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가짜와 진짜와 가짜2021.01.10.
헤움 황자가 이번에도 제풀에 달아나는 행운을 원했으나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인가. 황자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번과 달리 허리에서 검을 꺼냈다.
‘전엔 입을 엄청나게 크게 벌리고 달려들더니.’
자신의 나라 귀족들이 쳐다본다고 체면 차리나.
‘확실해. 헤움 황자는 좀비는 아니야. 이성이 있어. 레들러나 레들러에게 감염된 좀비들은 다짜고짜 주위부터 공격해댔잖아?’
생각을 하면서도 라틸의 몸은 대번에 튀어 나갔다. 오랜 훈련으로 익숙해진 감각이 적을 인식하자마자 검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팔을 움직이고 다리로 땅을 박차면서 라틸은 헤움 황자의 목을 노렸다. 하이신스가 이마에 검을 박아넣은 좀비는 그 일격으로 조용해졌다. 식시귀도 같은 방식이 통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황자님과 싸우고 있어.”
“헤움 황자님 맞죠?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죽은 사람들이 대체 왜…….”
“저 여자는 폐하 정부 아니에요?”
귀족들이 문가에 달라붙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동안, 라틸은 헤움 황자와 검을 이용해 싸웠다. 자신에게 달려들다가 달아난 전적이 있기에 처음에는 좀 만만하게 보았으나, 의외로 검을 맞대어보니 황자는 실력이 제법 좋았다. 라틸은 눈살을 찌푸렸다.
‘힘이…….’
죽은 자가 부활하면서 얻게 된 능력일까? 반응 속도나 검술 기술을 보면 헤움 황자는 서넛에게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 검과 검이 부딪칠 때 느껴지는 힘은 우악스러울 정도여서 몇 번 부딪치고 나자 손목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검을 섞을수록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차츰 왔다. 라틸은 검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걸 피하면서 그의 공격을 흘려보내고 자신은 헤움의 머리를 집요하게 놀렸다.
[왜 이번에는 그 괴상한 방어막을 만들지 않지?]
사이사이에 헤움의 생각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지만, 어느 쪽으로 공격할 거란 걸 제외하면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동감이다 자식아. 왜 오늘은 도망 안 가?’
주고받는 검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하이신스가 초조하게 발만 구를 뿐 끼어들지 못하는 게 보이는 바로 그때. 상대의 검에 밀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돌부리에 발이 걸려 몸이 휘청하는 순간. 라틸은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먼저 빠져나가 검을 휘두르는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구분이 가지 않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안 돼!”
거의 동시에 아이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이 균형을 잡으며 보니 어느새 헤움이 코앞에 다가와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눈을 희한하게 부릅뜨고 있었다. 마치 있어선 안 될 걸 본 것처럼. 하지만 표정이야 둘째 치고 이대로라면 목이 꿰뚫릴 순간. 검을 아래로 찌르던 헤움이 흔들렸고, 라틸은 균형을 잡으면서 그의 옆구리를 베어냈다.
‘낮다!’
목을 노린 건데. 너무 낮았다. 그러나 헤움은 상처를 무시하고 공격을 재개하는 대신 라틸과 아이니 쪽을 번갈아 보더니 황급히 달아났다. 라틸은 뒤를 쫓으려 했으나 상대의 도주 속도가 너무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 헤움이 사라지자, 라틸은 쫓기를 멈추고서 후 숨을 뱉었다. 헤움을 쫓아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처음 저주에 걸린 시체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걱정. 이런 저주 걸린 시체가 사람들 많은 곳 한가운데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던 그 걱정이 현실이 되어 훌쩍 다가온 탓이다.
“와아아!”
“세상에! 성기사인가 봐!”
“대단해!”
하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우레 같은 환호에 라틸은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안쪽은 상황이 완전히 정리된 건지 귀족들이 문가에 서서 환호하고 있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고. 라틸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다른 적이 아무도 없자 검날을 아래로 하고서 문가로 걸어갔다. 라틸이 다가오자 내내 긴장해 있던 하이신스가 가까스로 웃으면서 어깨를 쳤다.
“여전히 강하군, 사디 경.”
“안쪽은 어쩌고 여기서 다 구경입니까?”
“기사들은 다 제압했고 다친 사람들도 혹시 몰라 묶어놨다. 밖을 살피고 온 병사들이 말하길, 다행히 안쪽에서만 벌어진 소란 같고.”
