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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어머니의 결단과 유일한 사람 (94/367)

94화. 어머니의 결단과 유일한 사람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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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이 오빠가 미쳤나? 왜 엄마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라틸이 황당해서 입을 쩍 벌리는 찰나. 가짜 황제의 머리카락이 훌렁 옆으로 밀려났다.

1655109183043.png‘가발?’

엄마의 머리카락은 가발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그러다 가발이 치워지는 순간. 라틸과 똑같던 얼굴이 선대 황후의 얼굴로 변하자 아까보다 더욱 큰 숨소리가 동시에 또 터졌다. 처음에는 숨소리 다음 침묵이 찾아온 반면, 지금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훨씬 커졌다. 눈 나쁜 귀족들은 셰이트가 진짜 셰이트인지 확인하기 위해, 먹이를 쫓아 수면 위로 필사적으로 입을 뻐끔거리는 붕어떼처럼 자신들의 머리를 내밀었다. 하이신스는 채신머리없게 머리를 마구 기웃대진 않지만, 역시나 꽤 놀란 눈치였다.

1655109183043.png‘가짜 황제가 엄마란 얘긴 일부러 안 했으니까.’

라틸은 골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오빠에게 화가 났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저절로 눈이 레안에게 향했다. 라틸은 슬픈 표정을 짓고 선 오빠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라틸은 이 일에 엄마가 끼어 있다는 건 밝히지 않으려 했다. 엄마도 공범이지만, 일단 엄마를 끼워 넣은 건 오빠니까. 엄마와 이전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그래도 엄마에 한해서는 묻고 가려 했다. 그리고 오빠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겼다. 이젠 사이좋은 남매는 아니게 되었지만, 엄마를 향한 마음은 오빠나 자신이나 같은 거라고 믿었다. 엄마는 엄마니까. 그런데 오빠가 이렇게 나오다니…….

1655109183043.png“이야, 우리 오빠 말하는 거 좀 봐라?”

라틸이 팔짱을 끼면서 중얼거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라틸 쪽으로 몰렸다. 다들 라틸이 무어라 말할지 궁금한 듯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지금 이곳은 심해와 같았다. 수많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어둡고 고요하고 음산했다.

1655109183043.png“오빠가 주도해 놓고서 왜 엄마에게 덮어씌워?”

라틸은 대놓고 빈정거렸다. 몇몇 사람들이 눈치 없이 ‘말하는 거 보니 폐하다!’라고 소곤거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질 뻔했으나, 라틸은 눈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레안은 자기가 벗긴 엄마의 가발, 아마 변신 마법 아이템일 가발을 내려다보다가 눈길을 들어 라틸을 향해 중얼거렸다.

16551091830452.png“라틸. 나한테 화났구나. ……그렇겠지.”

1655109183043.png“오빠 같으면 화 안 나겠어? 내가…… 황제씩이나 돼서 XX, 가짜 소릴 들고 쫓겨 다녔어. 다른 나라 가서 도움을 청했어.”

게다가 석고상 흉내까지 냈다. 파티장에서 치마까지 뜯겼지. 라틸은 후, 바람을 불면서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그 얘긴 하지 말자.

1655109183043.png“게다가 지금은 대신들 모아 놓고 아주 공개적으로 남매 싸움까지 하게 됐는데, 화가 안 날까? 응?”

16551091830452.png“라틸. 넌 어머니에게 화를 못 내니 내게 덮어씌우고 싶은가 보구나.”

1655109183043.png“내가 덮어 씌워버리고 싶은 건 오빠 양심이야.”

레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서 자신이 손에 든 가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프게 웃었다.

16551091830452.png“난 너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었지.”

1655109183043.png“네가 언제.”

16551091830452.png“하지만 넌 어머니 명성을 깎을 수 없다고 도망갔어.”

1655109183043.png“내가 언제.”

16551091830452.png“그래 놓고선 이젠 모든 걸 내게 덮어씌우려 하고 있네. 편하게 돌아올 길을 놔두고 돌아 돌아 온 건, 어머니를 지키고 날 버리려는 거 아니니?”

1655109183043.png“뭔 헛소리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황당해서 라틸은 눈썹을 치켜뜨고 헛웃음을 뱉었다. 레안의 손안에서 가짜 머리카락이 바다에서 끄집어진 해파리처럼 흐늘거렸다.

