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대체 그 여자가 누구야?2021.01.27.
늦은 밤. 라틸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하나하나 점검하다가 펜을 내려놓고 눈두덩이를 눌렀다. 오랫동안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해서인가. 긴장이 갑자기 풀려서인가. 어깨 근육이 꽉 뭉치는 느낌이 들면서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중에 하자.’
라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하지만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왔다. 이대로 궁전에 돌아가면 또 이렇게 같이 지낼 일이 줄어들까 묻던 칼라인이 생각나서.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지만, 칼라인은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옆에서 함께 돌아다녀 주었다. 비록 그가 다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해도 그 시간 동안 보내준 도움에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칼라인한테 내가 30분 정도 있다 갈 테니까 놀라지 말라고 해라. 피곤할테니 새로 씻는다거나 치장한다거나 하진 말고. 그냥 편하게 있으라 해.”
결국 라틸은 기사 하나를 칼라인에게 보내고서 응접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낮은 소파 등받이에 목을 대고서 천장을 쳐다보자마자, 엄마와 오빠 생각에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아예 생각을 하지 말자.’
하지만 이게 쉽게 될까?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목을 들었다. 그러다가 먼발치에서 독서 중인 시녀를 발견했다. 애런델. 가짜를 진짜라 믿고서 이곳에 찾아왔던 라틸을 날카롭게 배척하던 시녀였다. 그 때문일까? 시녀는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면서도 계속 라틸을 곁눈질하다가,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폐하?”
상냥하고 공손한 목소리. 라틸을 가짜라 몰아붙일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라틸은 기분이 묘해졌다. 애런델은 늘 저랬다. 원래 저렇게 라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전에 가짜를 편들었을 때도, 사실 가짜를 라틸이라 생각한 것이기에 그런 것이고. 하지만…… 라틸은 입을 뻥긋하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속 하던 거 해라.”
시녀는 알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뻣뻣했고,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를 뿐. 저쪽도 라틸이 시녀와 호위들에게 가짜로 몰렸던 일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저 사람들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가짜라고 삿대질하던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니 왜 이렇게 빈정 상할까.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팔걸이에 몸을 옆으로 기대고 생각했다. 다른 시녀나 호위들을 보아도 이런 어색한 기분은 마찬가지일 텐데. 차라리 이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새로 들이면 그건 어떨까? 이들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라틸도 잘 알았다. 하지만 서로 얼굴 보기가 불편하기도 하고…… 그러나 결정을 내리기 전, 하렘으로 갔던 호위가 먼저 돌아왔다.
‘이 문젠 나중에 생각하자.’
라틸은 문으로 걸어갔다. * * *
“주인.”
방 안으로 들어가자 문앞에 서 있던 칼라인이 대번에 팔을 뻗어 라틸을 끌어안았다. 라틸은 칼라인을 찾으려다가 코앞에 그의 가슴이 들이 밀어지자, 고장이 나서 팔이 어정쩡한 위치에 멈춰버린 인형처럼 굳었다.
“깜짝이야.”
라틸이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라틸의 정수리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머리를 감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라틸은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늑대를 두드리듯 칼라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제 그만. 인사 여기까지. 그러나 신호를 잘못 인식한 건지, 칼라인은 라틸이 등을 두드리자 아예 감싸 들더니 순식간에 침대로 데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대에 눕게 된 라틸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칼라인을 발견하고 ‘이게 뭐야?’ 싶어서 눈을 깜빡였다.
“너…… 속도가 진짜 빠르구나?”
라틸은 황당해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함께 고생하기도 했고 도움도 받았으니 고마움도 전할 겸 같이 고생한 동료 간의 우애도 나눌 겸 온 건데. 왜 다짜고짜 이런 분위기인지.
“싫습니까?”
칼라인이 라틸의 목덜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라틸은 그의 이마를 손으로 쭈욱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싫고 말고를 떠나서. 지금은 이러려고 온 게 아니야.”
칼라인은 라틸의 팔을 잡아 일어나는 걸 도와주었다. 하지만 라틸이 몸을 일으켜 앉은 뒤에도 그의 손은 팔을 떠나지 않았다. 아쉽다는 듯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커다란 손. 라틸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내리란 소리를 하는 대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칼라인이 그 행동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손길이 닿은 팔을 묘하게 주무르자, 라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안 그래도 손이 차가운 칼라인인데. 그 차갑고 커다란 손으로 피부를 문지르자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닌 괴상한 감각이 들어서. 이건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말할 수 없어서 라틸은 발가락을 꿈지럭댔다. 문득 민망한 상상을 하고 만 것이다. 칼라인은 손도 차갑고 얼굴도 차가운데, 설마 다른 곳도 다 차가울까?
“주인.”
그새 귓바퀴에 칼라인의 입술이 다가왔다. 입술은 물론 숨결까지 차가운 그의 감촉에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칼라인의 허벅지를 쥐고 말았다. 단단한 근육이 손바닥에 가득 차자 라틸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그걸 본 칼라인은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라틸의 팔에 머물러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 깍지를 끼면서 물었다.
“주인은 나 같은 남자를 하렘에 두고서 감상만 합니까?”
“아직 여러 가지 혼란스럽잖아. 주위가.”
“그러니 여기선 혼란을 잊고 즐기셔야지요.”
“아, 그렇긴 한데…….”