라틸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일으킨 주범이 황자라서인가. 나중에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헤움 황자는 자기 나라 전체를 좀비 소굴로 만들 계획은 없는 모양이다. 레들러 한 명만 귀족들 사이로 들여보낸 걸 보면.
“칼라인은요?”
하이신스가 눈으로 안쪽을 가리키자 사람들 때문에 라틸을 보러 오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선 칼라인이 보였다. 라틸은 하이신스의 근위기사에게 검을 돌려주고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아이니 옆에 꼭 붙어 있는 루이스를 보았다. 루이스는 이쪽을 창백한 얼굴로 보고 있었는데,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눈에 띄게 흠칫했다. 그냥 지나가도 될 테지만, 라틸은 일부러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빈정거렸다.
“전투하기 쉽게 미리 드레스 재단해줘서 고마워요.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걸 예상했던 거지요?”
루이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사람들이 ‘사디’를 향해 환호하는 상황에서 차마 같이 말다툼하기 어려운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이니는 라틸을 보고 있지 않았다. 슬픈 눈으로 밖을 보고 있을 뿐. 라틸은 몸을 돌려 칼라인 쪽으로 다가갔다. 칼라인은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라틸이 다가오자 한순간에 봄기운을 주입 받은 겨울초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상대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한 걸 보자, 라틸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여기서 네가 왜 날 자랑스러워해?”
라틸이 소곤소곤 묻자, 칼라인은 허리를 굽히더니 라틸의 귀에 대고서 속삭여주었다.
“역시 아가씨는 가장 높은 곳이 어울립니다.”
“너…… 은근히 얼굴이 두껍구나.”
그런 말은 담백하게 하기도 어려운데. 라틸은 민망한 기분에 칼라인에게서 옆으로 반걸음 떨어져 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 대부분이 두려움에 찬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웃고 있었다. 칼라인이 생포한 좀비 기사가 으르렁 소리 내는 걸 보며 라틸은 무거운 한숨을 떨구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 * *
“짐과 타리움의 황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징후를 미리 포착하고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사디 양은 라트라실 황제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보낸 특사이지.”
하이신스가 연회에 참가한 귀족들에게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인 공표를 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사이. 라틸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황제일 때도 사람들의 시선은 많이 받았으나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황제일 때 사람들이 라틸에게 보내는 눈빛이 권력의 정점에 선 자를 향한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라면, 지금 사람들이 라틸을 보는 눈빛은 감탄과 애정 섞인 호기심이었다. 라틸이 헤움 황자를 물리치는 모습을 보았기에 다들 하이신스의 말을 믿는 건 물론, 라틸을 무슨 성기사 영웅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 자리에서 불쾌해하는 건 오로지 단 한 사람. 루이스뿐.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사디’가 하이신스가 정부로 삼으려 데려온 여자라 오해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방향을 바꿔서 그 소문의 출처였던 시녀들을 차갑게 보았으니 말이다.
“좀 잘 알아보지 않고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짜고짜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더니 이게 뭡니까.”
“충성심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저렇게 비뚤어졌다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하이신스는 이후에는 귀족들을 몇 그룹으로 나누어서 그들이 돌아가는 마차에 탈 수 있도록 기사들이 한 그룹씩 일일이 다 호위하게 했다. 반면 상처를 입은 귀족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궁전에 며칠간 격리하기로 했다. 부상 정도가 약한 몇몇 귀족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냉담하게 쳐다보자 결국 순순히 그 처치를 받아들였다. 라틸도 상황이 진정되는 걸 보다가 칼라인과 함께 자신의 손님용 방으로 돌아갔다.
“설마 이쪽에서 먼저 이 사태가 공론화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내가 가짜를 끌어 내리면서 공론화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틀라보다 헤움 쪽이 좀 더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 않아?”
“그렇군요.”
“…….”
“이게 나쁜 방향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가장 끔찍한 상황이 떠올라서.”
“가장 끔찍한 상황? 헤움이나 틀라 쪽이 황좌를 차지한 상황 말입니까?”
“아니.”
“아니라고요?”
“헤움 황자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게 됐을 때. 자기가 못 가지면 남도 못 가지게 할 거란 심보로 나라를 좀비 소굴로 만들려 하면 어쩌지, 뭐 이런 상황을 생각했어.”
“!”
그런 상황은 없게 해야지. 라틸은 작게 중얼거리고서 어느새 바로 앞에 나타난 방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 * * 연회장에서 일어난 괴이한 일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수도 전체에 퍼져갔다. 현장에 없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게 뭐냐고 손을 저었으나, 무장한 채 집집마다 샅샅이 살피고 다니는 병사들을 보자 긴장해서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아이니 황후의 아버지인 다가 공작은 남들과 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타리움 제국에서 온 특사가 헤움 황자를 물리쳤다고?”