1655109183043.png“애초에 오빠가 짜서 어머니를 끌어들인 거잖아. 신전에서 지내는 어머니를 끌어들인 건 오빠라고.”

레안은 라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모인 대신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16551091830452.png“다들 놀랐겠지. 하지만 내 동생은 이 모든 일, 범인이 어머니란 걸 다 알고 있었네. 라틸이 이 일에 대해 몰랐다면 내가 어머니가 진범이란 걸 밝혔을 때 가장 먼저 놀랐겠지. 하지만 다들 보았지 않나. 내 동생은 놀라지 않았어. 내게 화를 냈지.”

1655109183043.png“!”

저게? 라틸은 눈을 부릅뜨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내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가발을 공개적으로 벗겨 버리더라니. 애초에 이럴 계획이었구나. 하이신스 황제가 나서고 내가 다른 나라에서 좀비를 물리쳤단 걸 알게 되자, 이르든 늦든 결국 자기들이 밀릴 걸 알고서 일부러 이런 거야.

1655109183043.png‘그사이에 빠르게 계산을 하고서!’

라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 좋다 머리 좋다 했더니 잔머리가 제일 좋았구만.

1655109183043.png“어머니가 범인인 거? 맞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오빠에게 덮어씌우고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물러난 게 아니라 오빠가 날 잡아서 가둬버리려 하니 물러날 수밖에 없던 거야.”

16551091830452.png“어머니에게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 한들, 이런 일에 끼어든 나 역시 잘못이 없진 않지. 하지만 라틸. 설마 네가 모든 걸 내게 덮어씌우려 할 줄은 몰랐다.”

레안이 몹시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틸은 “개소리!”라고 외칠 뻔한 걸 꾹 참았다. 이미 대신들 앞에서 오빠와 남매 싸움을 벌이면서 황제로서의 체통을 숭겅숭겅 잘라 먹었다. 이성을 잃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대는 건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 레안만 하더라도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던가. 가련하고 슬픈 표정을 띠고서. 그때.

16551091887375.png“둘 다 그만 싸우거라.”

얼결에 원래 모습이 드러난 후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셰이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라틸의 주장이 맞든 레안의 주장이 맞든,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이는 셰이트 본인일 텐데. 그녀는 희한할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라틸과 레안은 어쨌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들은 우려 반 실망 반의 심정으로 셰이트를 쳐다보았다. 황후일 적,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셰이트가 갑자기 이런 일에 휘말렸다는 것도, 딸을 흉내 내면서 흑마법사로 몰아갔다는 것도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존경하는 선대 황후가 무어라 이 상황을 설명해주기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변명을 해주기를 바랐다.

16551091887375.png“라틸은 영문 모르고 이런 일을 겪은 피해자이고. 레안은……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생과 척을 졌지. 이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그러나 셰이트는 별 이유를 말하는 대신 그저 이 일이 자기 때문이라 덤덤히 말했다. 라틸은 그 대답에 열이 받아서 입으로 용암을 뿜을 뻔했다.

1655109183043.pn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16551091887375.png“네게 미안하다, 라틸. ……레안, 너에게도.”

라틸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롭게 “어머니!” 하고 외쳤다. 레안이 그녀를 끌어들였다는 걸 자신도 레안도 엄마도 다 아는데. 레안이 자기가 살고자 엄마를 주범으로 떠밀었다는 걸 방금 다 겪었는데. 이 와중에 레안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엄마가 라틸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셰이트는 그런 라틸을 빤히 바라보다가 옥좌에서 내려와 천천히 다가왔다. 라틸 주위에 선 하이신스는 셰이트가 가까이 오자 곧장 경계 태세를 취했다. 언제든 셰이트가 라틸을 공격할 수 있다 여기는 것처럼. 셰이트는 그래도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라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라틸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울면서 ‘엄마가 왜 거기서 오빠 편을 들어요!’라고 외칠 것 같아서. 하지만 라틸의 마음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이미 오빠 등짝 좀 때려 달라고 엉엉 울고 있었다. 오빠도 짜증 나고 엄마도 답답한데. 지금 가장 속상한 건 엄마의 눈빛이었다. 라틸은 알 수 있었다. 엄마가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있지만, 몹시 충격받은 상태라는 걸. 레안이 이렇게 나오는 건 미리 엄마와 합의된 일이 아니란 걸. 그런데도 엄마는 오빠에게 해가 갈까 봐 자신이 다 덮어쓰고 있는 거였다. 라틸은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하고 갑갑하고 싫었다.