칼라인의 손이 라틸의 손을 가두고서 비키질 않았다. 라틸은 그의 손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반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정국이 안정될 때까진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야.”
라나문이나 게스타, 클라인 등에겐 절대로 못 할 이야기였지만, 칼라인과는 카리센에 함께 다녀오면서 신뢰와 믿음이 단단하게 붙었다. 칼라인에겐 이런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칼라인은 라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해한 건가?’
라틸은 겹쳐진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힐긋 고개를 들어 칼라인의 턱을 보았다. 라틸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칼라인도 이쪽을 보면서 시선이 부딪쳤다. 그러나 의외로 칼라인은 웃고 있었다. 서운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날 놀리는 건가? 이쪽은 현실적인 문제인데. 라틸은 골이 나서 투덜거렸다.
“아, 그래 너는 이해 못 할 일이겠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거든?”
이쪽은 진지한 문제인데 저렇게 웃어대는 것부터가……. 그러나 칼라인은 또 웃고서 라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더니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계획 없는 회임을 할 걱정 없이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백 가지는 있습니다.”
라틸은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칼라인이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던 바람에 그의 입술과 라틸의 눈가가 스치고 말았다. 라틸은 고개를 들어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민망했다. 아주 많이. 하지만…….
“그게 뭔데?”
머리카락과 두피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분명 좋았다. 그리고 백 가지나 된다는 방법도 궁금했다. 칼라인은 라틸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려드릴까요?”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배워 볼까?”
칼라인은 한 손으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안 그래도 윗단추 두 개는 풀려 있던 터라 그가 세 번째 단추를 풀자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라틸은 손을 뻗어서 대리석 조각 같은 그의 가슴을 쓸어보았다. 그의 손을 만질 때부터 계속 궁금했다. 얘는 다른 곳도 차가울까? 아니면 손이랑 얼굴만 차갑나.
‘가슴도 차갑네.’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 또다른 곳도 차가울까? 그게 가능한가? 하지만 아찔하리만큼 차가운 입술이 목덜미에 닿자 그런 생각도 휑하니 날아갔다. 라틸은 눈을 감고서 두 팔을 뻗어 칼라인을 감싸안았다.
“차가워.”
칼라인이 라틸의 말에 움찔하더니 목덜미에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 눈동자만 들어 라틸을 보았다. 그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라틸은 “참을 만해.” 하고 중얼거리고서 칼라인을 다시 꽉 끌어안았다.
‘몰라. 내가 따뜻하니까 괜찮겠지.’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지 칼라인은 이불을 끌어당겨서 라틸의 등을 감싸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추웠지만. 아니, 오히려 등은 따뜻한데 앞은 차가우니 더욱 이상했다. 하지만 차가운 표면과 달리 그의 손길이 닿는 피부 안쪽에서는 확실하게 열기가 올라왔다. 라틸은 목덜미에 닿는 말랑하고 차가운 감각에 치를 떨다가 칼라인의 얼굴이 올라오자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칼라인이 눈을 감자 긴 속눈썹이 돋보였다. 라틸은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관찰하고 싶어서 입술을 겹치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순간.
[도미스]
칼라인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들끓던 흥분이 싹 가라앉았다.
라틸은 칼라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입술이 겹쳐져 있으니 분명 이 소리는 칼라인이 속으로 생각한 말이다. 칼라인의 어깨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악몽을 꿀 때 외에는 마음을 꽁꽁 감추고 드러내지도 않던 칼라인이 자신과 입을 맞추면서 눈을 감고 ‘도미스’라고 부르자 몹시 불쾌해졌다. 칼라인이 눈을 감고 있는 것조차도 기분이 나빠졌다. 꼭 자신의 얼굴을 외면하기 위해 그런 것 같아서.
‘도미스는 죽었으니까, 눈 감고 혼자 세뇌라도 하는 거야? 눈앞에 있는 게 도미스라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만 보여서 라틸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라틸이 힘을 주어 밀자, 칼라인도 거부하지 않고 몸을 뒤로 뺐다.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의아한 눈으로 라틸을 보았다. 라틸이 인상을 구기고 있자 그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좋은 분위기였는데 라틸이 갑자기 왜 기분 상해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 라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이해가 안 되시겠지.’
칼라인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는 라틸이 속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걸 모르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안다. 아는데…….
“주인?”
“다른 볼일이 생각났어.”
“지금 말입니까?”
칼라인이 창문을 보았다. 어두컴컴했다.
“어.”
라틸은 차마 ‘왜 나랑 키스하면서 도미스란 여자 생각을 해?’라고 따지지 못하고 일어섰다. 칼라인의 얼굴도 굳었다.
“내가 뭘 실수한 겁니까?”
라틸의 표정을 보고 기분이 상했단 걸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라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아니.”
“하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아니, 넌 실수한 거 없어.”
라틸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헝클어진 옷이 정리했다. 하지만 바로 나가진 못했다. 어쨌든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함께 있어 주었기에. 게다가 자신도 비슷한 전적이 있긴 했다. 상대가 칼라인은 아니었지만.
“내 문제야. 신경 쓰지 마.”
라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칼라인에게 웃어 보이고서 어색하게 엄지로 문을 가리켰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 그러니까…… 넌 안에 있어. 난 가볼게. 신경 쓰지 말고. 네 잘못 아니니까.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