다가 공작의 질문에 루이스는 “네.” 하고 불쾌한 듯 대답하면서 다가 공작의 표정 변화를 곁눈질했다. 아이니 측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루이스 역시 다가 공작 일파였다. 그리고 어제의 사건으로 아이니는 많이 놀랐다. 좀비에게 습격을 받을 뻔하기도 했거니와, 가장 친한 친구인 레들러가 괴물이 되어 나타났고 연인이었던 헤움 황자 역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가 공작에게 전할 이야기가 많았기에 현장에 있던 그녀가 직접 찾아온 것인데. 다가 공작의 반응이 이상했다.
“정말로 그 사디란 여자가 헤움 황자를 물리친 게 분명하냐.”
다가 공작은 아이니 황후가 무사하단 이야기를 듣자 그다음으로는 ‘사디’란 여자에게 집중했다. 좀비나 헤움 황자가 아니라.
“네.”
그걸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루이스는 다시 한번 더 차분하게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다가 공작이 이를 짓이기는 소리를 내더니 발을 쾅 구르면서 탁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
분노한 태도에 루이스는 깜짝 놀랐다.
“공작님?”
왜 저러나 싶어 묻자, 다가 공작이 이미 여러 번이나 물은 질문을 재차 또 물었다.
“사디란 특사가 헤움 공작에게 밀리려는 순간, 아이니가 분명 고함을 질렀다고 했지?”
“네. 헤움 황자님은 그 순간에 분명 주춤하셨습니다.”
루이스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황후님 목소리를 듣고 멈추신 게 분명해요. 아니었으면 그 사디란 여자는 분명 졌을 겁니다! 그런데도 다들 그 여자가 헤움 황자님을 물리친 것처럼 속아서는……!”
다가 공작은 주먹을 꽉 쥐더니 소파에 등을 파묻고서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의 이마에 파랗게 핏대가 서 있었다. 루이스는 다가 공작의 반응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야 그 사디란 여자와 트러블이 있었으니 화를 낼 만하지만, 공작님은 왜 저렇게 분노하지? 그때. 다가 공작이 이상한 말을 했다.
“네 말이 맞다. 헤움 황자를 쫓아낸 건 그 여자가 아냐. 아이니지.”
“그럼요, 황자님은 황후님을 지극히 사랑하셨으니…….”
“아니, 그래서가 아니야.”
“예?”
“아이니의 힘 때문이다.”
“힘……이라니요?”
다가 공작은 탁상을 쾅 걷어찼다.
“예전에 신전에서 아이니를 보내 달라 한 적이 있어.”
“그건 저도 알지만…… 그런 아이가 하나둘이 아니었지 않나요?”
“당시에 신관이 그랬지. 곧 어둠이 몰려오면 그들을 물리칠 사람이 나타나는데, ‘높은 확률’로 아이니가 그런 존재일 거라고.”
“!”
“당시엔 헛소리라 여겼지. 게다가 내 딸을 신관으로 만들 순 없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 루이스의 표정도 다가 공작과 비슷해졌다. 어제의 원한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공작의 이야기가 거기에 제대로 불을 질렀다. 루이스는 흥분해서 콧김까지 내뿜으면서 외쳤다.
“그러면 그 여자는 황후님 힘으로 황자님을 쫓아내고는 자기가 영웅 행세를 하는 거군요! 당장 이걸 알려야 합니다! 그 여자가 들은 칭송은 원래 황후님이 들어야 할 거예요!”
하지만 다가 공작이 손을 들어 ‘그만’ 신호를 보내자 루이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다가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약 진짜 내 딸이 어둠을 몰아낼 사람이라면 이건 고작 사람들 칭송을 듣는 수준에서 끝날 게 아냐.”
“그러면……?”
다가 공작의 입꼬리가 천천히 옆으로 벌어지며 그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 상황이 좀 더…… 나빠진다면.”
* * * 그 시각. 아침 식사를 하고 온 라틸은 창문 아래에 끼어 있는 종이쪽지를 발견하고 들어올렸다. 칼라인은 문을 닫다가, 라틸이 종이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걸 발견하고 물었다.
“타시르가 보낸 겁니까?”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쪽지를 꽉 쥐고 칼라인을 바라보았다.
“준비 끝냈대.”
“그럼…….”
“그래. 찾으러 가자. 내 자리.”