16551091887375.png“폐하.”

1655109183043.png“…….”

16551091887375.png“폐하를 상처 입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어떤 처벌이든 받겠으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틸은 입술을 꽉 깨물고 엄마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옮겨 엄마의 어깨 너머에 선 레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 사태를 숨죽이고 바라보는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대신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었다. 라틸을 흉내 낸 게 친모인 선대 황후이고, 거기에 연루된 게 레안인데. 레안이 공범인지 어머니의 뜻에 따른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이유. 왜. ‘왜’ 선대 황후가 굳이 딸을 흉내 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라틸, 레안, 셰이트, 세 사람 다 말을 아끼고 있으니 시원하게 의문이 해결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그 표정을 본 라틸은 마지막으로 오빠를 보았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1655109183043.png‘엄마가 두 개 다 안고 가려는 거야.’

라틸은 엄마가 레안의 배신을 묵과하고 그가 주범이란 걸 묻어줌으로써, 라틸이 레안과 선대 황제에게 로드로 의심받았단 걸 같이 묻으려는 걸 알아차렸다. 엄마가 순순히 자기 탓이라고 인정해 버렸기에 레안 역시 ‘라틸이 로드 후보여서 그렇다. 아바마마도 라틸을 의심하고 조사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단 것도. 라틸은 이를 악물고 오빠를 노려보았다. 정의로운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만, 정의감에 취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술에 취하듯 정의감에 취해 자신이 남을 심판하고 재단하는 걸 즐길 뿐이다. 정의감은 독한 술이나 마찬가지여서, 거기에 취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헛소리를 해대는지 깨달을 수 없게 만든다. 라틸이 보기엔 오빠가 딱 그랬다. * * * 클라인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아침 산책을 하고, 좋아하는 식사를 하고, 대신관을 의식해 운동량도 좀 늘렸다. 이후 2차 목욕을 한 다음 휴식을 취하던 도중, 카리센 수도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일을 전해 들었다. 좀비라니. 수도 한복판 궁전 한복판에 좀비라니. 클라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쯧쯧 찼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그래도 바로 퇴치되었다니 어찌어찌 앞으로도 잘 해결되겠지. 클라인은 느긋하게 이 사태를 결론짓고서 블랙 커피를 마실지 카모마일 티를 마실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 소식에는 클라인도 느긋하게 대처할 수가 없었다.

16551091916842.png“잠깐, 잠깐만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폐하가 폐하가 아니었다니?”

클라인은 너무 놀라서 목욕 가운이 벌어지는 것도 잊고 버럭 외쳤다.

16551091916842.png“그게 말이 돼?”

16551091916851.jpg“지금 난리가 났답니다. 어느 시점을 계기로 폐하가 폐하가 아니었는데, 다시 진짜 폐하가 돌아온 겁니다.”

16551091916842.png“어느 시점이 언젠데?”

16551091916851.jpg“짐작가는 게 없으십니까……?”

16551091916842.png“최근 내내 만난 적이 없는데 짐작을 어떻게 해, 내가!”

16551091916851.jpg“아…….”

시종이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내자 클라인이 도끼눈을 떴다. 시종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서 덧붙였다.

16551091916851.jpg“그런데 몇몇 후궁님들은 이미 폐하가 가짜란 걸 아셨나 보더라고요. 진짜 폐하가 돌아오는 현장에 있다가 거기서 바로 폐하께 도움을…….”

16551091916842.png“뭐야? 누구누구?”

16551091916851.jpg“그…… 라나문 님과 게스타 님은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아트락시 공작님과 재상님이 이미 알고 계셨다 하니 두 분도 아셨을 테고, 대신관님과 타시르 님은 현장에 직접 가셨고, 칼라인 님은 아예 진짜 폐하를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나타나셨…….”

16551091916842.png“나 빼고 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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