, 라틸은 자신의 말이 맞단 걸 알아차렸다. 클라인의 뒤쪽에 서서, 라틸의 말이 맞다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종이 그 증거였다.
“나한테 할 말 있어?”
라틸이 질문하자, 클라인의 뒤에 선 시종이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시종은 클라인이 라틸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그냥 솔직하게 드러내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자신의 시종이 어떤 배신 중인지 모르는 클라인은 대번에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계속 하던 거 해.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그러면서도 막상 라틸이 그를 지나쳐 가려 하자 클라인은 황급히 손을 뻗어 라틸의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라틸이 멈추어 서서 돌아보자, 클라인이 다른 쪽을 본 채 손만 뻗고 있는 게 보였다. 라틸은 손을 뻗어서 그가 움켜쥔 자신의 망토를 주욱 끌어당겼다.
“내 망토랑 할 말 있어? 망토 빌려줘?”
라틸이 묻자 클라인은 그제야 라틸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영 갈피가 안 잡히는 얼굴이었는데, 그가 이런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어쩌지. 폐하께서 가짜를 물리칠 때 나만 현장에 없던 걸 뭐라고 설명드리지?]
이번에는 시종이 아니라 그의 속마음이 진실을 알려주어서. 라틸은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느라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덕택에 양 볼이 움푹 패였으나 클라인은 자신의 고민에 심취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궁들 중에서 나만 폐하가 가짜란 걸 몰랐으니, 분명 실망했을 거야. 어떻게든 알고 있었던 척 해야 하는데…… 무슨 수로?]
라틸은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흠흠 헛기침을 했다. 클라인은 살짝 맹한 구석이 있으니까 딱히 진짜와 가짜를 알아낼 거란 기대는 어차피 하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저렇게 심각해 하고 있으니. 과연 무슨 수로 자신을 속여먹으려 들지 궁금했다.
‘그런데 왜 클라인 속마음은 유독 잘 들릴까? 단순해서? 아니면 감정 폭이 큰 편인가? ……새벽엔 칼라인 속마음도 듣긴 했지만.’
칼라인이 자신에게 키스하며 ‘도미스’라고 부른 게 떠오르자 입가에 올라왔던 미소가 싹 가라앉았다. 라틸은 고개를 짧고 빠르게 저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애초에 사랑하는 여자가 죽어서 여기 온 남자란 거 알았잖아. 신경 쓰지 마. 죽은 사람이야. 신경 쓰지 마. 라틸은 칼라인의 목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더욱더 클라인에게 집중했다.
[저는 외국인이라 어전회의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아니야, 우리 형님이 오는 회의니까 들여보내 줬을 거야. 폐하도 이걸 알 거고.]
다행히 생각에 잠긴 클라인은 몹시 아름다워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클라인의 시종이 ‘황자님. 황자님. 말 좀 하세요!’라고 신호를 보내는 동안, 라틸은 빠르게 칼라인을 떨쳐내고서 흥미롭게 클라인의 내리깐 눈매를 바라보았다.
[저도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후궁들이 절 끼워주지 않았어요, 라고 하면? ……아니야, 내가 다른 후궁들을 험담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한참을 그러다가 클라인이 선택한 변명은 너무 가소로웠다.
“저도 가짜가 가짜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폐하.”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설명을 아예 생략해 버렸구나.’
역시 머리가 좋진 않아. 클라인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라틸을 보았다. 라틸이 이 이상 캐물을까 두려워하는 듯. 라틸은 그를 놀리고 싶은 충동이 잠시 들었지만, 결국 그의 거짓말에 넘어가 주기로 하고서 활짝 웃었다.
“그럴 것 같았어. 난 널 믿었다, 클라인.”
혹시 이 말을 듣고 찔려하면 어쩌나 생각했으나, 클라인은 머리도 없고 양심도 없는지 전혀 찔리는 기색 없이 덩달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거 아십니까, 폐하? 칼라인이 하녀랑 바람 나서 궁궐 밖으로 달아났던 거요?”
“…….”
“그 하녀가 완전히 노골적으로 칼라인을 유혹하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거기에 덥석 넘어가더라고요. 전 그 하녀를 딱 봤을 때부터 눈빛이 싸해서 별로였는데.”
기고만장해진 클라인이 하하 웃다가 “폐하를 두고 그런 이상한 하녀한테 반하다니. 칼라인은 안목이 없죠?”라고 묻는 순간. 졸지에 눈빛 싸한 이상한 하녀가 되어버린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발등을 밟아버렸다.
“아야. 폐하?”
클라인이 어리둥절해서 라틸을 쳐다보자, 라틸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잡고서 아예 공을 흔들듯 흔들어보았다.
“폐하? 폐하?”
클라인은 영문도 모르고 흔들렸다. 라틸은 몇 번을 그런 후에야 클라인의 머리통을 놓고서 중얼거렸다.
“텅 비어 있을 것 같아서. 아니네. 뭐가 있긴 있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